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쓰는 사람 Oct 25. 2024

삽질의 역사(2)

그렇게 3학년이 끝나고, 휴학해서 영어공부를 하는데 등허리가 심하게 아파왔다. 그래도 은행원을 준비할 때는 간신히 버텨가며 공부는 할 수 있는 정도로 아팠는데 이제는 통증이 너무 심해서 책상에 앉을 수가 없었다. 난 당시에 이것을 몸의 문제로 여겨 병원을 찾아다니고, 민간요법을 검색했다. 이런저런 방법을 써봤지만 3개월, 1년이 지나도 몸의 불편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난 왜 몸이 아팠을까? 이 아픔은 내게 무엇을 말하는 걸까? 은행원 되기를 포기했을 때 나는 겉으로는 대수롭지 않은 듯 보였지만 속으로는 크게 절망했던 게 아닐까? 나는 힘든 상황에서도 무진 애를 써왔다. 성과는 지지부진했지만 그것을 위해 내가 얼마나 노력을 쏟았는지 나는 안다. 두꺼운 증권투자상담사 책을 몇 번씩 읽으며 두 번의 시험 끝에 겨우 자격증 하나를 땄다. 방학 때는 놀러 가지도 않고 도서관에 붙어있었다. 매일 도서관에 드나들면서 꾸역꾸역 자격증 영어 공부를 했는데 그런 노력이 다 한순간에 물거품이 된 것이다.


아... 내가 그동안 쏟은 노력이 의미가 없었구나. 노력해 온 게 다 물거품이 됐어. 내가 뭐 잘난 게 있나. 잘하는 게 있나. 나는 스스로가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했고, 취업이라도 해서 뭔가 할 수 있단 걸, 내가 그렇게까지 덜떨어진 존재는 아니란 걸 증명해보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 됐구나.


나는 나의 좌절감, 절망감, 허망함 같은 감정들을 보려 하지 않고, 못 보고, 실패했음에도 대수롭지 않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난 평생 불편한 감정을 외면하고 못 본 척하며 살아왔으니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다. 그 감정들이 내 몸을 통해 표현된 게 아닐까. 너 지금 굉장히 좌절감을 느끼고, 절망하고 있다고 몸이 신체증상을 통해 신호를 보낸 게 아닐까.


왜 여러 부위 중에서 허리와 목이 아팠을까. 또 책상에 앉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아팠을까. 허리와 목 통증은 서 있을 때는 그나마 덜했다. 의자에 앉으면 1분도 안 돼서 목과 등이 숨 쉬는 게 불편할 정도로 뻣뻣하게 굳었다. 나는 그것이 척추관절에 변형이 생겨서 일어나는 통증과 불편함이니 척추관절을 치료해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 통증은 나에게 구체적인 뭔가를 말하고 있지 않았을까?


책상 앞에 앉았을 때 증상이 심하게 나타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그건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를 하기를 거부하는 마음이 나타난 게 아닐까? 뭐든 열심히 한다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달리 취업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드러난 게 아닐까? 왜냐하면 노력해 봤자 안될 거니까.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노력해도 안 된다는 것을 확인해 왔으므로.


취업준비를 한다는 건 내가 처한 상황에서 절대적인 조건이다.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 대부분은 어딘가에 취직하려 하니까 나도 그걸 안 할 순 없다. 그런데 난 뭔가를 해봤자 안될 거라는 강한 믿음이 있다. 그건 내가 이제까지의 삶에서 반복적으로 확인한 나라는 인간의 실상이다. 내가 뭔가를 이룰 수 있을 리가 없으므로 취업준비를 하는 것은 쓸데없는 노력이 된다. 어디에도 가닿지 못할 노력을 구태여 할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노력을 할 수 없게 몸이 아픈 것이다. 공부를 할 수 없는 방식으로 몸이 아픈 것이다.


다르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난 나란 사람이 누구이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한 고민 없이 막연하게 남들에게 번듯해 보일 수 있단 이유로 은행원이 되려 했다. 은행원이 돼야 하는 나만의 이유가 없었다. 왜 해야 하는지가 뚜렷하지 않은 채로 엄청 열심히 하다 실패했고, 의자에 앉을 수 없는, 취업준비를 할 수 없는 형태로 아픔이 나타났다. 이 증상은 나에게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 네가 별 마음도 없는 것에 더 이상 죽자 사자 매달리지 마. 일단 네가 살고 싶은 모습은 어떤 것인지 고민해 봐.


은행원을 포기하고 나서 몸이 엄청 아파졌지만 은행원을 준비하는 도중에도 몸은 아팠다. 실패했을 때와 노력하는 과정에서의 차이는 무엇일까? 왜 실패했을 때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안 좋아지고, 뭔가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도중에는 아프긴 하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견딜 수 있는 통증이 나타난 걸까?

노력하는 과정에서는 안될 것 같지만 어쩌면 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는 있으므로 노력을 어느 정도 이어갈 수 있을 정도로만 몸이 아픈 것이다. 실패했을 때는 해봤자 안된다는 것, 노력하는 게 헛수고란 걸 분명하게 확인했으므로 어떤 노력도 할 수 없는 형태로 몸의 아픔이 나타난다.


즉 노력하는 도중에도, 노력이 실패로 돌아간 후에도 내가 가진 기본전제는 '해봤자 안된다'이다. 뭔가를 되기 위해 노력하는데, 속으로는 안 될 것 같다고 믿으므로 쓸모없는 노력을 안 해도 되는 방식으로 신체증상이 나타난다. 노력하는 것은 고되고 힘든데 안될 일에 힘을 쓰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난 언제부터인가 은행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은행창구 직원들이 서류를 넘기며 직인을 탁탁 찍어대는 것을 보며 생각했다. '흥, 나는 저렇게 판에 박힌 서류 작업만 하면 숨이 막힐 거야. 이렇게 자유롭게 글 쓰면서 사는 게 백번 낫지'


한 은행이 금리가 높은 특판예금을 만들었다가 너무 많은 사람이 신청해 손해가 날 것 같으니까 고객들에게 예금 해지를 부탁했다는 기사를 보고 속으로 욕을 몇 번이나 했다. 자기들은 대출이자 몇 달 못 갚으면 조용히 웃으면서 담보로 잡힌 아파트를 빼앗아가면서 어떻게 뻔뻔하게 저런 부탁을 하는 걸까? 자기들은 선처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고객들에겐 선처를 부탁할 수 있는 걸까? 마치 악덕상인이 법인의 형태로 구현된 것 같아.


<분노의 포도>에서 '은행은 사람하고 달라요. 사실 은행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모두 은행이 하는 일을 싫어하지만 은행은 상관 안 합니다. 은행은 사람보다 더 강해요. 괴물이라고요. 사람이 은행을 만들었지만 은행을 통제하지는 못합니다.' 같은 구절이라도 발견하면 괜히 마음이 동해 메모해 두었다. 은행에 들를 때마다 창구직원에게 <분노의 포도> 읽어봤냐고,  선생님도 사실 은행을 싫어하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두 형제가 악덕은행을 털어서 은행대출금을 갚는다는 줄거리의 <로스트 인 더스트>란 영화를 좋아했다.  


은행에 대한 내 반감은 책과 기사를 읽고 스스로 사유하여 만들어낸 생각이라기보다 은행원이 되려 했지만 되지못했던 나의 열등감이 뒤틀린 형태로 드러난 게 아니었을까. 내가 오랫동안 돈 많다고 잘난 척이나 한다고 기억하고 있었던 그 은행 면접관은 사실 나를 위로해 주고 뭐든 도움을 주려했던 친절한 사람이기도 했다. 난 은행에 대한 건 뭐든 부정적으로만 인식했던 것 같다.


돌아보면 난 내가 취업준비하고 몸이 아팠던 시절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취업준비하다 몸이 아팠고, 몸이 아파서 더 이상 취업준비를 못했다는 식으로 막연하게 정리했다. 이제는 몸이 나았으니 상관없는 과거의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드라마 체르노빌의 대사처럼 '원인을 알지 못하는 사고는 또 일어나기 마련'이다. 난 오랫동안 내가 겪었던 아픔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고 그 때문에 그 아픔을 비슷한 양상으로 여러 번 반복해서 겪어야만 했다.

이전 07화 삽질의 역사(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