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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오라기 Nov 13. 2020

스파이더맨과 냉장고 속의 여자

눈치라도 보자


 그동안 스파이더맨 게임이 꽤 많이 나왔더랬다. 인기투표를 하면 항상 상위권을 차지하는 영웅 답다. 그 중 지난 2018년에 출시된 플레이스테이션 4 독점 타이틀 '스파이더맨'은 상당히 잘 만들었다. 영화적인 게임 내 이동과 전투 연출이 멋있었다.



그런데 나에게는 스샷 찍는 재미 말고는 별 것 없는 게임이었다.





스파이더맨 팬이라면 좋아할 것 같다는 생각을 플레이 내내 했다(나는 아님). 인기 많았던 역대 빌런들을 죄다 끼워넣기 위해 노력한 게임이다. 영화라면  와 헐  대박 쩐다 등의 4대 감탄사를 내뱉으며 놀라워했을 만한 액션 장면들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전투도 쉽고 단순하고 호쾌하다. 버튼 몇 개만 누르면 멋짐이 폭발하는 쫄쫄이 스파이더맨이 기계체조 세계선수권 수준의 몸놀림을 보이면서 적을 때려눕힌다.



근데 재미는 없었다. 부가 미션은 반복적이었고 뉴욕을 구해야지! 라는 생각밖에 없는 스파이더맨에게 이입도 잘 안 됐다. 신비롭고 파괴적인 힘을 쓰는 빌런은 꼭 동양인이어야 한다는 서구 문화권의 오리엔탈리즘에도 심사가 뒤틀렸다. 미국 사는 마블 팬들은 재밌었을지도 모르겠다. 근데 그런 애들은 미국에서 나고 자란 좋은 놈과 나쁜 놈이 미국에서 싸우고 미국을 구하고 그런 식의 게임 질리지는 않는 건지, 궁금하다.




별로 재미 없었던 스파이더맨 게임에서 내가 더 주의깊게 본 것은 이렇다.



'냉장고 속의 여자'라는 말이 있다. DC코믹스의 캐릭터 중 하나인 '그린 랜턴' 의 스토리에서 여자친구가 토막살인을 당해 냉장고 속에서 발견되는 장면이 있는데, '여자의 잔인한 죽음을 계기로 각성하게 되는 주인공'이라는 설정을 비판하기 위해 계기로 탄생한 표현이다.



물론 어떤 컨텐츠나 스토리를 막론하고, 주인공이 있다면 시련도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공주가 납치되지 않았다면 마리오는 굳이 쿠파같은 놈하고 싸울 필요 없다. 워킹데드 등장인물들이 싸움도 무지 잘하고 식량도 팍팍 구하고 은신처는 안전하고 팀워크도 장난 아니게 좋으면 보고 있는 우리는 재미가 없을 거다. 주인공이 쇠를 벼리듯 적절하게 두들겨 맞아야 맷집도 좋아지고 보는 사람도 신나는 법이다.



근데 가끔 분위기 파악 못 하는 애들이 이걸 곡해해서 문제가 된다. 주인공-남자. 남자한테 가장 상처를 줄 수 있는 것-엄마 아니면 여친의 희생. 이 논리만 가지고 여자를 잔인하게 죽이고, 때리고, 강간하고, 토막내고 아주 할 수 있는 건 다 한 다음에 그걸 좋은 카메라와 기술력으로 포장해서 판다. 그런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혹시 너네가 여자를 이렇게 죽이고 싶었니? 라고 묻고 싶어질 정도다.



여자를 좀 더 잔인하고 자극적으로 죽여야 이야기의 개연성이 생기는 건 아니다. 왜 여자친구가 강간당하고 엄마가 불타 죽는데 주인공이 화가 나서 범죄자들을 죽이고 영웅이 되고 보상을 받는 건지 모르겠다.



폭력에 희생된 쪽은 여자고 그걸 극복해야 하는 것도 여자 자신이다. 그런 얘기는 무시되고 그저 여자가 겪은 불행을 자기가 성장하는 발판으로 삼겠다는 것은 곧 그를 한 명의 인간이 아닌 자기 소유물로 본다는 거다. 그 사람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분노하는 거라고? 그럴 거면 그냥 주인공이 더 소중하게 여길 만한 다른 걸 파괴하는 건 어떨까. 본인 팔을 자르던지 눈을 파내던지.




미국냄새 나는 영웅물이 그렇듯, 스파이더맨도 가끔 냉장고 속의 여자를 써먹지 않으면 이야기를 전개시키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스포일러 없는 차원에서 말하자면 이번 게임의 메리 제인은 그런 점을 많이 극복했다. 꺅 납치됐어! 살려줘! 구하러 갈게! 라는 전개로는 욕을 먹을 것 같으니 플레이어들의 눈치를 보며 연출을 조금씩 바꿨다. 메리 제인이 도움만 받는 건 질렸다고 말하기도 하고, 스파이더맨은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하는 때가 있음을 인정하기도 한다. 다만 아직 그 방식이 조금 세련되지 못한 느낌은 있다. 으...나는...평등주의자으아... 하고 이악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티나는 눈치보기는 하나의 전략이다. 대형 컨텐츠를 제작하는 사람들의 목표는 뭘까? 돈 많이 벌어서 대박 치는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되도록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으면서도 참신한, 말은 쉽지만 실천이 어려운 포지션을 잘 잡아야 한다. 영웅이 세계를 구하는 얘기가 언제나 인기 있는 것은 시대 흐름을 잘 파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넘사벽 인기를 자랑하고 있는 스파이더맨이 말하고 있다. 잔인하게 희생된 여자를 통해 성장하길 좋아하는 영웅은 점차 구식이 되어간다는 것을. 구식 이데올로기에 환호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눈치라도 봐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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