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11번 출구
비행기가 폭파하는데 내가 나서서 사람들을 구하고 장렬히 죽어간다던지 그런데 그 사람들 중에 이미 결혼한 첫사랑이 있었다던지 하지만 괜히 못 본척하면서 그를 지킨다던지 그런 종류의 쓸데없는 꿈을 꾸고 일어나서 사람들이 기다란 전봇대처럼 서 있는 열차에 올라 모든 유행의 시작이라는 그곳에 간다.
여기저기 번쩍대는 상점들이 늘어서 있지만 그 어디도 딱히 마음 둘 곳이 없는 이 도시에서 배회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쓸모 있다고 느끼고 있을까 목적이 있을까 계획이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까 오늘 왜 여기 있을까 지금 이 시각 나와 같이 강남을 배회하는 이들은 직업이 있을까 없을까 나는 어떻게 보일까 사회인이 되면 어디서든 자신 있게 턱을 들고 당당히 걸을 수 있을까.
다들 자기 자리를 찾아가고 나만 아직 서성거리고 있다고 느껴질 때, 내가 원하고 바랐던 작은 꿈들은 한없이 무거운 짐이 되어 내 허리에 박히고 나는 차마 이를 빼내지도 못한 채 굽은 모습 그대로 어그적 어그적 다른 이의 발자취를 쫒아 피를 흘리며 따라간다.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데 내가 몇 년 동안 꾸역꾸역 책상 앞에 붙어 얻어낸 졸업장 한 장을 그냥 버리는 것이 아까워 새로이 시도조차 못해보고 그렇다고 그 한 장은 딱히 쓸모가 없고 그래도 뭐라도 해보려 안간힘을 쓴다.
시선을 신경 쓰지 말라고? 진짜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주위 사람을 의식하지 말라고? 그건 확실한 꿈과 계획과 재능과 여력이 있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 단순히 '하고 싶어서', '재밌을 것 같아서'를 이유로 들지 못할 만큼 철이 든 나이의 아이들은 수없이 발자국 나있는 그 길로 걸을 수밖에.
강남역 11번 출구. 커다랗고 빨간 간판의 햄버거 집이 있는 곳. 중학교 때 피클을 안 먹는 친구와 한참을 앉아 킬킬대던 곳. 저기 앉아있는 우리는 아직 어린아이. 지금 앉아있는 우리도 똑같은 어른 아이. 회색 양복을 입은 사람들 틈에 끼기 위해 못 먹는 피클을 열심히 먹는 척하는 너와 그걸 또 열심히 응원하고 있는 나. 얘야, 어른들 말씀 하나 틀린 것 없단다. 노력, 노력, 노력을 하자꾸나. 노력이 뭐지? 너와 내가 하고 있는 것은 노력이 아닌가? 우리 둘 다 두 눈 감고 곰곰이 생각해보자.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아 노래를 멈추지는 마렴. 내 자신아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회색빛 세상에 그렇다고 또 너무 비관하지는 않을 것은, 십 년 전 너는 지금의 너의 모습을 상상이나 했니, 한 때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훌쩍대던 너 자신이 조금은 강해졌지 않니, 너의 작은 공간에서 소소한 기쁨을 간직해오지 않았니. 사회에 나오면 나약한 너는 이 세상을 견디지 못하고 엉엉 울 것이라던 선생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았니. 친구야, 너도 마찬가지야 포기하지 않으면 좋은 날이 올 것이라 말하지 않을게 우리 손 잡고만 가자. 너희와 함께 있는 나는 초라하지 않아. 항상 너의 등 진실되게 두드려줄게, 그러니 손 놓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