쌓아두고 사라지는 마일리지, 스테이블 코인으로 되살리기

by 심준규 Jace Shim

대한항공 마일리지 잔액이 3만 마일인데 쓸 곳이 마땅치 않다. 항공권으로 교환하려면 성수기엔 좌석이 없고, 제휴 쇼핑몰에서 쓰자니 환산 가치가 영 신통치 않다. 유효기간은 다가오고, 결국 상당수가 그냥 소멸된다. 이 경험은 특정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다. 국내 항공사와 카드사, 대형 유통 기업의 미사용 마일리지와 포인트 잔액을 합산하면 조 단위를 훌쩍 넘긴다. 거대한 숫자인데, 정작 소비자가 체감하는 가치는 그 숫자에 한참 못 미친다.


기업 입장에서도 마일리지는 골칫거리다. 회계 기준상 미사용 마일리지는 이연수익(Deferred Revenue)으로 분류된다. 이연수익이란 고객에게 아직 제공하지 않은 서비스에 대해 미리 받아둔 대가로, 재무제표에서 부채로 계상된다. 즉 마일리지를 많이 쌓아줄수록 기업의 장부상 부채가 늘어나는 구조다. 대한항공의 마일리지 관련 이연수익은 수천억 원 규모로 알려져 있다. 소비자에게는 가치가 모호하고, 기업에게는 재무 부담인 자산 — 마일리지의 현재 위치가 바로 여기다.


이 문제의 근원은 마일리지가 '닫힌 생태계' 안에 갇혀 있다는 데 있다. 대한항공 마일리지는 대한항공 생태계에서만, 현대카드 포인트는 현대카드 가맹점에서만 쓸 수 있다. 기업들이 제휴 네트워크를 확장하려 해도, 기업 간 정산 과정이 복잡하고 비용도 만만치 않다. 파편화된 포인트 생태계는 소비자 불만을 키우고, 기업들의 충성도 프로그램 효율을 갉아먹는다. 기술적 해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서로의 시스템을 연결할 공통 인프라가 없었기 때문이다.


스테이블 코인이 바로 그 공통 인프라가 될 수 있다. 마일리지를 스테이블 코인으로 전환하면, 그 순간 특정 항공사나 브랜드에 종속된 폐쇄 자산이 아니라 어디서든 쓸 수 있는 독립적 디지털 화폐가 된다. 한국에서 쌓은 마일리지를 코인으로 바꿔 파리에서 우버를 타고, 도쿄에서 호텔을 예약하고, 뉴욕의 편의점에서 결제하는 시나리오가 기술적으로 가능해진다. 경계가 사라진 마일리지, 즉 글로벌 모빌리티 화폐의 탄생이다.


경제학 개념으로 설명하면 이것은 사장 가치(Deadweight Loss)의 회수다. 사장 가치란 시장의 비효율로 인해 아무에게도 귀속되지 않고 사라지는 가치를 의미한다. 소멸되는 마일리지가 대표적이다. 소비자는 적립한 가치를 못 쓰고 잃고, 기업은 부채를 소멸시키지만 고객 경험은 악화된다. 어느 쪽에도 긍정적이지 않은 결과다. 마일리지를 스테이블 코인으로 유동화하면 이 사장 가치가 실질적인 소비 권력으로 전환된다. 소비자는 가치를 온전히 회수하고, 기업은 부채를 상각한다. 이것이 진정한 윈-윈 구조다.


재무 관리 측면에서 기업이 얻는 효과는 더 구체적이다. 마일리지가 코인으로 전환되어 실제 결제에 사용되는 순간, 장부에서 부채가 사라진다. 자발적 사용 전환을 유도하면 기업이 능동적으로 부채를 줄일 수 있다. 반대로 지금처럼 수동적으로 소멸을 기다리는 방식은 재무 계획 수립을 어렵게 만든다. 스테이블 코인 전환 옵션을 제공하면 마일리지 사용 속도를 기업이 어느 정도 조율할 수 있게 되고, 이연수익 관리의 예측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차 시장(Secondary Market)의 형성은 이 생태계의 완성도를 높이는 요소다. 전환한 코인이 거래소에서 자유롭게 매매되면, 마일리지에 사실상의 시장 가격이 생긴다. 지금은 기업이 일방적으로 정하는 환산 비율이 마일리지 가치의 기준이지만, 이차 시장에서는 수요와 공급이 가격을 결정한다. 남은 코인을 현금화하거나, 반대로 추가 여행을 위해 코인을 구매해 마일리지를 충전하는 자율 경제가 작동한다. 마일리지가 처음으로 '시장에서 거래되는 자산'의 지위를 얻게 된다.


데이터 자산화의 관점도 빠뜨릴 수 없다. 고객이 마일리지를 어디서 전환하고, 어느 지역에서 어떤 서비스에 쓰는지는 이동과 소비 패턴이 결합된 고품질 데이터다. 지금은 신용카드사와 PG사가 이 데이터의 상당 부분을 가져간다. 자체 스테이블 코인으로 결제 흐름을 내재화하면, 항공사와 모빌리티 기업이 고객의 여행 전 과정 데이터를 직접 확보할 수 있다. 이 데이터를 기반으로 초개인화된 여행 상품을 큐레이션하고, 최적 타이밍에 맞춤 제안을 하는 모빌리티 플랫폼으로 진화할 수 있다.


글로벌 제휴 비용 절감도 실질적 효과다. 항공사가 해외 호텔, 렌터카, 공유 모빌리티 기업과 포인트 제휴를 맺으려면 복잡한 정산 계약과 수수료 협상이 필요하다. 스테이블 코인을 공통 정산 수단으로 채택하면, 기업 간 정산이 블록체인 위에서 자동화된다. 새로운 제휴사를 추가할 때도 기술적 통합 비용이 낮아지고, 정산 주기도 단축된다. 제휴 네트워크 확장의 문턱이 낮아지면 고객이 쓸 수 있는 곳이 늘어나고, 마일리지의 체감 가치가 높아지는 선순환이 만들어진다.


넘어야 할 과제도 명확하다. 가장 복잡한 문제는 교환 비율의 표준화다. A항공사의 1마일과 B카드사의 1포인트를 같은 기준으로 스테이블 코인에 매핑하려면 공정한 산정 기준이 필요하다. 기업마다 포인트의 취득 구조와 운용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이해관계 충돌이 불가피하다. 세무 처리도 선결 과제다. 마일리지를 코인으로 전환하고 현금화하는 과정에서 소득이 발생하면 과세 대상이 될 수 있는데, 현행 세법에는 이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다. 기업의 부채 탕감 회계 처리 방식에 대한 가이드라인도 마련돼야 한다.


마일리지의 본질이 바뀌고 있다. 기업이 고객에게 주는 사은품이 아니라, 고객이 이동과 소비를 통해 스스로 창출한 디지털 자산으로 재정의되는 흐름이다. 스테이블 코인은 파편화된 이 자산들을 하나로 묶고, 국경을 넘어 유통시키는 매개체다. 쌓아두고 소멸되던 마일리지가 전 세계 어디서나 쓸 수 있는 화폐가 되는 순간, 한국 기업들은 글로벌 여행객의 지갑을 직접 점유하는 모빌리티 금융의 새로운 플레이어로 올라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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