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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그늘 Dec 21. 2020

이 자리가 핑크석이다! 왜 말을 못 해?

<마더 퍼커 : 엄마를 위한 나라는 없다> 20

"자리를 굳이, 비워놓을 필요까지 있어?"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에 앉는 비임산부들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데, 한 친구가 물었다. 임산부가 보이면 자리를 비켜줘야 한다는 생각은 다들 할 텐데, 언제 탈지 모르는 임산부를 위해 자리를 비워두는 게 당연한 일이냐고, 좀 더 유연한 태도가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기혼에 자녀 계획도 있는 동성 친구의 말에 적잖은 배신감을 느꼈다.


설득하고 싶었다. 말한 대로 대부분의 다정한 시민들은 '배 나온' 임부를 발견하면 임산부 배려석이 아니어도 자리를 양보할 것이다. 하지만 신체 변화와 유산 위험이 큰 초기 임산부는 겉으로 티가 나지 않는다. 임산부 배려를 부탁하는 핑크색 배지도 달지만, 혼잡한 지하철 안에서는 귀에 걸고 다니지 않는 이상 눈에 띄지 않는다. 경험한 바로는 다정한 시민들도 스마트폰을 보면서 눈앞의 만삭 임부를 못 볼 때가 있다...


얼마나 흥분해서 말했던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친구는 공감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는데, 이어지는 말을 들어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요즘 많이 서러웠나 보다?"     


 

 

여성도 임신한 여성을 모른다

"이봐요, 그 자리는 교통 약자석(Prioritiy Seat)이에요."


싱가포르에 사는 친구가 지하철에서 들은 말이다. 고개를 들자 한눈에 임산부라는 걸 알 수 있는 여성과 그 옆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성이 보였다(두 사람 다 싱가포르인이었는데, 일행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의 눈빛은 말하고 있었다. '이봐요, 얌체 외국인. 모르는 척 교통 약자석에 앉아 있지 말고 얼른 일어나지 그래요?' 친구는 낯가림이 심하고 목소리도 작은 편이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이봐요, 나도 임산부예요."


친구는 임신 3주 차였다. 대자연의 공격 같은 입덧에 휘청대면서도 뱃속의 점만 한 태아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닐까 노심초사하던 시기. 몰상식한 외국인에게 일침을 놓으려 했던 남성은 크게 당황했고, 재빨리 사과했다. 배가 나오지 않은 내 친구를 보며 비슷한 생각을 했을 임산부는 어색하게 웃었다.


내가 핑크석에 앉는 절대 절대 임신했을 리 없는 남성들에 대해 거품을 물며 말했을 때, 남편은 의아한 듯 말했다. "이상하다. 내가 본 사람들은 늘 젊은 여자였거든?" 남자라서 잘 몰라보는 게 아닐까? 친구처럼 임신 초기라 티가 안 날 수도 있잖아? "그럴 수도 있지. 근데 옷차림만 보면 임부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스타일 있잖아. 추운데 옷을 정말 얇게 입었다거나 엄청 높은 구두를 신었다거나..." 남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서울 지하철에 임산부 배려석이 등장한 지 벌써 7년이 지났다고 한다. 처음엔 자리 위에 임산부 배려석을 나타내는 엠블럼을 부착했는데, 스티커만 붙여놓은 자리가 무용지물이라는 비판이 이어지자 2015년엔 등받이부터 좌석까지 핑크색으로 덮는 '핑크카펫'을 깔았다. 눈에 확 띄는 핑크색 디자인은 임산부 배려석에 대한 인식을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지만, 문구가 문제였다


'내일의 주인공을 맞이하는 핑크카펫'

'핑크카펫, 내일의 주인공을 위한 자리입니다'


저출생 시대에 미래의 인적 자원이 중요하다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임산부를 아기 캐리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로 만든 문구를 볼 때마다 한숨이 나온다. 임산부 배려석이 필요한 건 임신한 여성이 교통약자이며, 아직까지 임산부를 배려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친구들은 서울에서 아이와 외출 몇 번만 하면 향수병이 싹 사라진다고 했다. '먼저 내리고 타기'를 지키는 건 손해 보는 짓이고, 엘리베이터와 회전문은 끼기 십상이며, 유아차와 아이가 있는 여성은 내려서 도와야 할 승객이 아니라 그저 성가신 존재니까. 미취학 아동인 친구의 딸은 한국 사람들이 감사의 인사를 하지 않는다고 속상해 했다. "이모, 난 엘리베이터를 타면 뒤에 오는 사람을 꼭 기다리거든요? 그런데 아무도 고맙다고 안 해요, 이상하죠?"   




여기서 도장 깨기 하시면 안 됩니다

자칭 소셜포비아지만, 한동안 매일 SNS를 들락거렸다. 책을 한 권 내고 나니 세상에 내 책의 흔적이 있는지 몹시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게 된 댓글 하나. "제목만 보고 페미 책인 줄..."


어쩐지 느낌이 싸했다. 나는 초짜에 모순도 많지만, 누군가 페미니스트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여자라서 불편하고 여자라서 불안하다고 느꼈다면, 그래서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면 누구나 페미니스트 아닌가.


그런데, 책을 추천한 사람은 내가 생각하는 나의 성향을 몰라봤다. 그런 책 아니라고, 읽어보면 괜찮을 거라고(아닌데?!). 나는 불안하고 찜찜하면서도 너무 궁금한 나머지 문제의 댓글을 클릭했고, 곧 후회하게 됐다.


그 계정에는 지하철 핑크석에서 찍은 인증샷이 여러 장 올라와 있었다. 마치 도장 깨기를 하는 것처럼. 비워두기를 권장하며 인형을 놓아둔 노선에서는 '이런다고 내가 못 앉을 줄 알고?' 식의 허세까지 부리면서.


핑크석을 향한 일부의 혐오는 알고 있었다. 핑크석에 표시된 임부와 아이를 동반한 여성 그림에 X자를 친 사진과 임산부 배려석에 앉은 여성에게 정말 임신한 거 맞냐며 위협하는 남성의 영상을 보았다. 하지만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일상을 올리는 소셜 미디어에서, 게임 레벨도 아닌 핑크석 인증샷을 보게 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계정의 주인은 자칭 우파였다. 보수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애국 청년. 그는 핑크석 도장 깨기를 하는 것이 신념을 지키기 위한 실천인 것처럼 굴었다. 더 소름 끼치는 건, 여성 팔로어가 단 댓글이었다. "핑크석 앉았다고 시비 거는 X 있으면 조져버리시길."




임신하면 비로소 보이는 핑크석

핑크석을 여전히 불편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 흔히 말하는 선진국에도 임산부 배려석은 없다고, 교통 약자들 가운데 특별히 임산부만을 배려하는 건 역차별이라고.


갈수록 심해지는 계급 갈등과 약자를 향한 혐오가 그러하듯, 핑크석을 둘러싼 대립 또한 파이 싸움이다. 노동은 넘치고 고용은 불안한 경쟁 사회에서, 지칠 대로 지친 현대인은 지하철 좌석에 꽤 큰 의미를 부여한다. 누구나 자신이 낸 세금에 엉덩이를 올리고 싶으니까. 자리는 권리고, 양보는 곧 손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언젠가 자신도 노약자석에 공짜로 앉을 날이 온다고 생각하는 것과 달리, 임산부 배려석을 자신의 삶과 연결시켜 생각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나 역시 그랬을 것이다. 임신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중 첫 번째가 핑크석이었으니까.


임신 후, 핑크석에 앉은 비임산부(이자 비교통약자)들이 앞에 서 있는 나를 못 본 척 스마트폰에 얼굴을 파묻거나 잠을 청할 때면 설움이 복받쳤다. 이봐요, 이 배 안 보여요? 그 핫핑크색 의자는 나처럼 임신했거나 어린 아이를 동반한 여성을 위한 배려석이라고요! 핑크 카펫을 깔면 뭐해, 임신 후 세상은 잿빛인 걸!  


하지만 비관의 끝에서 희망을 볼 때도 있다. 출산 예정일이 코 앞으로 다가왔을 즈음. 혼잡한 지하철을 탔다가 임산부 배려석까지 못 가고 중간에 서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앞에 앉아 있던 젊은 여성이 벌떡 일어나더니 내게 앉으라고 했다. 이제야 봐서 미안하다는 표정에 뭉클해 그만 포옹을 할 뻔했다. 고마워요, 자매님!

  


핑크를 부탁해

부산의 지하철에는 임산부가 소지한 비콘(무선 발신기)을 누르면 차량 내 수신기에 핑크빛 불이 켜지면서 자리 양보 안내가 나오는 '핑크 라이트'가 설치돼 있다. 임산부가 없는 상황에서는 비임산부도 앉을 수 있게 융통성을 발휘하면서, 임산부가 다른 승객의 눈치를 보지 않고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돕는 서비스다. 부산에서는 임산부와 일반 승객 모두의 만족도가 높아 전 노선으로 확대됐는데, 서울교통공사는 막대한 예산과 함께 일반 승객과의 갈등 때문에 도입이 어렵다는 입장이다. 시스템을 도입해도 사회 전반적으로 임산부를 배려하는 분위기가 부족하면 갈등만 더 키울 수도 있다고 말이다.


등장한 지 7년이 지났지만 임산부 배려석에 대한 만족도는 여전히 낮다. 임산부의 절반 이상은 대중교통에서 배려를 받지 못한다고 느끼고, 자리에 앉기 위해서는 아직도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상황이 이러한데, 미래의 주인공이 아닌 임산부를 위한 세상이 과연 올까?


아마도 그 세상에 핑크카펫은 없을 것이다.  

세상을 뒤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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