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세대, 무기력함, 괜찮아 그리고 힘내
이제는 한물 간 신조어 취급을 받을지 모르겟다. 필요한 만큼을 넘는 대상물을 지칭하는 ‘잉여’라는 단어가 ‘인간’과 조합되면서 사회를 구성하는데 필수적이지 않은 사람을 의미하는 단어로 쓰이게 되었다. 사실 인간으로서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작든 크든 사회와 영향을 주고 받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잉여’ 라는 단어는 그 지칭하는 대상의 존재에 대해 문제를 제기함으로서 그 사람이 인간으로서 사회와 상호작용 하는 것에 대한 의의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그 대상을 비하하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 너, 대학 못가면 뭔 줄 알아? 잉여인간이야!! 잉여인간!! 잉여인간알아? 인간떨거지 되는거야! 이 새끼야! 너 이렇게 속썩일려면 나가! 나가 뒤져! 이 새끼야!!"
- ‘말죽거리 잔혹사’ 대사 중
기실 ‘잉여인간’ 이라는 이야기의 근원을 따라가 보면 사회와의 상호작용에 대한 효용성을 이유로 존재이유를 부정하는 것 과는 다른 이야기를 들어 볼 수 있을 지 모르겟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 2세대인 현재의 기성세대가 70~80년대 급속한 경제부흥기를 거치면서 ‘나는 비록 이렇게 살았지만 내 자식만큼은 공부 열심히 가르쳐서 대학보내 대기업에 취직을 한다’라는 틀에 자녀 세대의 가치관을 끼워 맞추기 시작한다. 이는 현재 2~30대에 해당하는 자녀세대 모두가 추구해야 하는 목표를 동일하게 만들었고, 세상에 존재하기 위한 이유를 증명하는 방법을 상호 경젱에 따른 결과만으로 증명해야 하는 상황으로 발전되었다. 이렇게 타의에 의해 경쟁상황에 놓여 학업/취업에 비교우위를 증명해야 하는 상황은 매 순간 긴장상태를 요구한다. 이러한 스트레스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 기성세대가 규정한 방법이 아닌 본인만의 방법으로 존재 이유를 증명할 방법을 찾게된다. 그렇게 찾은 방법의 대부분은 기성세대가 구성 해 놓은 세계외 또 다른 규칙으로 움직이는데, 이는 기존의 경쟁지향적 사회시스템이 추구하는 바와 차이가 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기존 경쟁지향 시스템에서 요구하는 바와 차이가 난다는 것이 문제는 아니다. 다만 이 차이를 바라보는 방법에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서로 일치하지 않는 개념 사이에서 상호 존재를 인정하고자 할 경우 서로에 대한 소통의 규칙을 생성하는 ‘이해’라는 과정을 요구하게 된다. 그런데 이 ‘이해’라는 것은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서로의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관찰-구분-협상-합의 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 먼저 자기자신을 관찰하고 상대를 관찰해서 서로가 가진 이해를 요하는 대상에 대한 속성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다음으로 이해 대상에 대해 가치가 상출하는 부분을 구분하여 이해가 상출하는 부분에 대한 가치협상의 과정을 거친다. 이 협상과정에서는 이해가 상충하는 각 항목에 대해 거래/권유/수용/보류(무시) 등을 수행 할 수 있고, 이런 협상의 결과를 서로 확인하고 상호간 소통의 방법 및 항목들에 대해 규정하여 향후 소통시 활용할 규칙을 만들게 된다. 하지만 사회적 기득권이라는 이름의 자신의 이해를 관철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닌 입장에서는 굳이 에너지를 소모 해 가면서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모두 수행할 필요를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자신이 규정한 정의를 강요하고, 이 정의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평가하기만 하면되는 간편한 방법도 있으니 말이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자신이 정의하는 바와 다른 가치에 대해서는 ‘쓸모없음’이라 규정하고 평가를 내릴 수 있으며, 잉여 또는 잉여인간 이라는 의미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해석되고 있다는 점이 문제라고 볼 수 있겟다.
잉여란 무엇이며 어떠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가.
인간활동으로서의 잉여에 대한 의미는 생물학적으로 생존하기 위한 직접적인 행위를 제외한 대부분의 인간활동이 잉여활동에 해당 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잉여활동은 문학/음악/미술/종교 등과 같은 활동에서부터 생물학적 요구량 이상의 휴식, 취식등과 같은 행위까지 현대의 인간활동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잉여활동은 해당 사회의 인구의 생존을 위한 필요량 이상으로 식량생산이 이루어지게 되면서 활발하게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이런 일련의 활동양식 또는 활동에 대한 결과물들을 일컬어 우리는 ‘문화’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이러한 문화 활동은 다른 사회 또는 다른 구성원과 스스로를 구분할 수 있는 기준으로서 작용하여 해당 사회 및 개인의 유일성(identity)에 대한 지향점을 제공하기도 한다. 이는 단지 생물체의 분류로서의 사람이라는 범주를 넘어 사회 구성원인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정의 할 수 있고, 이 유일성의 확립으로 우리는 서로를 인지하고 이해하며 사회를 구성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자, 이제 잉여로운 활동은 인간사회의 상호식별을 위한 산출물을 생산해내는 생산적인 활동이라는 의미로 해석 할 수 있다는 의견을 보았다. 하지만 우리가, 아니 내가 하고 있는 이 잉여잉여로운 짓거리(?)에까지 이렇게 거창한 의미 부여를 하자니 좀체 양심에 찔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내가 하고있는 잉여로운 짓거리는 남들 다 일하고 있을 낮시간에 방구석에서 늘어져 있다가 해가 중천에 뜰 때쯤 눈 부비고 일어나 라면하나먹고 PC를 켜고 밤 늦게까지 온라인게임을 하다가 맥주캔 한두개 먹고 알딸딸한 기운에 잠을 청하는 수준의 것이 아니던가. 과연 이러한 짓거리에까지 잉여로움의 미학적 의미를 당당하게 부여 할 수 있는 것인가 라고 스스로 물어보자면 쉽사리 대답이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조심스럽게 의미를 부여 해 본다. 아무리 생각해도 쓸모없어 보이는 이 행위는 현실을 사는 우리에게 자기파괴의 일환으로 생각 할 수 있지 않느냐고. 인류학에 있어서 우리는 축제문화의 원형을 생각 할 수 있고, 축제 문화의 원형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것 중 하나인 재탄생을 위한 파괴행위로서 잉여로운 행위를 해석할 수 있지 않겟느냐고. 물론 파괴행위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앞서 말한 기성세대의 사회활동에 대한 해석만이 생산적인 행위이며 그 외의 잉여로운 행위는 순방향으로서의 행위가 아니라고 자백하는 것과 같이 보일 수도 있겟다. 하지만 잉여로운 활동의 공통적인 속성이 생물학적 생존을 위한 행위가 아닌 것을 지칭한다고 정의한다면 잉여로운 행위 자체가 자기파괴 행위의 일환으로 해석 될 여지가 충분히 있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는 이 잉여로운 행위를 통해 천편일률화된 경쟁규칙 속에서의 자신을 파괴하고, 기성사회와의 이해활동의 불공정한 관계에서 벗어나 잉여행위를 통한 자신의 유일성을 찾는 과정 어디엔가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닐까. 그 과정에서 기존의 룰이 지향하는 모습과 자신사이에서 타협점을 찾기도 하고, 기성사회의 역할 요구와 자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구분과정을 거쳐 가면서 나를 보고 세상을 바라보는 과정중 하나가 아닐까.
물론 어느 방향으로 해석을 할 지라도 생존을 위해서는 기성사회의 규칙을 상당부분 고려해야 하는것이 당연하다고 본다. 하지만 현 세대가 자신을 찾기 위해 방황하고 있음을 보고, 조언을 가장한 비난이나 팩트폭행이 아닌 힘내라는 위로의 말은 어떠한가. 그도 아니라면 적어도 우리 서로에게 잉여인간이라는 꼬리표를 붙여 사회밖의 존재라 선을 긋지 말았으면 좋겠다.
※ 그림은 여기에서 가져왓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