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신이 존재한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하루였다.
무작정 집을 나와서 당산에서 2호선을 탔다.
열차에 탄 채로 국립중앙박물관과 서울시립미술관 중에 어디를 갈지 고민하다가 한 번에 갈 수 있는 시립미술관을 선택했다.
미술관을 나와서 대한문 앞 던킨에서 멍 때리다가 미사를 가까운 명동에서 볼지 집 근처 성당에서 볼지 고민하다가 명동성당을 선택했다.
바로 갔다면 5시 미사를 볼 수 있었지만 시간을 좀 더 때우다가 6시 미사를 보기로 했다.
가는 길에 웬 나이 지긋한 외국인 여성이 명동성당 가는 길을 물었다. 나도 마침 가는 길이니 나를 따라오라고 했다. 알고 보니 그분은 통역사였다. 걸으면서 우리 직업에 관해 즐겁게 얘기를 나눴다.
그분을 보내고 나는 6시 미사에 입장했다. 평소와 달리 오늘은 앞줄에 앉아 제대를 더 가까이 보고 싶었다. 성당의 품에 안겨 위로받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우리 가족이 내 눈앞에 떡 나타났다. 순간의 내 실수로 2주간 연락이 끊겼던 가족이.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우리는 미사를 마치고 저녁을 먹고 원구단 스타벅스에서 입가심을 하고, 서울책읽는광장에서 밤공기도 쐬며 행복을 만끽하고 각자 집으로 갔다.
그러니까 내가 국박을 가기로 했다면, 집 근처 성당에 가기로 했다면, 명동성당에 갔더라도 6시 미사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성당에서 앞줄에 앉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기적이었다는 말이다. 이사악을 바치려는 순간에 하느님으로부터 다른 제물을 받은 아브라함은 이런 느낌이었을까?
내 지금 처지가 어떻든, 가족의 단점이 얼마나 크게 보이든 간에, 난 가족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구나, 내 편은 가족밖에 없구나, 라는 걸 깨달았다.
오늘의 기적에 감사하고 열심히 살아야겠다. 미사도 빠지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