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세상을 위한 잔소리
나는 88년생 여자다. 한국 나이로 이제 34살에 접어든 나는, 한 남자의 와이프이기도 하고, 7년 차에 접어드는 직장인이기도 하다. 대기업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늘 퇴사라는 선택지를 만지작 거리던 내게, 정말 기회란 것이 나타났으니..!! 그것은 남편의 해외 취업 가능성이었다. 일생에 얼마 정도는 외국에서 살고 싶었던 우리 부부에게, 남편에게 주어진 기회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우리가 먼저 준비한 것도 아니었고, 말 그대로 신이 뚝! 떨어뜨린 선물 같은 것이었으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접하고 나서 좋기도 좋지만 그것보다 걱정이 더 많아진 것 같다. 우리 부부는 작년에 유산을 경험했다. (처음이자 마지막 크리스마스 참조) 자녀 계획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고, 올해 봄 정도에 몸이 나아지면 다시 시도해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회사는 관둘 예정이었으니까...라고 생각을 하려다가 갑자기 마음이 불안해졌다.
경력단절. 그 네 글자가 얼마나 무섭기에 이러는 걸까. 지금 신입 채용의 문도 그렇게 좁다던데, 경력으로 이렇게 오래 일해왔음에도, 1-2년을 아이를 케어하기 위해 써야 하고, 그 이후에는 이 넓디넓은 사회에 내가 이름 세 글자 내밀만한 자리가 없어질 수도 있다는 게 이렇게 큰 공포일 줄 몰랐다. 결국 지난번에도 비슷한 이유로 - 가임기이기 때문에, 아이를 낳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부서이동을 하지 못했던 기억이 오버랩되면서, 임신과 육아가 (지금 저렇게 해맑은 남편과 달리) 나에게는 엄청난 선택을 강요하는 부담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그렇게 살아. 엄마도 그랬어."
같은 직장에서 30년을 근무한 엄마는, 늘 미안하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다른 엄마들처럼 소풍에 자주 함께 하지 못해서, 하교했을 때 간식을 챙겨주지 못해서, 주말이나 쉬는 때 여행하지 못해서, 아이를 돌보느라 갑자기 연차를 쓰게 되어서, 미안하고 죄송하다는 말을 항상 달고 살았다. 주변에 아이를 낳고 복직한 여자 선배들이나 친구들을 보아도 비슷한 것 같다. 늦게 도착해서 어린이집에 사과하고, 일찍 퇴근해야 해서 상사한테 죄송하고, 그나마 아이를 위해서 퇴사를 감행한 친구들까지도 스스로에게 미안해하며 그렇게 30대와 40대를 보낸다.
다 잘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면 안 되는 걸까?
2020년 출산율 0.84. 아이를 낳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비난의 화살은 다시 여성에게 꽂힌다. 아이를 만드는 것도, 아이의 유전자도 반반이니, 책임도 반반이어야 할 텐데 어째서 여성들에게만 비난이 꽂히는 걸까. 아이를 낳지 않고 커리어를 중시하는 건 독한 사람이고, 아이를 낳으면 집에서 애나 봐야 하는 사람일 뿐, 그 양극단 가운데 어느 작은 자리도 워킹맘에게 주어지는 법이 없다. 결국은 다시 "아 그때 서울대가 아니라 서울교대에 지원해야 했어" 또는 "그때 사기업이 아니라 공기업에 가야 했어" 이렇게 여자들이 다니기 좋다는 직장에 갔어야 했다는 후회로 마음이 뒤덮인다. 이 곳에는 아이 낳고 바로 복직한 선배들과 아예 그만둔 선배들, 그 두 길 밖에 없다. 그리고 바로 복직하거나 아이를 포기한 여성이 진정한 커리어 우먼의 롤모델로 그려진다. 그 엄마는 본인의 아이에게는 대역죄인으로 살아가겠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에겐 동시에 두 개를 감당하는 슈퍼우먼이다.
그 방법이 과연 최선일까?
남편이 가려고 하는 국가는 덴마크다.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복지가 훌륭한 북유럽 3국 중 한 곳. 그래서 남편이 그곳에서 일하게 되면, 남자도 (복지국가니까 당연히) 육아휴직을 할 수 있을 거라 막연하게 생각했다. 먼 나라 타국 땅에서의 독박 육아만은 좀 벗어나 보고 싶어서. 그런데 웬 걸. 그 훌륭한 복지 국가 역시, 아이는 여성이 낳고 기르도록 디자인되어 있나 보다. 1년의 육아휴직을 제도와 문화, 재정적 측면에서 완전히 보장하지만, 실제 쓰는 건 여성이 90%다. 이로 인해 아이를 낳는 연령인 30대부터 남성과 여성 사이의 소득 차이가 나기 시작한다는 것은 우리나라와 똑같다. 그리고 엄마가 아이를 키우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외국인인 남편이 거기서 정착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손을 들고 1년 쉬겠다고 말하기도 어려울 형편이다.
공평과 공정은 효율과 발전을 보장한다
사람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아서, 어떤 왕조든 사회에서든 기득권이 발생하면 그것을 본인이 행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물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된다. 그렇게 신라시대의 골품제, 고려시대의 음서제 등이 생겨났다. 이에 맞서 과거제 등 (미천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실력만큼은 대단한 개천 용들이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를 만들어 주는 것은 그 사회의 안정성뿐 아니라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신은 공평하다."는 말처럼 재능은 그 사회에 흩뿌려지기 때문이다. 특정 신분 내에서만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하면 나머지 하위 신분들이 가지고 있는 재능과 아이디어는 발휘될 장이 없는 셈이니, 효율성 손실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할 수 있다. 인도의 천재 수학자, 세종대왕 시기의 장영실 등 역사의 수많은 위인들이 기회의 균등이 발전을 보증한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자, 그럼 이 이야기를 성별에 빗대어보자. 재능은 성별을 가리지 않는다. 오랜 시간 동안 사회가 돌봄 노동의 영역에 여성들을 가둬버리고 "바깥"일은 남성의 영역에 한정 지음으로서, 집안일을 잘하는 남성과 기획력이 뛰어난 여성 모두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상실했다. 이는 사회 전체적으로 봐도 효율성 상실의 영역이다.
그런데 왜 아직도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남성, 그것도 중년 남성이기 때문이다. 중년 남성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중년 남성이 가정을 이루고 자라오던 시기에는 당연하게도 그들의 어머니와 아내가 집안을 돌보았고 여성의 대학 진학률이나 사회참여율이 이만큼 성장하기 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여성들이 다른 역할을 가지는 모습을 보지 못했던 까닭이다. 그런 역할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될 거라는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미래를 위해 지금 당장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내려놓으라고 하는 것은, 폭력에 가깝게 느껴질 수 있다.
결국, 모든 것은 “경험”으로 귀결된다. 육아를 하더라도 (사회와 제도의 도움을 받아) 엄마와 아빠 모두가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동료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면, 육아 휴직이나 돌봄의 사회화에 관대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과 가정이 양립되는 것을 보았고, 동료로서 또한 부모로서 그들의 수고에 응원을 더하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의 제도에서는, 그러한 장면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그 대신에 지금의 제도는 시간과 체력이라는 한정된 자원을 가진 부모에게, 특히 엄마에게 어느 하나는 포기하라고 강요한다.
결국은 제도의 변화다
결국 그 경험을 만들기 위한, 이상적 방향으로 가기 위한 제도를 구축하는 것이 선결 과제라고 할 수 있겠다. 육아휴직을 엄마 아빠 모두가 동일하게 하고, 그에 대한 대체인력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마련되어 있을 때, 복직해 일을 하는 동안 아이를 돌봐줄 시스템이 사회적으로 준비되어 있을 때, 부모는 돌봄을 위한 희생을 강요당하거나 “민폐”를 끼치지 않고 육아에도 일에도 충실할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포드가 처음으로 주 5일제를 꺼내 들었을 때, 모두가 시기상조다 혹은 임금 삭감의 기조다, 혹은 회사가 망할 것이다 등등 우려를 표현했다. 그러나 올바른 방향으로의 제도의 변화는, 금세 문화의 변화를 이끌었고, 포드가 예상했던 것처럼 생산성 향상과 소비 증가로 이어졌다.
돌봄 노동의 사회화, 육아휴직의 공평한 보장, 일과 가정의 양립. 그게 바람직한 방향인 줄 알면서도, 다들 비용의 문제를 고민하고, (제도가 먼저 바뀌더라도) 문화가 바뀌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제도의 변화가 문화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 주 5일제가 그랬고, 지금의 재택근무가 그렇게 될 것이다. 문화 자체가 변화하길 기대하려면, 한 세대를 버텨내야 할 텐데, 그때는 이미 한국은 젊은이들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가 될 가능성이 크다. 조금 더 과감하고 한 발 앞선 제도 개혁이 절실한 때이다.
결국, 남편의 덴마크 발령은 백지화되었고, 우리 부부는 한국 땅에서의 출산과 육아를 다시 준비하고 있다. 우리가 그 첫 번째 수혜자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조속한 시기에 제도의 변화가 일어나, 슈퍼맘이 아닌 그냥 우리네 엄빠들이 즐겁고 평안하게 일에도 육아에도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길, 이를 통해 우리 사회에 지속되던 dead weight loss 가 해결되길 진심으로 바라본다.
참고로, 아래 링크는, 세계적인 사회학자 제레미 다이아몬드 (총, 균, 쇠의 저자)가 한국사회가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이슈로 여성 노동에 대한 인정을 꼽은 내용이다. 이 글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어 공유한다.
다음으로, 또 아래 링크는 제도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부부에 관한 이야기이다. 임신 중 육아휴직 사용 법안 등 관련 법안 처리 현황 (4년째 지지부진)과, 그 외 제도 변화를 가로막는 국회의 비효율적 관행에 대한 시리즈이니 관심 있는 분들은 읽어보길 바란다.
https://brunch.co.kr/@yechanahn/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