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김그늘 Dec 15. 2020

그렇게 며느리가 된다

<마더 퍼커 : 엄마를 위한 나라는 없다> 19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나한테 대체 왜 이러는 거냐고!"



2018년 3월. S병원 산부인과 병동을 지나다 저 말만 반복하면서 울부짖는 여자의 소리를 들은 사람이 있을까? 창피하지만 그건 나였다.  


적고 보니 막장 드라마에서 배신감에 부르르 떠는 주인공이 연상되는데, 그땐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날 아침, 제왕절개로 쌍둥이를 낳았다. 그리고 수술 첫날은 1인실에 입원해야 한다는 병원 규칙에 따라 오후엔 1인실로 옮겨졌다(처음엔 바가지인가 싶었는데, 다인실로 옮긴 후 이게 얼마나 귀한 하루였는지 절감했다. 대학병원에서 하는 제왕절개 수술의 입원 기간은 3박 4일밖에 되지 않는다). 마취가 풀리자마자 온몸의 감각이 통증으로 살아났고, 몸을 아주 조금만 움직여도 뱃속에 불이 나는 것 같았다. 손가락 말고는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런 산모를, 남편은 두 시간 넘게 혼자 두었다. 어머니를 모셔다 드리기 위해서였다.




고부 갈등도 잠복기가  

남자 친구 J는 결혼을 거의 포기했다. 주변에서 물으면 "한 사람만을 평생 사랑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라고 되묻기도 하고, "일부일처제는 자본주의에서 살아남기 위한 강제 결혼이지" 같은 소리도 했다. 그렇다고 현대의 결혼 제도에 무조건 회의적이냐, 그렇지만은 않다. 종종 술에 취해 전화하면 늘 하는 소리. "넌 좋겠다! 남편도 있고, 자식도 있고!" 그뿐인가. 남편 닮은 딸과 날 닮은 아들을 볼 때마다 그만 좀 투덜거리고 행복한 줄 알라고 잔소리를 퍼붓는다. 친정 엄마가 따로 없다.


1인 가장으로서 재테크에 열성적인 J가 주식 폭락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고부 갈등이다. 상상만 해도 숨이 막힌다나. 한때는 최측근 여성이 시어머니를 친정 식구보다 더 좋아하는 걸 보며 고부 갈등이 없는 결혼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 며느리가 경로를 이탈하는 바람에 희망을 버렸다. 아, 그 경로 이탈한 며느리도 나다.


나는 시어머니를 정말 좋아했다. 돌봄의 손길을 별로 느끼지 못하고 성장한 내게 '헌신적인 삶' 자체인 어머니는 내 결핍을 채워줄 구원자 같았다. 어린 시절, 언니 있는 친구를 무척 부러워했던 내가 오빠의 결혼으로 (새)언니를 얻은 것처럼, 할머니와 고모로는 채워지지 않았던 엄마의 자리를 나의 결혼 후 '시엄마'로 채운 것 같았다.


결혼식 날, 어머니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우는 고모를 달래며 약속하셨다. 나를 딸처럼 아껴주겠다고. 실제로도 그렇게 하셨다. 내 생일에 용돈을 보내셨고(본가에선 없던 일이다), 좋아하는 반찬을 만들어 보내셨으며, 명절에 내게 가장 많이 하는 말씀은 "내가 할게, 넌 쉬어"였다. 남편과 아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감정을 공유하며, 서로에게 힘을 실어주는 관계. 나는 어머니와 그런 사이라고 믿었다. 추억의 드라마 <한 지붕 세 가족>에서 시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던 신세대 며느리 혜숙(김혜수)처럼, 아주 쿨하게!


무탈했던 시댁과의 관계엔 시누이의 역할이 컸다. 시아버지의 잦은 전화에 스트레스를 받았던 시누이는 부모님께 누누이 말했다고 한다. "무소식이 희소식이야. 애들이 전화하기 전에 먼저 전화하지 마." 시부모님은 반찬을 보낼 때 말고는 정말 전화를 먼저 하시는 일이 없었다. 전화를 걸면 늘 "너네 잘 있으면 됐어"라고 하셨다.


하지만 아이들을 낳은 뒤, 이상적이던 고부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엄마 같은 시어머니, 딸 같은 며느리'는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영원한 사랑과 별반 다르지 않은 판타지였다. 내 부모는 내가 선택할 수 없지만, 시부모는 내가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도 착각이었다. 출산 전을 결혼의 1막, 출산 후를 결혼의 2막으로 나눈다고 했을 때, 2막에는 1막과는 상당히 다른 캐릭터의 시부모가 등장한다.


나는? 아들과 결혼한 '남의 집 딸'에서 이 집안의 대를 이은 '우리 며느리'가 되었다. 얼핏 좋게 들린다고? 글쎄. 친정 식구들과 몇몇 친구들은 아들도 낳았으니 이제 큰 소리 내고 살겠다 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출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시댁에서 내 나름의 삶을 존중받고 있다고 느꼈다. 그런데 남편의 성을 쓰는 아이들을 낳은 후, 내 이름 석자를 간신히 지키고 있는 기분이다.



 

어머니, 전 정말 괜찮습니다

입원 첫날. 어머니를 우리 집에 모셔다 드리기 위해 나를 혼자 둔 건, 악다구니를 쓸 만큼 서럽긴 했어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우리에겐 택시비 5천 원 미만의 거리가 가까워도, 어머니에겐 서울 지리도, 우리가 사는 아파트 구조도 낯설 테니까.


어머니는 수술 전날,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오셨다. 문제는, 그 일을 결정하는 과정에 나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는 어머니가 오시는 게 사실 부담스러웠다. 일단 대학병원에서 진행되는 수술은 보호자를 한 명으로 제한했다. 남편밖에 내 옆을 지킬 수가 없는데, 다른 가족이 온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수술 시간은 길어야 한 시간. 그동안 밖에서 날 위해 기도를 하시는 게 의미가 있을까? 병원에서 퇴원하면 곧장 조리원으로 가는데, 그곳 역시 남편 외의 관계자는 들어올 수 없었다.


우리는 여러 번 사양했다. 조리원에서 나오면 그 이후에 와주시라고. 하지만 어머니는 엄마의 마음으로 고집을 꺾지 않으셨다. 내 곁에 있어 주고 싶다고. 나도 남편도 어머니를 챙길 상황이 아니라 마음이 불편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렇게 오셨는데, 어머니의 얼굴이 좋지 않았다. 몸살이 심하게 나서 링거도 맞으셨다고 했다. 한쪽 눈엔 핏줄이 터져서 병원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할 사람은 어머니 같았다. "너 보러 오고 싶어서. 아이들도 보고 싶고. 나는 괜찮아." 그게 어머니였다. 늘 자식이 먼저라 자신은 돌보지 않는. 그 모습이 처음으로 맘에 들지 않았다. 그건 불편한 희생이지, 숭고한 헌신이 아니었다.  


걱정한 대로 나는 터져버렸다. 남편이 교통이 혼잡한 병원 근처를 빠져나가 어머니를 집에 모셔다 드리고 이것저것 필요하실 만한 것들을 안내하고 다시 내 곁으로 돌아오기까지,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나는 진통제 효과로 잠이 들 때까지 계속 울부짖었다. 이건 절대 날 위한 게 아니라고, 어머니도, 남편도 나한테 이래서는 안 된다고.


그래도 훗날 출산 무용담처럼 떠들 만한 일이었다. 자꾸 했던 말 또 해서 믿음이 안 갈 수도 있지만, 이해하려면 이해할 수 있었다.


이튿날. 다인실로 옮기고 고시원 방처럼 좁아진 침대와 주변의 소음에 신음하고 있는데, 남편이 나를 옆에 둔 채, 보호자 간이침대에 나란히 앉아 있던 어머니한테 매우 송구한 말씀을 드렸다. 나를 혼자 두면 안 될 것 같아 못 모셔다 드린다고, 오늘은 택시를 타고 들어가시라고, '어머님 용서하세요' 말투로.


순간 어머니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하는 걸 보았다. 어머니 얼굴에 그런 표정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늘이가 많이 서운했구나..."


야, 이 눈치를 엄마 몸속에 놓고 나온 남자야! 그게 지금 할 소리니? 이 남자가 외교를 했다면 그 나라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매일 불바다였겠지... 나는 재빨리 상황을 정리했다. "아니에요, 어머니. 저 집에서 가져올 책도 있고, 모셔다 드릴 거예요."


지금도 생생하다. 순식간에 굳어버린 어머니의 얼굴, 많이 서운했구나 하고 말을 잇지 못하실 때 싸늘해진 주변 공기... 하지만 이것 또한 이해하려면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다. 수술실에서 나온 내 다리를 연신 주무르며 괜찮은지 물어보셨던 어머니였다. 의료진이 올 때마다 혹시 내가 어디가 잘못된 건 아닌지 묻느라 눈총을 받은 분(그래서 또 분위기가 불편했지만).  


사랑해 마지않았던 어머니에게 거리감을 느낀 건, 한 마디 때문이었다.




고부, 강을 건너다

퇴원하던 날. 남편이 차를 빼는 동안 어머니와 나는 아이를 한 명씩 안은 채 주차장으로 갔다. 내 몸 하나 추스리기도 힘들 때. 만지면 부서질 것 같은 작은 생명체를 안고 서 있자니 몸이 벌벌 떨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옆에 보이는 벤치에 잠깐 앉았는데, 어머니가 발을 동동 구르셨다. 주차장 먼지가 아이들한테 해로울 텐데, 얼른 차가 와야 하는데...


남편의 차가 보이자 어머니는 첩보원을 방불케 하는 날쌘 몸짓으로 움직이며 나를 부르셨다. "그늘아, 빨리 와."


나는 흐느끼며 말했다. "어떻게 빨리 가요..."


물론 못 들으셨다. 들으실 만한 성량이 되지 않았다. 들으셨다고 해도 그저 몸을 일으키며 으으으 하는 소리로 들으셨을 거다.


조리원으로 가는 길. 어머니는 카시트에서 자고 있는 희희를 보는 내내 안타까워하셨다. 낙낙이는 당신이 안고 있어서 편하게 자는데(걔는 원래 잘 자요, 어머니.), 희희는 벨트 때문에 불편하게 자는 것 같다고(걔는 원래 좀 인상파랍니다).


친정 고모가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아마 빽 하고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모르는 말씀 마시라고, 아이들 안전을 위해 설치하는 게 카시트인데 무슨 말씀이냐고, 카시트가 없으면 퇴원도 안 시키는 나라도 있다고. 원래 계획은 두 아이 모두 카시트에 태워 조리원까지 가는 것이었는데, 어머니와 함께 가기 위해 카시트 하나를 뗀 거라고...


그때 우리가 무슨 다리를 건넜더라? 양화대교였나? 나는 가슴이 답답해 창 밖만 바라봤다. 하필 미세먼지가 심해 도시가 뿌연 날이었다.


그렇게 나와 어머니는 강을 건넜다.  


창 내고자 창 내고자 이 내 가슴에 창 내고자...















매거진의 이전글 조리원은 그런 것이 아니다 2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