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태리부부 Jan 03. 2024

이탈리아 생활 10년 차가 되었다.

언제나 새해 다짐은 기록 그리고 언어와 건강 이 세 가지가 큰 카테고리를 차지했으나(돈은 디폴트값이니 빼놓기로 한다.) 늘 그렇듯 연말이 되어 돌이켜보면 단 한 번도 만족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나는 별수 없이 그저 그런 인간이지'를 수 년째 반복하고 있으나 연초의 다짐은  항상 결연하다. 누구보다 빨리 새해 다이어리를 구입하고, 빼곡히 월간 달력을 채우고, 아침 7시 이전에 알람도 없이 눈을 뜨고 가장 먼저 깨끗한 생수와 비타민 여섯 가지를 목구녕으로 털어 넣는다. 그리고는 이렇게 브런치 플랫폼을 열어 타닥타닥 글을 끄적여본다. 제발 올해는 작심 3일이 되지 않기를.  



2015년부터 시작된 이탈리아 생활이 올해로 10년 차를 맞이했다. 축하파티라도 하고 싶은데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10년째 '이탈리아어 잘하기'를 목표로 삼는 사람이 나라는 사실은 부끄럽기 그지없다. 낯선 사람들이 나에게 이탈리아에 산지 얼마나 되었냐고 물을 때마다 '1-2년쯤'이라고 얼버무려 대답하곤 하는데, 거짓말로 점철된 삶을 이제는 정말로 끝내고 싶다.


올해는 베네치아 카포스카리 대학에서 운영하는 이탈리아어 강좌에 등록을 했고(사실 금액이 부담스러워 오랫동안 고민했다.) 코로나 기간 동안 그만두었던 요가 수업에도 다시 참여해 볼 생각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을 마주하는 환경으로 나를 몰아넣을 참이다.  '한국인 남편과 한국말만 하며 살아서'는 10년 차 해외생활자에게 용납되지 않는 핑계이다. 나 스스로가 너무나 패배자처럼 느껴질 정도로.  




팔자!

그 어떤 점쟁이도 내 사주팔자에 '외국'이 보인다고 일러준 적은 없었다. 철저하게 우물 안에서 살아온 내가, 내 돈으로 비행기 한 번 타본 적도 없던 내가 이탈리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온전히 나의 의지이자, 처절한 몸부림의 결과물이다. 여행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나라이지만 잘 포장된 이미지와는 다르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배타적인 사회 분위기와 욕이 저절로 쏟아지는 공공 시스템, 의료체계 등은 한국인으로서 도저히 이해가 불가한 부분이 많았다. 미국 등 다른 국가에 비해 이민의 역사가 짧아 정착에 대한 유용한 정보가 부족했으며, 합법적 체류와 영주권 제도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조차 드물었다. 불과 코로나 이전까지만 해도 라면 한 봉지 구하기가 어려웠고, 내가 살고 있는 대도시 베네치아에 한식당을 찾기가 어려워 한식은 귀하게 여겼다. 인터넷이 된다뿐 아직도 아날로그에 익숙한 그야말로 불모지에서의 삶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삶을 놓고 싶지 않은 이유를 묻는다면, '말하지 않아도 끄덕여지는 모든 순간들'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아등바등 발버둥 치다 보니 보이고 들리는 것이 많아지면서 이 삶에 점점 스며들고 있다. 오히려 이제는 한국에 가면 내가 도리어 이방인이 된 느낌이 들 때가 많다. 한국에서 적응해서 살아갈 수 있겠냐 묻는다면 나는 솔직히 자신이 없다. 연장하고 쟁취하고 발버둥 쳐야만 얻을 수 있는 유효기한이 있는 외국인의 삶일지라도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을 놓고 살아갈 자신이 없다. 그중 '자유'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테다. 이곳에서는 '나'만 잘 살면 된다. 조금 더 확장하자면 내 가족구성원이 된 '나와 내 남편' 두 사람만 생각하고 챙기면 된다. 다른 사람은 신경 쓸 필요가 없고 다만 도의적 관계유지에만 신경을 쓰면 된다. 무슨 옷을 입든 차를 타든 몇 평의 집에 살든 상관없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차도 집도 자식도 없는 삶이 그럴 수도 있는 평범한 삶이 된다. 누구의 평가도 받지 않는다. 물론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삶이라 여겨질 수도 있으나, 그 정도 생각쯤은 하고 사는 나이가 되었으니 그러려니 믿어주면 좋겠다.


연말이 되면 언제나 낯선 감정이 드는데 올해는 정말이지 더할나위 없이 평온했다. 2023년의 마지막 날이, 2024년의 첫 번째 날이 그저 그런 평범한 하루와 같았다. 워라밸이,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중요한 이탈리아 사람들의 사고가 많이 바뀌었는지 올해는 연휴기간임에도 상점들이 모두 문을 열어 연말의 흥을 돋워주었다. 세상참 많이 변했다.

아참 이거 꼰대 멘트인가? 아니 10년쯤 되었으면 이런 말쯤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을 하면서 새해를 맞이했다.


10년을 거뜬히 흘려보냈으니 20년도 30년도 지금처럼 잘 살아낼 수 있을 것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