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내가 맞을 차례
누군가를 저울 위에 올리려 하면 자신 또한 그 저울 한켠에 올라갈 각오를 해야 한다.
이건 날 저울에 올려놓는 이야기다.
지난 글들에서 근래 만났던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만 항상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을 내 마음대로 가위질하며 다소 우스꽝 스럽게 편집했음을 인정한다.
지금도 사실 어디까지 내 이야기를 솔직히 할 수 있을지, 무엇보다 공평할 자신은 전혀 없다. 비록 편파적 저울도 저울이니 최대한 노력해 보겠다고 밖엔…
소개팅 앱으로 만난 첫 번째 남자 A, 그를 좋아하게 됐다. 그건 정말 예상 밖. 전남편과 연애를 3년 정도 하고 결혼생활을 6년 했으며 이혼하고, 짝사랑만 하다 1년여를 혼자 지내왔다. 누굴 좋아하게 된다는 게 어떤 식으로 벌어지는지 데이터가 부족했다고.
처음엔 친구로 지내자 했다. 전혀 내 타입이 아니라고만 생각했으니까.
그와 있었던 일은 전에 썼던 <전남편 이외의 키스> 글에서 약간 밝혔었고, 그때 쓰지 않았던 대화가 있다.
“차라리 이 남자 저 남자 막 자보면 쿨해질까요?”
지금은 이런 질문을 그에게 하는 내 뒤통수를 세게, 아주 세게 후려치고 싶다. 하지만 당시 그 질문은 내 입 밖으로 쏟아졌고 A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음 차라리 그게 나을 수도 있어. 전은도 자유부인 프로젝트를 하는 거지. 다만 나중에 자유부인 프로젝트 희생자 모임에 다 같이 모였는데 나만 너랑 못 잔 남자일 수 있겠단 생각이 드네.”
그렇게 관심 있는 남자라면 꺼내지도 못했을 대화 주제로 대화를 하고 집에 돌아온 난, 그와 자고 싶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왜인지 모르겠다. 그냥 너무 자고 싶었다. 전남편과 관계가 별로 없이도 잘 넘겨왔다고 여겼는데 알게 모르게 성욕이 쌓인 걸지도.
그래서 며칠 뒤 톡으로
[오빠 나 자유부인 프로젝트 1번 참여해볼 생각 있어? 내가 써 놓고 믿기지가 않는 말인데, 진짜로요.]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대사다. 무슨 생각이었던 거야? 스스로에게 묻고 싶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라고.
그렇게 A와 잤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 나 이런 거 못하는구나. 그리고 더 잤다간 이 사람 정말 좋아하게 될 것 같다.'
누군가와 한번 자고 쿨하게 돌아서는 내가 되고 싶었으나, 태생이 no cool, un cool.
그리고 다시 만나, 날 자신의 집에 데려간 그에게 말했다. 역시 안 되겠다고. 사귀지 않는 사람과는 자지 않겠어요.
A는 생각이 많아 보였다. 재잘재잘 떠들며 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던 것 같다. 그는 그날 내게 일절 손을 대거나 야릇한 분위기를 조성하지 않았다. 이윽고 날 데려다주는 차 안에서.
“우린 이제 FWB(Friends with benefits)가 아니라 그냥 베스트 프렌드가 되는 거야. 너랑 자고 싶다고 너랑 사귀는 건 너무 치사한 일인 것 같거든.”
그래... 차라리 잘 됐다. 잘 됐어.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그는 내게 서운한 점이 몇 가지 있었더랬다. 너무 속상해서 전부다 이야기하고 싶진 않다. 다만 그 4가지 서운한 점 중, 첫 번째 항목은 이러했다.
내가 너의 테스트 베드가 되었다는 사실.
이 항목만큼은 억울했다.
[테스트 배드라고 느꼈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것에 응한 것 또한 오빠예요. 우리가 같이 만든 밤이에요.]
이 말이 내게서 나왔다는 사실은 내게 중요하다. 전에는, 그러니까 아주 오래전에는 내가 항상 남자들의 희생양처럼 느껴졌다. 그들의 성욕에 희생당하는 욕구 풀이의 희생자. 난 당하는 입장이고 그들은 하는 입장. 하지만 이 말을 내뱉으며 난 처음으로 그들과 동일하게 성을 즐긴 주체자가 된 기분.
하나 대가는 결국 이거다. 난 까였다. 그리고 말도 못 하게 속상했다. 하여 소개팅 앱으로 이 사람 저 사람 닥치는 대로 만나봤다. 물론 그 이후로 신체 접촉을 하지 않았지만 그가 만든 상실감이라는 마음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다른 남자들을 마구 이용한 것이다.
그리고 좀 이상해 졌다. 이런 표현이 맞을 진 모르겠지만 확실히 이상해 졌다. 왜냐하면 남자들을 만날 때 항상 취하던 태도를 버리고 될 대로 되라는 마음에 마구 행동해 보기 시작한 것이다.
전엔 남자가 무섭고, 스스로에게 자신도 없고, 남자를 몰라 조심스러운, 순진스런 태도였다면, 이번엔 뭐랄까... 솔직하고 무엇보다 그들과 대등히 서는 제스처를 취했다. 어차피 난 지금 미친년이니까. 38살 먹어서 남자한테 까이고 반쯤 미쳐버린 미친년이니까. 뭔가 억울해. 날 깐 남자는 바보고 그 대신 너희를 꼬실 거야. 이런 마음. 나도 그들을 유혹하고, 그들이 무례하면 나도 무례해지고, 무엇보다 스스로에 대해 자신 있게, 그렇게 상실감을 메꾸기 위한 내 방황은 서서히 변질되기 시작했다. 나의 새로운 모습에 대한 탐험으로.
내게 부과한 실험이며 일생을 놓고 벌인 모험이다. 정말 부끄럽지만 이렇게 대범히 행동해 본 적이 없다. 일생을 통틀어서.
이제야 이런 걸 해본다.
난 짝사랑의 대가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모두 짝사랑을 해왔다. 제대로 말 한마디 못 걸고, 심지어 좋아하는 아이를 피해 다녔다. 중학교 때는 짝사랑하던 애가 학예회 같은 데서 춤을 추는데 그걸 보고 나와 혼자 울었던 적도 있다. 눈물의 이유는 그 아이를 그때만큼은 실컷 바라볼 수 있단 게 너무 좋아서. 부끄러워 차마 바라보지도 못했으니까.
이성의 주목을 받아보긴 커녕 어디서나 투명인간 같은 존재감. 조용한, 있는지 없는지 모를 아이. 중학교 졸업 사진의 내 얼굴은 마치 벽돌 같다. 너무 네모나 그 얼굴을 차곡차곡 쌓아 벽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대학교 때 친구가 동아리 선배에게 나는 외모로 치면 상중하 중에 어느 정도냐고 물었을 때, 그 선배는 중상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나도 똑같은 질문을 할 거라 생각했던 친구는 의아해했지만 끝까지 묻지 않았다. 중상보다 못할 것 같아서... 외모에 자신이 없었다.
그리 살다 보니 항상 나 좋다고 다가오는 남자만 사귀었다. 주어지는 사랑이 귀해서, 너무 사랑받고 싶어서 전남편과 결혼했다.
전남편은 나만 바라봐 줄 남자였다. 그가 내게 하사하는 사랑에 보답하기 위한 충직한 기사처럼, 어떠한 각오 같은 마음으로 그와 살았다. 그에게 밝힐 수 없는 병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결혼했다. 그가 죽는 꼴을 보느니 내가 대신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내 모든 모습을 받아들여 준 유일한 존재. 항상 날 세상에 잡아두는 뿌리는 한가닥뿐이라고, 전남편이란 뿌리 하나뿐이라 여겼다. 그걸 잘라낼 용기 따윈 없었다. 그가 없으면 난 이 세상에 존재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를 위해 죽을 수는 있었지만 살 용기는 없었나 보다. 결국 그 뿌리를 끊고 위태롭게 혼자 서 있다. 바람이 불면 유독 크게 흔들리는 것만 같다. 하지만 자세히 생각하고 싶진 않다. 날 세상에 뿌리내리게 하는 존재가 없다는 게 무서우니까. 그걸 마주하면 아무 미련 없이 훌쩍, 바람에 날아가 버릴 것 같으니까.
다시 A 이야기로 돌아와, 당근 마켓에서 만난 남자가 라면 타령을 하길래 다신 말 걸지 말라고 하곤 씩씩거리며 집에 돌아온 그 밤, A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오빠, 오빠는 왜 나 안 좋아해요!”
“...... 아니 네가 안 좋은 건 아니야. 그냥 내가 한 군데 묶이기 싫은 것 같아.”
“내가 어디가 어때서요? 내가 그렇게 별로예요? 내가 그렇게 싫어요?! 나 이제 자존심 없어요. 오빠가 보고 싶어요.”
난 울고 있었다. 흔하디 흔한 드라마에서 나올법한 말을 뱉어내며. 한심하기 그지없다.
“자존심이 없을 수가 있나... 지금 너 기분이 너무 안 좋아 보여 오늘 만나면 안 될 것 같다. 다시 자게 되면 너 분명 후회할 거야. 그럼 네가 했던 말에도 반(反)하게 되는 거고 내가 한 말에도 반(反)하게 되는 거야.”
“오빠가 한 달간 심란하고, 한 달간 잠도 못 잤으면 좋겠어요!!”
“죽으라는 소리잖아... 무서운 여자네...”
“그리고 전화도 내가 먼저 끊을 거예요!!”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난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잠을 잤다. 물론 엄청나게 꼴사나운 짓을 저지르긴 했으나, 그 꼴사나운 전화를 A가 그냥 끊어버리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뭔가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그날 밤 꿈을 꿨다. 내 주변의 모든 건물이 무너지는 와중에 어떤 이가 나의 팔을 잡고 안전하고 따뜻한 곳으로 인도하는 꿈.
결국, 난 괜찮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게 내 실체다. 내가 만난 남자들을 웃음거리로 만들만한 글을 썼지만 정작 울면서 남자에게 전화해 한심한 대사를 게워내는 여자.
갑자기 하루아침에 매력 넘치고 당당한 여자라도 된 양 남자들을 꾀어내 보려 했지만 결국 짝사랑하는 남자에게 카톡을 날리지 않기 위해 오늘도 참을 인의 주술을 세 번도 더 외치는 사람.
내가 되고 싶었던 이상은 당당하고 섹시하고 그 매력으로 누구든 정복해버리는 그런 사람. 제일 좋아하는 국내 여배우는 김혜수다.
하지만 스스로 건 정신승리의 마법을 풀고 나면 결국 남는 건 아직도 어리숙하고 서툴기만 한 전은도. 아직도 나 자신에 대한 수치가 8할이다.
하지만 이 글을 이렇게 끝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날 위해서.
난 이제 내가 원할 때 다시 내 스스로를 당당한 여자로 바꿔보는, 서툴지만 색다른 페르소나가 생겼다. 다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그 모습을 꺼내 볼 것이다. 좀 더 뻔뻔하게.
그리고 언제든 다시 사랑에 빠질 것이다.
비록 다시 이런 글을 쓸 만큼의 흑역사를 제조하게 될 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