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상공인을 방패로, 국가 경쟁력을 창으로

유통사의 스테이블 코인 전략

by 심준규 Jace Shim

한국 유통 시장에서 스테이블 코인 도입을 추진하는 대형 플랫폼이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장벽은 기술이 아니다. 수십 년간 결제 인프라를 장악해온 카드사와 금융권의 저항이다. 쿠팡이나 네이버쇼핑이 자체 스테이블 코인을 발행해 결제망을 내재화하겠다고 선언하는 순간, 카드사들은 수수료 수익 기반이 무너진다는 위기감으로 총력 대응에 나설 것이다. 이 국면에서 유통사가 어떤 명분을 앞세우느냐가 싸움의 판도를 결정한다.


명분 선택의 문제는 단순한 홍보 전략이 아니다. 국회와 금융 당국, 여론을 어떻게 움직이느냐는 실질적인 제도 설계에 직결된다. 유통사가 순수하게 자사 수익 구조 개선을 위해 카드사를 우회하려 한다는 인상을 주면, 정치권은 기존 금융 질서를 지키는 편에 서게 된다. 반면 피해받는 약자가 전면에 보이는 구도를 만들면 방어 논리가 달라진다. 명분은 싸움의 도구다.


초기 국면에서 가장 강력한 명분은 소상공인 상생이다. 카드 수수료 2~3%는 대형 플랫폼보다 영세 판매자에게 훨씬 가혹하게 작동한다. 연매출 1억 원짜리 온라인 셀러가 카드사와 PG사에 지불하는 수수료는 연간 200~300만 원이다. 영업이익률이 3~5%에 불과한 현실에서 이 금액은 생존의 문제다. 유통사가 이 고통을 해결하겠다는 명분을 전면에 내세우면, 카드사는 수수료 수익을 지키기 위해 소상공인의 이익에 반하는 세력으로 프레임된다. 정치적으로 방어하기 매우 불편한 위치다.


카드 수수료 인하 논쟁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국내에서 카드 수수료 규제 강화 논의가 불거질 때마다 금융권이 수익성 악화를 이유로 저항했지만, 결국 소상공인 보호 논리에 밀려 수수료가 인하되는 패턴이 반복됐다. 스테이블 코인 도입 국면에서도 동일한 논리 구조를 활용할 수 있다. 유통사가 직접 전면에 나서기보다, 소상공인 단체와 셀러 커뮤니티가 먼저 목소리를 높이고 유통사는 인프라 제공자로 포지셔닝하는 방식이 저항을 최소화하면서 주도권을 확보하는 현실적인 경로다.


그러나 소상공인 명분만으로는 제도 설계 단계를 돌파하기 어렵다. 금융위원회와 한국은행을 움직이는 논리는 다르다. 관료 조직은 민원이 아니라 국가 전략의 언어로 설득된다. 여기서 국가 디지털 금융 경쟁력 명분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유럽은 MiCA(암호자산 시장 규제법)로 디지털 자산 규제 표준을 선점했고, 미국은 GENIUS Act로 스테이블 코인 제도화를 추진하고 있다. 싱가포르와 홍콩은 아시아 디지털 금융 허브 경쟁에서 앞서나가고 있다. 한국이 이 흐름에서 뒤처지면 글로벌 플랫폼에 디지털 결제 시장을 내주게 된다는 논리는 규제 샌드박스 허용의 강력한 명분이 된다.


실제로 한국은 디지털 금융 인프라 경쟁에서 유리한 출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인터넷 보급률, 높은 스마트폰 결제 침투율, 이미 고도화된 핀테크 생태계가 기반으로 깔려 있다. 여기에 한국은행의 CBDC 연구와 금융위원회의 토큰증권 제도화 작업이 맞물리면, 유통사의 스테이블 코인 도입은 국가 디지털 금융 전략의 민간 실험장으로 위치시킬 수 있다. 규제 기관 입장에서 민간이 앞장서 인프라를 구축하고 검증하는 기회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두 명분은 배타적이지 않다. 오히려 순서를 달리해 층위를 나누어 활용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정교하다. 소상공인 상생을 방패로 삼아 카드사의 저항을 무력화하고, 국가 경쟁력을 창으로 써서 규제 당국의 허용을 이끌어내는 투트랙 구조다. 전선을 두 개로 나누되, 각 전선에서 가장 효과적인 언어를 쓰는 방식이다.


유통사가 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갖춰야 할 마지막 조건은 선제적 자기 규제다. 스테이블 코인 발행 시 담보 자산의 실시간 공시, 미성년자 과소비 방지 장치, 개인정보 보호 체계를 스스로 구축하고 공개하면 규제 당국이 개입할 명분이 줄어든다. 혁신의 부작용을 스스로 관리하는 기업에게 규제 기관은 재량권을 더 많이 준다. 소비자를 보호하는 동시에 제도의 선제 수용자가 되는 포지션이 가장 강력한 명분의 완성이다.


결국 스테이블 코인을 둘러싼 싸움은 기술 싸움이 아니라 서사 싸움이다. 누가 더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먼저 시장과 제도권에 심느냐가 승패를 가른다. 소상공인의 수수료 고통을 해결하고, 국가 디지털 금융의 미래를 앞당기는 인프라 — 이 두 서사를 하나로 엮어내는 유통사가 다음 10년의 결제 패권을 가져갈 것이다.


핵심 키워드: 스테이블 코인, 결제망 내재화, 소상공인 상생, 디지털 금융 경쟁력, 투트랙 전략, 규제 샌드박스, MiCA, GENIUS Act, 플랫폼 락인, 선제적 자기 규제, 서사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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