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보내는 다른 방법 2

by 쓰는 사람


일요일 밤 8시 15분에 집을 나섰다. 비가 꽤 많이 오고 바람도 강하게 불어서 우산을 45도로 들고 비바람에 맞서듯 걸었다. 감기로 코가 막히고 몸도 으슬으슬하고 그냥 집에 있을까도 싶었지만 오늘은 가야겠다 싶었다.

매일 같은 공간에서 지내는대로만 지내다보면 가슴이 답답해지는 순간이 온다. 이러면 안되는데, 뭔가 생활에 변화가, 새로운 경험이 필요하다 싶지만 나는 꾹꾹 참는다. 왜냐하면 귀찮고, 어딜 다녀올 계획을 짜고 다녀오는 건 내가 잘 하지 않는 일이고, 지내던대로 지내는 게, 틀에 박힌 삶을 반복하는 게 더 편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답답함이 괴로워도 지겨워도 그냥 사는대로, 살던 대로 답답하게 산다. 그게 습관처럼 굳어졌다.

답답함이 쌓이고 쌓여 더이상 미루면 안되겠다 싶어 잠바를 걸치고 집을 나왔다. 방에만 계속 있던 은둔형 외톨이가 편의점을 가는 것처럼, 버스라도 타고 아무데나 다녀와야지. 내 방만 잠시 벗어날 수 있다면 어디라도 좋을 것 같다.

혼자사는 사람이 가출하듯 집을 나왔다. 59번 버스의자에 등을 기대고 비오는 창밖 풍경을 본다. 매일 지나치던 풍경을 유심히 본다. 거대한 부처님상에 초록 분홍 파랑으로 길게 늘어뜨려 놓은 연등을, 그 뒤로 빛나는 빨간 교회십자가 등을, 유황먹인 닭 달걀 현수막을 본다. 마치 낯선 도시로 여행이라도 가는 듯하다.

종점까지 가보려다 카톨릭대학교 정류장에 내렸다. 와, 금정구청이 이렇게 생겼구나. 옆에 시의회도 있구나. 비바람이 몰아쳐 금새 운동화가 축축해진다. 샌들을 신고왔다면 좋았을걸. 번화가보다는 골목길이 보고싶어 주택가 쪽으로 걸어갔다. 오르막길로 빗물이 얇고 투명한 막처럼 쏱아져 내려온다. 청바지 종아리 부분은 벌써 다 젖었다. 편의점 알바생이 가게 앞에서 전자담배 피우는 걸 보고, 트럼펫과 피아노를 팔면서 온열 찜질도 하고 우크렐리도 가르치는 신기한 점빵도 보았다.

발길가는대로 걷다보니 카톨릭대학에 도착했다. 오줌이 마려워 눈앞에 보이는 건물로 들어갔는데 화장실이 안 보였다. 수상한 사람으로 오해받을까 걱정돼 그냥 나왔다. 빗살이 너무 거세져 카톨릭대 건물 벽면에 붙어 비가 수그러들길 기다린다. 투투투투투투투투투투투.... 빗물이 우산으로 쏟아지고 운동화에 막 튄다.

음... 양말까지 푹 젖었군. 이제 될 대로 되라 싶다. 피식피식 웃음이 난다. 오륜대쪽으로 난 오르막길을 따라 걸어가다 옷이 비에 젖어 으슬으슬하고 이제 슬슬 집에 가봐야 할 것 같다. 마침 내 쪽으로 오는 마을버스를 타고 장전지하철역으로 갔다. 왠지 평소처럼 안해야 될 것 같아서 노포동까지 안 가고 남산역에 내렸다. 버스시간이 좀 남아서 근처 롯데마트에 들어가 할인딱지 붙은 초밥도시락을 구경하고 망사수세미도 하나 샀다.

버스에 올라타 시계를 보고 놀랐다. 집 나온 지 두시간 정도밖에 안 되었기 때문이다. 비 맞고 옷 젖고 골목길 여기저기 기웃대고 쇼핑도 했는데 아직 두 시간 밖에 안 지났단 말인가? 마치 노래방에서 한 시간이 다 됐을 때 사장님께 20분 서비스라도 받은 듯 여분의 시간을 선물받은 느낌이다. 아마도 매일 살던 대로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고, 다른 시공간을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의 흐름은 지극히 주관적이며, 사람의 뇌는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생활을 굳이 뇌에 남겨두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매일 똑같이 살면 일주가, 한달이, 일년이 순풍순풍 지나가버린듯 느껴지는 것이다. 매일 유튜브와 인터넷 검색에 빠져살면 일년을 살아도 충실한 두 달만 못할 수 있다.

또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다녀온 길은 내가 수시로 지나다니던 길이었지만 평소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그건 내가 이 잠깐의 외출에 '여행'내지 '가출'이란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즉 사람은 어떤 식으로 의미부여를 하느냐에 따라 같은 시공간을 전혀 다르게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반복되는 일상을 어떻게 더 가치있는 것들로 채울지 고민하고, 그것에 나름의 의미부여를 해낼 수 있다면, 나는 지겹고 무기력하게 느껴지는 일상의 시간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비에 젖어 오들오들 떨면서 걸어오는 길에 이런 생각을 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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