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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 중심 치료 ABT
By 김덕성 . Apr 20. 2017

앎이 곧 사랑인 이유

어릴 적에 화를 많이 내는 부모에게 많이 혼나며 자라서 아팠던 사람이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그 사람이 어릴 때 "나는 커서 절대 저런 식으로 화를 내며 누군가를 혼내고 상처주지 않을거야" 라고 결심했다면, 역설적이게도 그 결심으로 인해 이 사람의 삶에서는 '혼냄과 화'의 경험이 반복되게 됩니다. 왜일까요? 


일차적으로는 이 사람은 앞으로 '혼내는 자를 혼내게 되고, 화내는 자에게 화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1. 절대로 남을 혼내지 않기 위해 애쓰는 동안에 이 사람은, '남을 혼내면 안돼'라는 위압적인 목소리로 정확하게 자신을 혼내고, 만일 어길 경우 자신에게 화를 내게 됩니다. 자신이 그토록 싫어했던 가해자의 모습으로 살게 되는 것인 동시에, 혼나는 피해자로서의 삶 또한 정확히 재현되는 셈입니다. (내사 introjection)


2. 누군가 타인에게 화내며 혼내는 모습을 보게 되었을 때 이 사람은, '그렇게 화내면서 남을 혼내면 안돼'라는 목소리로 그 사람에게 화내며 그 사람을 혼내게 됩니다. 속으로만 그렇게 하든, 직접 표현하든 말이지요. 이 또한 자신의 결심에 반하는 결과가 되지요. (투사 projection)


어느 경우든 화냄과 혼냄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일 따름인데요. 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이는.. 그가 자신의 본래 소망이 무엇이었는지를 잊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화를 내고 혼을 낸다는 것. 이토록 아픈 이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모르겠다는 것. 정말로 정확히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다는 것. 이것이 바로 화를 내며 혼내는 부모 앞에서 이 아이가 품었던 진정한 소망이었습니다. 


'나는 결코 저런 모습으로 살지 않을 거야'라는 결심으로 벽을 세움으로써 부모의 그 모습과 자신을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이 사람이 보이는 저 모습을 이해하고 싶어', '저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나도 알고 싶어'라며 적극적으로 손 내밀어 다가가는 것. 그것이 그 아이가 내린 본래의 결정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아이는 자라나며 자신이 직접 혼내는 자가 되고 화내는 자가 되어 봄으로써, 자신에게 소중했던 타자(이 경우에는 부모)의 상태가 어떤 상태였는지를, 그의 삶이 어떤 삶이었는지를 직접 살아봄으로써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화를 내며 혼냈던 그 사람은, 누군가에게 그와 같이 혼났던 이로구나. 또한 그는 늘 자기 자신을 혼내며, 항상 그렇게 혼남을 당하고 있는 이였구나.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 혼내며 상처주는 이의 삶은 이처럼 힘들고 슬픈 것이었구나. 무섭고 쫄고 위축되고 슬프고 아픈 마음이 소외되었을 때, 이렇게 화내게 되고 혼내게 되는 것이었구나. 바로 내가 그러했듯이.


화내고 혼내며 반복되는 이 역사를 끝내기 위해서는, 화내고 혼내는 감정과 행위를 억누르거나 금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존재하는 아픔과 상처를 표현하도록 하고 손길을 내밀 수 있어야 하는 것이로구나. 그 마음의 편이 되어줄 누군가를 요청하고, 그 요청이 응답받는 현실을 창조해야 하는 것이었구나. 필요한 일이란 그런 것이었구나. 




그러니 나부터가 내 아픔과 슬픔을 화로 바꾸어 타인과 세상을 심판하는 대신, 떨리는 목소리로 내 아픔과 슬픔을 그대로 표현해 상대와 연결되기 위해 움직여가야겠구나. 그 움직임을 보고 상대 또한 심판하는 대신에 자신을 표현하고 고백하며 상대와 연결되는 '대화라는 것이 가능한 현실'을 목격하고 기쁘게 깨어날 수 있겠구나. 


부모에게 혼나서 아팠던 아이는, 바로 이러한 앎을 얻기 위해 화내고 혼내는 삶을 이어받았던 것이었습니다. 혼나고 화나는 마음은 당연히 한 가지 예제일뿐, 우리가 서로에게 영향받고 공유하며 함께 힘들어해온 모든 종류의 마음의 경험들이 모두 이와 같은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앎을 얻기 위한 것이었고, 앎으로 인해 그 마음들은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됩니다. 함께 자유로워지기 위해 알고자 움직인 그 삶은 참으로 정직한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참으로 잘 알고, 함께 자유로워지기 위해 이 사람은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쳤으니 말입니다. 대를 타고 이어져 내려오는 이러한 마음의 반복을 옛 말에서 부르듯 카르마라고 부른다면, 이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카르마를 이루는 구성 성분은 다름아닌 순도 100%의 사랑이었다는 것을 말이지요.


가령.. 지옥의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직접 지옥으로 걸어내려간 지장보살의 모습은, 이와 같은 인간의 꾸밈없는 본래 성품을 표현하는 하나의 은유일 것입니다. 지옥에서 직접 그들의 삶을 함께 삶으로써 지옥에 있는 이들의 마음을 알고 함께 해탈하려는(자유로워지려는) 지장보살의 모습은, 특수하고 위대한 엘리트들만이 도달할 수 있는 고결한 경지가 아니라, 이미 모든 인간들이 살아내고 있는 삶의 모습 그대로인 셈입니다. 자신이 왜 그토록 싫어했던 이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는지, 왜 같은 마음을 반복하고 있는지를 기억해내기만 한다면 말이지요.


그러므로 다음의 두 문장은 정확히 동의어입니다. 그리고 두 문장의 배후엔 공히 사랑이 숨쉬고 있습니다.


"나는 절대 저렇게 하지 않을 거야" = "나는 저것을 정말로 정확히 알고 싶어" 


정말로 알게 되었을 때라야 정말로 그것을 끝낼 수 있습니다. ABT에서는 정말로 알게 되는 그 순간을 Awakening이라 부르며, 우리가 함께 깨어나는 그 순간에는 늘 거기에 있던 사랑이 드러나 비로소 우리의 가슴을 적셔줍니다. 바로 그 사랑으로 우리는 삽니다.


항상 애씀없는 행복이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Alchemic Lingu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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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학의 관점에서 우리의 삶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마음과 시선 공동대표 / 모든마음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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