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마시면서 시간을 보냈다. 술은 시간을 내려놓게 한다. 내려놓아진 시간 안에서 잠시 나를 누르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시간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평등하게 주어진다. 그 어떤 부자도 하루를 25시간으로 보내진 않을 것이다. 시간의 평등함을 생각할수록 내 시간에 대한 책임감이 강해졌다.
나는 더 자주 행복의 순간을 만끽하는 사람이고 싶고, 어제보다 오늘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이왕이면 경쟁 사회에서 경쟁력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이런 생각들이 시간의 가치를 고민하게 하고 시간의 밀도를 측정하게 만들었으며 시간의 유의미함을 따져보게 만들었다. 나는 때때로 밀도 있고 촘촘해진 시간들이 버거웠다. 시간이 버거워진 날이면 그 무게를 줄여볼 수도 있겠으나 가끔씩은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 현실에 타협한다는 찝찝한 감정 없이 내려놓게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술이다.
나에게 '술'은 두 글자로 만들면 '사람'이다. 혼술을 할 정도로 술 자체를 좋아하지 않고, 술보다는 술자리가 좋다. 그리고 이왕이면 나와 비슷한 버거움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 좋다. 말이 잘 통하니까, 대화의 도수가 맞는 사람이랄까.
어제 술자리에 모인 친구 중 인후는 글 쓰는 게 직업인 카피라이터다. 우리 둘의 관심사인 글에 대해 자주 얘기하곤 하는데 어제는 내가 쓴 글을 보여주기도 했다.
글을 보여주면 극작가를 꿈꾸는 시우는 재미없어, 퇴고를 더해봐라는 조언을 보내기도 하고 카피라이터 현진이는 노력하는 내 모습을 좋게 평가하면서 좀 더 내 이야기를 담았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을 말해주기도 했다. 태윤이는 좋게 느꼈던 자신만의 포인트를 집어 말해줬고, 단비는 다음 글은 언제 쓰냐며 흥미를 보이기도 했다. 푸름이는 항상 좋아요를 눌러주며 지지를 보내줬고, 정구형은 한 줄 요약 감상평을 보내오기도 했다.
인후는 의대생이 해부실습을 하듯 내 글을 해부하고 하나씩 해석해나갔다. 말이나 글은 상대방에게 전달되는 순간, 저자의 의도보다 독자의 해석이 중요해진다. 인후의 직업이 카피라이터라서 전문가에게 인정받았다는 점도 기분 좋았지만 인후의 해석이 내 의도와 다르지 않아서 더 좋았다.
나는 신형철 작가님의 평론을 읽으면서 글 쓸 자신감을 잃기도 했지만 그런 평론을 이뤄내는, 평론할 가치가 있는 글을 써보고 싶다는 욕심이 났다. 인후의 충실한 평론을 들으며 소정의 성취감과 자신감이 생겨났다.
신형철 작가님은 "내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은 생명이지만 그렇다고 생명을 줄 수 없지 않은가. 아니, 줄 수 있다. 생명은 '일생'이라는 시간으로 형태로 분할 지불이 가능하다. 생명을 준다는 것은 곧 시간을 준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내 글을 읽으며, 함께 술자리를 하며 본인들이 가진 가장 귀한 것을 나눠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어 고맙고 행복하다. 나는 그런 마음이 낭비되지 않게 더 나은 사람이 되고 더 나은 글을 쓰겠다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