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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 사람 Jul 18. 2024

연기란 무엇인가(2)

나는 기왕 하는 거 마음을 더 내보기로 했다. '다른 사람들이 하니까 빠질 수 없어서' 참여하는 건 내게 별 도움이 안 될 것이다. 마당극을 하는 나만의 이유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사실 일반인이 무대에 설 '기회'를 가지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내가 마당극의 특정한 역할을 맡는 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과연?)일 것이다. 그렇다면 특별한 경험을 할 계기이지 않은가? 게다가 나는 부끄러움이 많지만 한편으론 관심받기를 즐기는 '관심종자'이기도 하다.


내가 맡은 놀부 마당쇠 역할에 나란 사람의 성향과 상황을 더 적극적으로 반영하기로 했다. 마당쇠가 원래 섬세하고 여린 성격이라는 설정을 부여했다. 또한 내가 직장인 노동상담소에서 자주 목격해 온 비정규직, 미등록 이주 노동자들의 열악한 상황을 머슴살이에 투영했다. 기본 대본을 밑바탕으로 대사를 추가하고 입말로 읽어보며 어색한 부분을 수정했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 <저수지의 개들>에는 범죄조직에 위장잠입한 경찰의 이야기가 나온다. 닳고 닳은 악당들에게 자신이 범죄자임을 증명해야 하는 이 경찰은 예전에 마리화나를 밀매하다 발각될 뻔했던 이야기(물론 거짓말이다)를 들려주기로 마음먹는다. 중요한 건 자연스럽게 보이는 일이다. 그는 이야기의 대본을 '지껄이고 또 지껄여서' 스스로조차 실제로 경험했던 일처럼 느낄 정도에 이른다. 그는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상황을 될 수 있는 한 구체적으로(배경장소인 화장실에서 세면대의 비누가 고체비누인지, 액체비누인지까지)설정해둔다. 경찰이 혼잡한 술집에서 악당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던 도중 영상은 마약범이 화장실로 들어갔다가 마약탐지견을 데리고 있는 경찰 네 명과 맞닥뜨리는 장면으로 전환된다. 이것은 그의 거짓말이 하도 생생해서 악당들이 거짓말을 완전한 현실로 받아들였단 것을 뜻한다. 연기의 세계는 이처럼 신비하고 깊다. 이것은 온전한 연기, 온전한 이야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가 될 수 있단 걸 뜻한다.(경찰의 실감난 연기는 결국 엄청난 파국을 몰고 오게 되고...)


사실 내 걱정은 '연기를 실감 나게 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무대 위에서 대사를 까먹으면 어쩌나?' 하는 초심자의 것이었다. 나는 스스로가 놀부 밑에서 마음 부대끼며 머슴살이를 하고 있다고 상상하고, 비밀경찰처럼 틈 날 때마다 대사를 지껄여 보였다. 대사가 입에 붙을 때까지 반복해 보는 게 중요하다. 발표든 공연이든 연습의 고됨보다 제대로 못했을 때의 자괴감이 훨씬 크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연습이 부족해서 못하게 되면 두고두고 마음이 괴로울 것이다.


하지제 날에는 비가 내려서 마을배움터 앞마당에서 진행하려던 행사를 실내에서 하게 됐다. 아이, 청년, 어른 약 80여 명이 모여 앉으니 50평 남짓한 실내가 꽉 찼다. 마을책방지기인 L님과 G님이 행사 진행을 맡았다. 한데놀이, 아이부터 어른까지 함께 준비한 풍물공연, 마을학교 학생들 공연, 각 두레들의 공연이 이어졌고 마당극을 할 차례가 점점 가까워졌다.


우리는 공연 전에 중앙공간 왼편에 딸린 좁고 어두운 방에 미리 들어가 소품들 틈에 옹송그리고 있었다. 다들 긴장해서 별 말이 없었는데 M님이 잘 될 거라는 듯 지긋이 웃어 보인다. 바깥에서 사회자가 마당극의 시작을 알렸다. 해설자인 동생 K가 부채를 들고나가 흥부형제를 소개하고 뒤이어 놀부가 따라나갔다. 대학 때 응원동아리였던 K는 무대에 서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사람들을 보며 밝은 표정으로 외운 대사를 또박또박 말했다.

뒷짐 지고 있던 놀부가 똥배로 사회자를 밀쳐내며 '똥 누는 놈 주저앉히고', '변기에 다 튀어가며 오줌 싸는' 자신의 취미를 소개할 때 객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특히 앞줄에 있던 어린아이들이 우하하 웃으며 몸을 배배 꼬았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걸 보니 시작이 좋다. C님의 목소리와 몸동작에서 풍기는 독특한 웃음의 기운이 사람들에게 퍼져간다.


쫓겨난 흥부가 양식을 얻으러 놀부집을 다시 찾았을 때, 놀부가 똥물을 부어버리라며 마당쇠를 부른다. 드디어 내 차례다. 두근대는 가슴으로 '예이~'하며 무대로 나간다. 무대는 환하고 관객은 너무 많다. 침착하자. 평정심이 중요하다.


"휴... 괴롭네요. 저는 조용히 글 쓰면서 살고 싶은 사람인데, 어쩌다 이 집에 머슴살이를 하게 돼서 놀부 나쁜 짓 하는 거나 도와주고... 제가 마음이 좀 여리거든요. 누구 괴롭히고 이러면 밤에 잠을 잘 못 자요. 이게 너무 괴롭고... 이 아픔을 글쓰기로 승화시켜야겠어요." 


나는 불현듯 이전에 출간했던 <아플 때마다 글을 썼다>을 꺼내 들고 '글쓰기로 스스로를 치유해 가는 과정을 담았다'며 홍보했다. 이곳저곳에서 푸하하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작가란 걸 아는 마을 사람들은 머슴 역할을 통해 책 판매에 열을 올리는 게 우스웠던 모양이다. 마을 중학생 윤성이가 웃는 모습이 얼핏 보여 안심이 된다.


마을사람들은 엄숙한 평론가가 아닌 웃을 준비가 되어있는 관객들이었다. 이후에는 긴장이 좀 풀어져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며 말하는 속도를 조절하기도 했다. 뒤이어 사업주 놀부가 근로계약서를 안 쓰고 4대 보험도 안 들어줘서 괴롭다며 최근에 출간한 <일터의 얼굴들>을 홍보했고, 놀부에게 혼쭐이 난 뒤 퇴장했다. 대기실로 들어와 수그리고 앉았는데 가슴이 한참이나 콩닥콩닥 뛰었다. 내 부분이 끝나고 나니 그나마 마음이 놓인다.

밥주걱으로 뺨을 맞고 쫓겨난 흥부가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지금 이 순간'을 개사한 노래를 부른다. 성량이 풍부하고 음색이 맑아서 모두 숨죽이고 노래를 들었다. 밥을 먹고 싶단 식으로 우습게 개사를 했는데도 노래를 워낙 잘 불러 묘하게 감동적이다. 뒤이어 검정색 정장차림의 흰머리가 듬성듬성 난 제비가 박 씨를 선물하고, 흥부 부부는 커다란 박 세 개(풍선 세 개를 소품으로 씀)를 선물로 받게 된다.


비실비실한 흥부가 박을 못 열고 쩔쩔매자 흥부 아내가 못마땅해하며 나선다. 이때 스피커에서 <황비홍>의 주제곡이 흘러나온다. 흥부 아내는 불현듯 주머니에서 흰머리끈을 꺼내 이마에 동여매고 어잇! 어잇! 구호를 외치며 박 하나하나를 차력으로 깨 가기 시작한다. 흥부아내역의 L님이 이전부터 마을행사에서 차력을 선보여왔단 걸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 첫째 박은 격파로! 둘째 박은 장풍으로! 셋째 박은 한참 고심하더니 무림의 비급인 공중부양으로 깨버린다. 풍선이 터질 때마다 마을밥상 초대권, 마을 옷 잔치 초대권, 아빠두부(H님이 마을에서 만드는 두부) 제조비법서가 나오고 흥부부부는 먹을 것, 입을 것 걱정이 없어졌다며 뛸 듯이 기뻐한다.


흥부와 놀부가 화해해 덕계마을에 살게 되고, 언니두레 모두가 나와 신명 나게 꽹과리와 북, 장구를 치며 무대를 돈다. 관객 모두가 마당극이 이렇게 마무리되는구나 여길 때 갑자기 조용필의 '바람의 노래' 반주가 흘러나온다. 우리는 정색하듯 징과 장구를 내려놓고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바람의 노래'는 언니두레가 행사 때마다 티백처럼 우려먹은 노래인데, 우리는 사물놀이를 하는 척하다 또 이 노래를 불러버린 것이다. 누군가와 오랜 시간을 어울려 지내다 보면 당사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맥락의 농담들이 생긴다. 모인 마을사람들이 이 마당극을 보며 웃을 수 있었다는 건 우리가 그만큼 가깝게 지내고 있다는 얘기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제의 마지막 순서 때는 진의 기타 반주에 맞춰 마을 사람들이 노래 몇 곡을 같이 불렀다. 솔가와 이란의 '같이 살자'라는 노래에서 '같이 살자, 같이 살자꾸나'라는 후렴 부분을 따라 하는데 괜스레 눈이 시큰해지고 콧물도 났다. 준비된 공연이 모두 끝나고 준비팀이 미리 마련해 음식을 나눠먹었다. 매콤한 떡볶이와 포슬포슬한 하지감자가 잘 어울려 자꾸 먹게 된다. 함께 먹는 수박도 달고 시원하다. 다들 마당극이 재밌었다고 해주어 쑥스러우면서 뿌듯하다. 


행사 뒷정리를 끝내고 집에 돌아왔더니 밤 10시가 넘었다. 긴장이 풀려 졸음과 피로가 몰려오는 몸을 이끌고 온종일 미뤄둔 설거지를 한다. 몇 시간 전에 했던 공연의 여운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얼른 자야 하는데 이부자리에서 앉은 채로 마당극 대본을 다시 읽어본다. 놀부의 연체동물 같은 몸짓, 내가 대사를 말할 때 파하하 웃던 사람들, 흥부 아내의 '아니~'하는 콧소리 섞인 타박도 떠오른다. 아무리 생각해도 멋진 마당극이었어. 나는 이날 밤 꿈에서 어느 극단의 배우가 되어 제목도, 내용도 모르는 연극의 이름 모를 배역을 연기했다. 기분 좋은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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