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은 회의실 앞에서 멈춰 섰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이미 복도에는 새로 온 직원들의 말소리가 퍼지고 있었다.
옅은 향수 냄새, 급하게 맞춘 듯한 양복, 명찰 대신 아이폰을 들고 이름을 확인하는 모습들. 팔란텔라 출신들이었다.
‘그 사람의 사람들.’
회의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Otterlim, 아이비 출신의 6피트가 넘는 키에 말끔한 회색 슈트를 입은 백인 남성. 단정한 눈썹 아래의 회색 눈동자가, 상대를 읽으려는 듯 냉정하게 빛났다.
“Daniel Han?”
“예, 맞습니다.” 다니엘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는 악수도 생략한 채 자리에 앉았다. “자기소개해보시죠. 이력서나 조직도 말고, 본인 입으로요.”
예상하지 못한 방식이었다. 다니엘은 잠시 머뭇였지만 곧 침착하게 말했다.
“저는 실리콘밸리에서 10년 넘게 경력을 쌓아왔고, 이 회사엔 CFO 전임자 시절 직접 리쿠르팅을 받아 입사했습니다. 주로 재무 보고와 내부 통제 쪽을 맡고 있고—”
“왜 우리 회사에 들어오고 싶었죠?” 오토림이 말을 잘랐다.
다니엘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미 들어온 사람에게 묻는 질문이라기엔...’
“기회가 있었습니다. 더 넓은 규모에서, 더 복잡한 시스템을 경험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시선은 여전히 벽에 걸린 그래픽 캘린더를 향해 있었다.
“지금 재무팀에 남아있는 사람들, 모두 당신 팀입니까?”
“네. 릴리와 대니, 둘 다 제가 직접 고용한 인재입니다.”
“알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대화는 10분 만에 끝났다. 다니엘은 무언가 빠져나간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나서기 직전, 오토림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조직은 변할 겁니다, Daniel. 그 변화를 따라올 준비가 되어 있길 바랍니다.”
그 순간, 다니엘은 느꼈다. 이건 ‘변화’가 아니라 ‘정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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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 다니엘은 사무실에서 걸어 나와 Embarcadero 피어 쪽으로 향했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볼을 스쳤다. 그녀는 벤치에 앉아 도시락 샌드위치를 꺼냈다.
별다를 것 없는 식사였지만, 이 시간이야말로 자신에게 허락된 유일한 평화였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그녀는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었다.
페이지 하나에 적혀 있던 단어: “Sharon Palantella.”
그 이름은 몇 달 전 파일 속에서 처음 보였다.
공급계약도 없고, 세금번호도 없는 유령 같은 법인. 그런데 자금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오토림이 그 이름을 다시 꺼냈다.
면담 중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노트북 화면 한쪽에 떠 있던 로고.
분명히 'Sharon Palantella, Strategic Partner'라고 적혀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다니엘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였다.
해가 구름 사이로 스며들며 바닷가를 비췄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먼 수평선 너머, 아직 보이지 않는 폭풍이 오고 있었다.
‘나는 숫자로 싸운다. 그리고 이번에는··· 절대 물러서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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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barcadero 역 근처, 바닷바람이 살짝 불어오는 점심시간.
다니엘은 도시락을 들고 피어 쪽 벤치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멀리 있는 베이 브리지를 향하고 있었지만, 생각은 사무실 안을 맴돌고 있었다.
잠시 뒤, 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을처럼 정갈한 옷차림이었지만, 오늘따라 입술을 꽉 다문 표정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 뒤를 따라 대니가 도착했다. 무표정한 얼굴, 약간은 피곤한 눈빛. 셋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다니엘, 무슨 일인지 알겠지만··· 요즘 너무 조심스러워.” 릴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아침에도 Bill이 내 자리에 와서 새로 들어올 AP 후보자 파일을 보여주더라고. 웃긴 거 알아? 인터뷰한 사람들 전부 백인 남자였어.”
대니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봤어. Bill은 자기가 선별한 데이터라고 자랑하듯 설명하더라.
Vicky가 직접 시켰대. 너랑 릴리는 프로세스에서 빠지래.”
다니엘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더 이상 팀장은 ‘관리자’가 아니었다. 결정권은 사라졌고, 존재감도 줄어들고 있었다.
“이건 의도된 거야,” 다니엘이 입을 열었다.
“Otterlim은 Palantella에서 데려온 사람들과만 일할 생각이야.
이전 CFO가 뽑은 직원들은 다 배제하려고 하고 있어. 그리고 그 시작이 나부터 시작해서 릴리와 대니, 너희야.”
릴리가 눈을 추켜올렸다. “그걸 확신해?”
“응. 숫자들이 말해주고 있어. 인사 운영비, 리쿠르팅 수수료, 교육 예산 배정··· 전부 Palantella 출신으로만 흘러가.
시스템 접속 로그까지 보면, 너희 둘을 의도적으로 패스하려 했다는 흔적이 보여.”
대니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릴리는 이를 악물었다.
“웃기지. 내가 여기서 몇 년을 굴러왔는데··· 아무것도 아닌 애 하나가 우리 위에 앉고, 우리를 배제해?”
“그 애, Bill. Harvard 출신이라던가?” 다니엘이 물었다.
“응. 경제학은 전공도 아니래. 근데 Vicky가 좋아해. 젊고, 하얗고, ‘야망’ 있어 보인다고.”
셋은 말없이 잠시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 속엔 불쾌함, 분노, 불안, 그리고 연대가 섞여 있었다.
“이제 어쩔 거야?” 대니가 물었다. “이 상황, 그냥 놔둘 거야?”
다니엘은 조용히 도시락을 덮었다.
“난 싸울 거야. 다만 내 방식대로.”
“그게 무슨 뜻이야?” 릴리가 물었다.
“우린 숫자를 다루는 사람들이야. 거짓말은 할 수 있어도, 숫자는 끝내 진실을 드러내.
나는 그걸 사용할 거야. 그들이 무너질 때, 아무도 우리가 손댔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게.”
릴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우리한테 원하는 게 있어?”
“도와달라는 말 안 할게. 위험하니까. 너희는 최대한 피해 없이 빠지는 게 좋을지도 몰라.”
대니는 고개를 저었다. “난 기본적인 감사 데이터만 정리해서 넘겨줄게. 그 이상은 위험해.”
“나도··· 아직은 결정 못하겠어,” 릴리가 말했다.
“하지만 만약 정말 움직이게 되면··· 확실한 증거를 보여줘. 나도 같이 무너뜨릴 준비가 돼 있을 테니까.”
셋은 다시 바다를 바라봤다. 파도는 잔잔했고, 햇빛은 너무 평화로워서 불쾌할 정도였다.
“그리고,” 다니엘이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가 여기서 나가게 된다면—누가 먼저든, 어디든—절대 지지 말자. 서로를 믿지 않아도 괜찮아. 하지만 적어도, 기억하자. 누가 진짜 문제였는지.”
그날 점심, Embarcadero의 벤치 위에선 아무런 서명도, 증거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셋의 눈빛은 이미 그날 이후로 바뀌어 있었다.
다음화 예고
〈제3부. 첫 균열, 그리고 감사팀〉
장부는 기억하고 있었다.
누구의 서명이 바뀌었고, 누가 시스템 접근권한을 탈취했으며, 어떤 인보이스가 현실과 맞지 않는지를.
감사팀의 이메일 한 통이 다니엘을 다시 움직이게 한다.
그리고··· 릴리는 마지막 흔적을 남기고 사라진다.
"숫자는 사람을 죽이지 않아. 하지만 사람을 없앨 순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