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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교진 Feb 16. 2024

아무도 가지 않은 길, 푸르메재단 백경학 대표

아내의 다리를 잃고 수많은 장애인의 다리가 돼 준 20년

푸르메재단 백경학 대표 / 사진 copyright 이준호 작가


1998년 여름이었다. 연세대학교 사학과(83학번)를 졸업하고 CBS에서 일하던 백경학 기자는 독일 뮌헨대 정치연구소에서 2년간 방문연구원으로 통일문제를 연구하고 귀국을 앞두었다. 당시 서울시 5급 공무원으로 일하다 독일 연수에 동행한 아내와 추억의 시간을 갖고자 귀국 직전 영국으로 자동차 여행을 떠났다. 여행을 마치면 뮌헨에서 짐을 챙겨 귀국할 일정만 남았다. 스코틀랜드의 시야가 툭 터진 오르막길에서 자동차 트렁크의 물건을 꺼내기 위해 비상등을 켠 채 차를 세웠다. 


그 한순간에 일생일대의 불행이 찾아왔다. 두통약을 먹고 정신이 오락가락한 가해자 차량의 추돌로 굉음과 함께 차 뒤편에 서 있던 아내와 함께 정신을 잃은 것이다. 아내는 다리를 절단하는 대수술을 받으며 생사의 기로에 섰고 백 기자 또한 크게 다쳤다. 그는 큰 골절 없이 회복됐지만, 아내는 100일이나 의식 불명 상태로 큰 수술을 세 차례나 받았다. 아내를 잃는 줄 알았던 백 기자는 위기를 넘기는 기적을 경험했고, 독일로 건너와 1년 반 동안 재활치료를 받은 뒤 귀국했다. 어린 딸은 엄마의 다리가 다시 자라나기를 기도했다. 그 기도 응답으로 아내의 다리가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장애인의 다리가 되어준 푸르메재단이 설립됐다.  

   

재활병원을 설립하기로 결심하다

2023년 11월 27일, 백경학 이사는 푸르메재단의 상임이사에서 대표이사로 선임됐다. 2005년부터 푸르메재단을 설립해 실무를 이끌었지만, 대표는 연륜이 있고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명사에게 부탁해 오다 이제 직접 책임이 큰 대표직을 맡았다. 그리고 12월 6일, 한국의 100여 곳 비영리기관 활동가들이 심사하는, 2023 아시아 필란트로피 어워드(Asia Philanthropy Awards)에서 올해의 필란트로피스트상을 수상했다. NGO 활동에 기여한 숨은 영웅을 찾자는 취지로 민간 영역에서 만든 상이라 더욱 의미 있고 영광스러운 상이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해 온 푸르메재단의 진정성이 크게 인정받았다.  

   

사고 후 3년 반 만에 귀국한 백 대표 부부는 한국의 재활치료 시스템이 얼마나 열악한지 뼈저리게 경험했다. 독일의 훌륭한 사회제도와 의료시스템을 경험한 뒤 귀국하지 않고 그곳에 정착해서 살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지만, 백 대표는 고국을 떠나서 산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않았다. 남의 불행에 대한 기사를 쓰다가 장애인에게 열악한 현실에 충격을 받은 후 사회 약자의 고통을 해결하는 데 투신하기로 했다. 직접 장애인 재활병원을 설립하기로 한 것이다. 끔찍한 사고에도 씩씩하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이겨온 아내가 힘을 실어주었다. 2005년 푸르메재단 설립에, 아내는 사고 후 영국의 가해자와 보험사 측과 10년의 지난한 소송 끝에 받은 보상금 10억 원을 기부했다. 아내의 헌신은 푸르메재단 설립 자금과 여러 기부자의 마음을 얻는 데 마중물 역할을 했다.     


푸르메재단 백경학 대표 / 사진 copyright 이준호 작가


절박해야만 할 수 있는 일

교통사고로 인한 부상은 완치가 없다. 절단 환자는 절단한 곳에 주기적으로 심한 통증이 오고 그 환상통은 시간이 흐르면서 강도와 빈도가 높아진다. 

“예전에 2시간 정도 겪던 통증이 요즘은 2박 3일간 지속됩니다. 아내는 환상통을 견디기 위해 열심히 의족을 차고 걷는 운동을 해요. 독서가 도움이 되니까 일주일에 두세 권의 책을 읽죠. 박사 학위 논문을 쓰라고 권유했더니 박사와 다름없다고 하더군요.”


백 대표의 온화한 얼굴과 미소는 거룩한 성직자의 모습과 닮았다. 20년 가까이 장애인만을 생각하며 한길을 걸어온 인생이 얼굴과 목소리에 녹아 있다. 푸르메재단의 일은 절박해야만 할 수 있다. 백 대표는 사회적 기능, 신체적 기능이 약한 사람이 차별받지 않고 살 수 있는 재활과 자활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했다. 사고로 잃은 몸 기능의 회복과 평생 살아갈 기반을 만드는 데 눈뜨며, 장애인 치과와 재활병원 설립, 장애인 청년 일자리 문제 해결까지 지난 19년간 하나둘 필요에 따라 사업을 추진해 왔다.

“1998년 영국에서 사고 당시 우리 부부는 서른여섯, 서른넷이었어요. 영국의 병원은 시설이나 시스템이 독일보다는 못했지만, 더없이 환자를 이해하며 친절했죠. 뮌헨에서는 의료진이 딱딱했지만, 철저히 환자 중심이었고 쾌적했어요. 환자에게 필요한 것을 잘 충족시켜 줬고 퇴원해서 가족의 도움 없이 스스로 살아갈 방법까지 훈련시켰어요.” 


그런 경험을 한 백 대표 부부는 귀국한 지 사흘 뒤 국내 재활병원은 병실이 없어 2~3개월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높은 국민소득에 경제 대국에 올라온 한국에서 젊은 장애인 가족은 유령처럼 병원을 떠돌아야 했다. 여기저기 쫓아다닌 끝에 아내는 2주 만에 입원했고 그마저도 난민 수용소와 다르지 않은 병실 환경을 겪어야 했다. 독일과 달리 산책할 곳이 없고 좁은 병실은 간병인과 방문객으로 넘쳐났지만 입원했으니 행복한 축에 속했다. 


어린이 재활은 더 열악했다. 부모를 잘 만난 아이들은 외국에서 치료받고, 이민을 결정한다. 중산층 이하는 성인들 틈에서 치료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백 대표는 현장의 소리를 먼저 듣기 시작했다. 성인 재활병원을 생각했다가 한 중증 장애인이 이가 아파도 치과에서 받아주지 않는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실제로 그런가 하여, 새문안로에서 종로까지 치과를 찾아가 봤다. 34개의 치과를 방문했는데 장애인을 치료하겠다는 치과가 없었다. 일단 입구 자체가 계단이어서 출입이 어려웠다. 치과마다 장애인 치료는 힘들고 의료사고 가능성이 높으며, 치료 시간이 오래 걸려 대기 환자의 불만이 높다고 했다. 게다가 치료비를 내지 못하는 분이 많다는 이유로 치료가 거절되는 상황이었다. 백 대표는 장애인 치과부터 시작했다. 그래서 2007년 민간 최초 장애인 전문 푸르메치과 개원으로 푸르메재단의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재단법인 설립 위해 동아일보에 사표를 내다

재단을 설립하려면 자본금이 있어야 한다. 백 대표에게 재산은 집 한 채가 전부였다. 기자로 일하면서 재단 설립 자금을 마련할 방법이 없었다. 주변에서 만류했지만, 과감히 동아일보 기자직을 내려놓고 사업을 시작했다.


백 대표가 창업한 회사는 국내 최초로 하우스맥주를 생산하는 ‘옥터버훼스트’다.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허가를 받아 독일에서 친하게 지낸 맥주양조학 유학생 방호권과 CBS 경제부 기자 이원식과 의기투합했다. 59명의 엔젤투자자로부터 28억 자본금을 만들어, 사표를 낸 지 8개월 만에 강남역에 옥토버훼스트 1호점을 열었고, 이어서 종로에 2호점을 내고 신촌과 마포까지 뻗어갔다. 마흔 살이 되기 전에 시작한 모험은 그렇게 결실을 이뤘고 아내가 받은 우선피해보상금과 옥토버훼스트 지분 등으로 푸르메재단 설립의 토대를 마련했다. 

백 대표는 사회적으로 선망이 높은 분들을 찾아가 이사회를 만들었다. 김성수 성공회대 총장을 비롯해 강지원 변호사, 원택 스님, 김용해 신부, 박원순 변호사 등 여러 인사가 이사직을 수락했다.

“2004년 8월 17일 한국프레스센터 19층에서 푸르메재단 창립발기인대회를 열었었어요. 김성수 총장님은 ‘재활전문병원 건립할 때까지 작은 물방울이 모여 강물을 이루듯 뚜벅뚜벅 걸어가자’고 당부했고, 아내는 그날 밤 감격의 눈물을 흘렸어요. 자신의 다리가 수많은 다리로 재생할 것을 믿었습니다.”


푸르메재단 백경학 대표 / 사진 copyright 이준호 작가


한국에 많은 장애인 도움 단체가 있다. 푸르메재단은 장애인에게 꼭 필요한 여러 방면을 개척하며 한길을 걸어왔다. 2007년 장애인 치과와 한의원 치료를 시작으로, 2011년 과천시장애인복지관 개관, 2012년 세종마을 푸르메센터 개관, 종로장애인복지관과 종로아이존 개원, 2016년 시민 1만 명의 나눔으로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 개원, 2018년 시립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 수탁 등 한결같은 의지로 장애인 가족의 고충을 해결해 왔다. 2022년에는 여주에 발달장애 청년들의 일터인 푸르메소셜팜을 세워 일자리를 창출했다. 장애인 청년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스스로 식물을 키우고 보살피는 일이란 데서 착안했다. 푸르메재단의 이러한 발걸음은 장애인에게 가장 진심인 곳으로 이름나게 했다.    

  

사람만이 희망이다

효자동 푸르메재단 사무실에는 여러 유명 인사의 모습이 액자에 걸려 있다. 푸르메재단을 물심양면 도운 분이다. 백 대표는 수많은 분 중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몇 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철재 사장은 미국 유학 시절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의 고난을 겪은 분이에요. 천신만고 끝에 졸업 후 벤처사업가로 성공해 넥슨과 인연을 맺었는데 우리가 짓는 어린이재활의원에 10억 원을 기부해 주셨죠. 이 소식을 접한 김정주 넥슨 대표가 우리를 찾아왔어요. 우리나라에 어린이재활전문병원이 없다는 말에 놀란 김 대표는 그 자리에서 10억 원을 기부해 주셨어요. 넥슨 임직원들도 자원봉사로 참여했고 푸르메어린이재활의원을 세울 수 있었죠. 그 후 어린이 100명이 입원하고 하루 500명이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 설립의 꿈을 나눴어요. 2016년 상암동에 문을 연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은 2년 동안 김정주 대표와 시민 1만 명, 500개 기업의 정성으로 세워졌어요.”

고(故) 김정주 넥슨 대표는 푸르메어린이재활병원을 짓는 데 어느 대기업도 하지 못한 200억이라는 통 큰 기부를 했다.


“파독 간호사 출신 장애인 김주기 선생님은 2007년 장애인 치과 치료를 받으러 오신 분이에요. 독일에서 간호사로 일하며 월급을 전액 집으로 송금하며 희생적으로 사셨죠. 귀국한 이듬해인 1979년 사고로 뇌를 다쳐 전신마비를 겪은 뒤 3급 지체장애인으로 사신 분이에요. 우리 재단을 통해 임플란트 수술을 받은 뒤 매달 정기기부를 약정하셨어요. 기초생활수급자로 월 40만 원을 받고 사시는 분이어서 받을 수 없다고 했지만 자신에게 치아를 만들어줘 음식을 먹고 사람들을 만나게 됐다며 가난한 중임에도 기꺼이 기부하셨어요.” 


“작년에 장애인 일터인 농장을 짓는 데 땅을 기부한 분이 이상훈, 장춘순 부부예요. 발달장애 청년을 키우는 부모였죠. 그 부부가 여주시 오학동 4천 평 농장 부지를 기증하셨어요. 대기업을 운영하는 분이 아님에도 자신이 평생 소유한 땅을 푸르메재단에 내어주셨죠. 아들 이름이 덕희인데 덕희와 같은 친구들 55명이 지금 그 농장에서 일하고 있어요. 한 사람의 결단으로 55명이 평생직장을 갖게 됐습니다.”


부자여서 기부하는 것이 아니라 어렵고 힘들어도 마음이 부자인 사람이 기부한다. 넉넉하지 않아도 나눌 수 있는 마음이 있으면 나눈다. 백 대표는 우리 사회에 그런 분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경제 상황이 어려우면 후원을 중단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나눌 마음이 있는 사람은 어려울 때 오히려 증액한다고.


효자동 푸르메 사무실 출입문 옆 후원자 이름이 새겨진 현판 앞 / 사진 copyright 이준호 작가


무슨 가치로 살 것인가

현재 푸르메재단이 중점적으로 추진하는 사업은 수도권 교통이 편리한 곳에 장애인의 희망 일터인 농장을 짓는 것이다. 
 “여주 푸르메소셜팜은 크기도 크고 유리 온실에 태양광으로 온습도 조절 자동화 시스템으로 돼 있어요. 하루 550킬로그램의 방울토마토를 생산해 전량 SK하이닉스에 납품합니다. 좋은 가격으로 팔고 있죠. 현재 55명의 청년이 하루 네 시간을 일하고 4대 보험에 125만 원 수입을 얻고 있죠. 올해는 도심형 농장을 지어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할 수 있는 곳에 일터를 만들고자 합니다.”

푸르메재단은 장애 어린이가 진료받는 병원에서 청년들이 일할 수 있는 농장까지 장애인이 행복한 나라를 만드는 데 전력하고 있다. 푸르메재단과 같은 비영리재단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후배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바를 질문했다.


“쉽지 않은 길이고 힘든 길이지만 가볼 만한 길이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직장이 꽃길은 아니죠. 가시밭길을 걷다가 진흙을 만나고 그러다 좋은 길도 만납니다. 어려운 기억은 금세 잊을 수 있고, 기쁘고 행복한 작은 기억은 열 가지 가혹한 길을 이기죠. 한눈팔지 않고 걷다 보면 내가 갈 길이 보일 거예요. 20년을 하면 전문가가 되고 30년을 하면 그 분야에서 우뚝 설 수 있어요.”

백 대표가 바라는 한국 사회는 ‘남을 배려하는 성숙한 사회, 장애인, 노인, 다문화인이 행복한 사회’다. 사회 약자가 행복한 사회이면 모두가 행복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_글 황교진 / 연세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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