수험생활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후 한동안 방황했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직장생활 한번 해본 적 없는 채로 공무원시험까지 떨어지고 나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우울과 무기력증이 심해 일단은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부모님이 수심 가득한 얼굴로 출근하고 나면 집에 혼자 남아 온종일 넷플릭스를 보았다. 심슨가족을 보고 진격의 거인을 보았다. 법륜스님 즉문즉설에서 시험에 떨어진 청년의 사연을 찾아본다.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롭진 않지만 자살에 관련된 사연을 찾아보기도 한다.
스님이 '길 가다가 가게에서 멋진 물건을 봐서 너무 가지고 싶은데 돈은 없어. 훔쳐야겠어요, 안 훔쳐야겠어요?' 되묻자 질문자가 '훔치면 안 되죠' 한다. 스님이 다시 '그럼 살다가 힘들어서 죽고 싶다, 죽었으면 좋겠단 생각 들 때 확 죽어버려야겠어요, 죽고 싶어도 참아야겠어요?' 되묻는다. 순간 피식 웃음이 난다. 아... 죽고 싶어도 참아야 하는구나. 아이고 스님, 자살이 순간적이고, 어리석은 충동이란 걸 이렇게 직관적이고 재미나게 알려주시다니요... 고맙습니다.
우울과 무기력 개선에 도움이 될까 해서 베란다로 볕이 들어올 때 햇볕을 쐬본다. 야트막한 동네 뒷산에 올라 이 언덕 저 언덕 돌아다니고 손잡이에 줄이 달린 하늘색 바가지로 약수도 마신다.
아치형 구조물은 위에서 내리누르는 하중에 의해 더 튼튼해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지금의 내게 필요한 건 무작정 쉬는 게 아니라 일종의 압력, 생활에서의 구체적인 일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바몬 사이트에서 단기알바를 검색해 보았다. 20대의 젊은 청년을 찾는 일자리는 많은 반면 30대 중반의 아저씨가 할만한 일은 찾기가 쉽지 않다. 검색 끝에 마트 물류센터 일을 찾았는데 지원문자를 보낼까 말까 한참 망설였다. 곰곰 생각해 보니 30대 중반인 내가 일용직 일을 하러 가면 주변 사람들이 속으로 나를 무능력한 사람, 덜떨어진 사람으로 볼까 걱정이 됐던 것이었다. 내가 스스로를 못난 사람으로 보고 있으니, 아직 만나지도 않은 사람들이 나를 안 좋게 볼 거란 환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단기알바를 하게 된 곳은 지역 대형마트의 자회사였다. 마트에 진열하게 될 야채, 과일 등을 포장하는 물류센터였는데 나는 냉동식품 포장작업을 하게 됐다. 작업장은 20평 정도의 직사각형 방이었다. 냉동식품을 다루는 공간이라 냉방이 빵빵하게 돼서 싸늘했다. 50대 초반 반장 아저씨 한 명, 직원인 아주머니 4명과 함께 일하게 됐다. 작업은 중앙에 길게 놓인 직사각형의 스탠 테이블 두 개 위에서 이루어졌다.
아주머니들이 대량포장된 냉동명태를 작고 투명한 판매용 봉지에 담아 건네면 반장 아저씨가 컨베이어기계로 밀봉작업을 해서 나에게 넘겨준다. 나는 명태봉지를 박스에 담고 테이핑 한 뒤, 뒤편에 있는 파렛트에 적재한다. 박스 하나에 명태봉지를 13개 넣으면 4.5kg 명태박스가 완성된다. 팔레트 둘레로 박스 8개를 놓으면 1층이 완성되는데, 7단까지 쌓고 4개를 더 올려 60개로 만들면 반장 아저씨가 손기중기로 팔레트를 냉동고로 가져간다.
6개, 7개를 한 번에 잡으려다 봉지가 몇 번이나 손에서 미끄러졌다. 명태봉지 5개 정도가 두 손으로 잡기에 가장 적절한 개수이다. 5, 5, 3을 머릿속으로 되뇌며 명태를 박스에 담는다. 테이핑 기를 잡은 손으로 박스 위 양귀퉁이를 누르고 나머지 손으로 테이프를 박스에 붙인다. 장갑 낀 손으로 테이프를 떼려니 쉽지가 않다. 실수로 테이프끼리 붙어버리기라도 하면 포장작업이 한참이나 지체돼서 테이프 작업 할 때는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한다. 엉켜버린 테이프를 잡고 쩔쩔매고 있으면 내 앞에 명태봉지가 한가득 쌓인다. 그럴 땐 아주머니 한분이 나를 도와주러 온다. 별로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명태포를 상자에 쏙쏙 담고 테이프를 촥촥 붙이는데 쌓였던 명태포가 순식간에 없어진다.
컨베이어 벨트는 인간을 배려하며 돌아가지 않는다. 방에 모인 사람들이 잠시도 안 쉬고 필사적으로 일했을 때 겨우겨우 따라갈 수 있을 정도의 속도로 설정돼 있다. 도대체 누가, 왜, 이렇게 작업속도를 빠르게 설정해 두었을까? 이렇게 빨리 포장해서 도대체 뭘 어쩌려는 것일까? 사람들이 명태를 이렇게 많이 사 먹는단 말인가? 묵직한 피로가 느껴지는 팔로 헉헉대며 쉴 틈 없이 명태봉지를 담고 박스를 쌓아도 내 앞에 수북하게 쌓인 명태는 도무지 줄어들지 않는다. 명태봉지가 쌓이는 걸 보면 마음이 불안해진다. 나는 묵직한 피로가 느껴지는 팔로 냉동명태를 끊임없이 주워 담는다.
작업속도는 정말 빠른데 시간은 믿을 수 없이 느리게 흐른다. 박스에 수도 없이 명태를 넣고, 60개가 쌓인 팔레트를 몇 개나 만든 것 같은데 시간은 15분, 20분이 지났을 뿐이었다. 나는 투병생활을 하면서 몸이 쇠약해져서 남들보다 몸이 약하다. 쉬는 시간 10분이 주어졌을 때는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인적이 드문 어두운 복도의 장의자에 쥐 죽은 듯 누워있었다. 몇 시간 동안 박스를 쌓고 명태봉지를 담다 보니 허리도 아프고 손목도 시큰거린다. 몸이 아파져 중간에 작업을 할 수 없게 될까 봐 걱정이 된다. 작업이 끝날 때까지만 내 몸이 버텨주길 바랄 뿐이다. 중간에 못하게 돼서 다른 이들에게 무능력한 사람으로 보일까 봐 두렵다.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작업이 마침내 끝났다. 온몸이 쑤시고 다리에 힘이 풀려서 물류센터에서 버스정류장까지 5분 남짓 걷는 것도 쉽지가 않다. 퇴근시간대의 338 버스에는 빈자리가 하나도 없어서 비관적인 표정으로 입을 삐쭉 내밀고 버스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집에 도착해서는 온갖 고생 끝에 경찰의 추격을 따돌리고 은신처로 돌아온 범죄자처럼 씻지도 먹지도 않고 방바닥에 한참이나 엎드려 있었다. 집에서 미드만 볼 때는 하루하루가 책장 넘기듯 빨리빨리 지나갔는데, 신기하게도 오늘 하루는 참 길게 느껴졌다.
단기알바를 몇 번 하고 나니 이상하게도 무기력이 줄어들었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이 아니라 작은 일이라도 할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는 사람이란 걸 느껴서인 것 같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나씩 해보기로 했다. 출근길에 아버지를 따라나서 직장까지 아버지차를 운전하며 운전을 배웠다. 아버지가 일하러 들어가고 나면 주차장에 남아 한참 동안 후진주차 연습을 하다 돌아왔다. 일단 무슨 일이든 해보자는 생각에 하루종일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작성하고 공공근로든, 일반회사든 지원할 수 있는 곳은 모두 지원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