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잊힌 회의록

by J이렌



다니엘은 퇴근 무렵, 평소보다 늦게 자리에 앉아 있었다.

불 꺼진 사무실, 오직 그녀의 모니터만이 어두운 공간을 밝히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 그녀는 특정 폴더에 집착하고 있었다.

이름은 ‘BoardPrep_2025Q1’. 분명 있었던 폴더인데, 사라졌다.

이사회 보고 전날 밤까지 수정한 자료, 비키와 오터림이 회의 직전에 논의하던 숫자.

“여기 있었는데··· 왜 없지?”

혹시 몰라서 외장 하드에 저장해 뒀던 백업 파일을 열어봤다.

마침 그 폴더가 복사되어 있었다. 날짜는 3월 6일 밤 11시 14분.

그날은 비키가 이례적으로 저녁 늦게까지 잔업을 하던 날이었다.

다니엘은 숨을 고르며 파일 하나를 클릭했다.

‘Sharon Palantella Investment Overview_Final.pptx’

열리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녀는 손을 얹고 기다렸다.

이 프레젠테이션은 이사회에 제출된 공식 버전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부 검토용 메모가 빽빽하게 달려 있었다.

슬라이드 한 장이 화면에 나타났다.


Projected Capital Gain via S.P. Equity Transfer — $8.4M

Notes: Requires bypass of internal compliance review. Need Director Han’s silence.


다니엘은 눈을 가늘게 떴다. ‘Director Han’s silence’

이건 그녀를 지목한 메모였다. 공식 보고서에 올라가지 않은 문구.

이건 비키나 오터림이 내부 회의에서만 쓰는 메모였을 것이다.

다른 슬라이드에도 비슷한 문구들이 붙어 있었다.


인사 자료 수정: Lily T. (퇴직) 제거 및 Bill G에게 승인 권한 부여.

AP/AR 승인 체계 — D. H. 승인 권한 제한, 검토만 허용.

D.H.

다니엘 한. 그녀 자신이었다.

그녀는 숨을 들이쉬며 노트북 화면을 잠시 멈췄다.

이건 실수가 아니었다.

회계팀의 구조를 바꾸려던 것이 아니라, 자신을 무력화하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문서는 그 증거였다.

다니엘은 곧장 문서를 PDF로 저장한 후, 암호화된 클라우드 폴더에 업로드했다.

이름은 단순했다. “Deleted_Deck_Recovered.pdf”

그 순간, 사무실 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밤 청소 담당자가 들어오려던 참이었다.

다니엘은 재빨리 화면을 닫고 미소를 지었다.

“오늘도 늦게까지 일하시네요?”

“네, 조만간 휴가 좀 가야겠어요.”

다니엘은 평온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속엔 전혀 다른 계획이 피어나고 있었다.

“이제, 네들이 나를 지웠다는 증거는 내가 들고 있어.”

다음날 아침,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출근했다.

커피를 마시고, 이메일을 확인하고, 팀원들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머릿속은 이미 다음 수를 계산하고 있었다.

어디에 어떻게 이 문서를 사용할지.

언제, 누구에게 보여줄지.

그리고 그 순간이 왔을 때, 어떤 말로 — 누구를 먼저 무너뜨릴지.

다니엘은 그날 회의실 문 앞에서 멈춰 섰다. 그 문 너머, 그녀를 그림자 취급하던 사람들.

이제, 그림자는 보고 있었다.

그리고 곧, 그림자는 증거로 말할 것이다.


**. 침묵의 연결고리


다니엘은 새벽 네 시에 눈을 떴다. 꿈속에서도 숫자가 떠다녔다.

Altavia, Syntellis, Sharon Palantella.

그리고, 그녀 자신의 이름.

Daniel Han — 삭제된 결재라인에서 지워진 사람.

하지만 그녀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지우려 했던 바로 그 순간부터 존재감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녀는 집안 모두가 잠든 시간에 주방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비밀번호는 오직 그녀만 아는 17자리 암호.

“Judgment_Excel_Delta_v3” 폴더가 열리자, 화면 위로 셀 수 없는 숫자들이 흐르기 시작했다.

전표 번호, 승인자 이름, 분개 날짜, 벤더 이름, 프로젝트 코드.

그 안에서 하나의 흐름이 있었다. 수치보다 무서운 건 패턴이었다.

그녀는 이번에 모든 트랜잭션을 ‘비정상 승인 루트’로 정렬했다.

기존에는 다니엘이 최종 승인자로 올라 있었던 경비.

지금은 Bill이 직접 승인하고 있었고, 그 승인 건은 대부분 ‘자동 송금’으로 처리되고 있었다.

“자동화, 자동화··· 결국은 책임을 모호하게 만드는 구조.”

그녀는 한 문장씩 메모장에 옮겼다.

“결재 순서 변경: 최초 승인자 D.H. → 자동 승인”

“Bill G. 승인권자 변경 일자: 3/12, 요청자 V.R.”

“Payroll Approval: Lily 삭제, 승인자 없음 → Johnny 직접 승인”


그녀는 중얼였다.

“이건 단순한 조직 개편이 아니라, 책임 해체 시나리오야.”

컴플라이언스 부서가 왜 침묵하는지, 왜 CEO는 그 수많은 데이터 변경을 묵인하고 있는지 — 그녀는 이해했다.

InQComm, 팔란텔라, 그리고 지금의 Sharon Palantella.

그 이름들엔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투자금 회수 루트를 가장한 내부 자금 이동.

그녀는 지난 감사 시트를 다시 열었다. 그중 하나, 단순 회계 메모처럼 보였던 문서.


하지만 거기엔 어떤 인덱스가 있었다.

“Deferred Commission Clearing Schedule (Altavia)”

“Deferred”라는 단어 아래, 예상되지 않은 숫자가 3개 적혀 있었다.

1. $1,280,000

2. $680,000

3. $415,000

그 세 개의 금액이 모두 분기 말 주에 처리되었다는 것,

그리고 동일한 공급업체명이 각기 다른 법인으로 나뉘어 적혀 있었다는 점에서 그녀는 확신했다.

“이건 삼중 회계야.”

“한 거래를 세 번에 걸쳐 다른 법인으로 흘려보낸 거야.

같은 날짜, 다른 계정. 하나는 자산으로, 하나는 비용으로, 하나는··· 아마 사외 벤더로.”

그녀는 PDF로 출력해 둔 분기 재무제표를 꺼내 하나씩 대조했다.

공시된 숫자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그 숫자를 만드는 구성요소들엔, **‘사라진 항목’**이 존재했다.

그 항목의 명칭은:

“Non-Capitalized Strategic Vendor Funding”

그녀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게 바로 Sharon Palantella로 흘러들어 간 돈이야··· 이름도 너무 절묘하게 지었어. 누구도 의심하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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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다시 외장하드에 저장된 감사 인터뷰 회의록을 불러왔다.

Vicky가 감사 파트너에게 이렇게 말한 부분이 있었다.

“해당 프로젝트는 보안상 공유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모든 승인 절차는 내부 정책을 준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페이지에, ‘Daniel Han not included in funding loop’라는 비공식 메모.

누군가 EY 내부에서 작성한 리뷰 코멘트였다.

그녀는 가만히 웃었다.

“그래. 날 빼는 게 정책이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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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다니엘은 이사회 직전 회의실을 스스로 예약했다.

명목은 ‘예산 재검토 미팅’. 참석자는 CFO Otterlim, HR Director Vicky, 그리고 다니엘 본인.

그녀는 조용히 프린트 한 장을 꺼냈다.

그 위에는 단 한 문장만이 적혀 있었다.

“Who owns Sharon Palantella?”

오터림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지금 중요한 주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다니엘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제가 EY 감사 파트너에게 직접 여쭤봐도 될까요? 어차피 그쪽에서 저한테 다시 파일 요청을 했던데요.”

비키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순간 방 안의 공기는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니엘은 미소 지으며 문장을 덧붙였다.

“혹시라도, 이게 실수가 아니라 고의라면··· 그건 곧 범죄가 되거든요.”

그리고 천천히 회의실을 나섰다.

그녀의 뒷모습을 아무도 붙잡지 않았다.


그날 오후 다니엘은 오터림의 호출을 받았다.

“Daniel Han, 잠깐 시간 괜찮습니까?”

Otterlim의 음성은 늘 그랬듯, 정중했고 냉정했다.

다니엘은 모니터 위에 켜진 엑셀 파일을 닫고 고개를 들었다.

“네, 무슨 일이신가요?”

“5층 504번 회의실에서 뵙죠. 단둘이.”

그 말엔 선택지가 없었다.

그는 먼저 걸어갔고, 다니엘은 그의 뒷모습을 따라 계단을 올랐다. 엘리베이터를 피한 건, 일부러였다. 누군가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504번 회의실은 평소엔 비워져 있는 공간이었다.

Otterlim은 문을 열고 의자에 앉은 뒤, 아무 말 없이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회색 슈트, 짧게 정리된 손톱,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Daniel, 요즘 조금...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어떤 의미로 말씀하시는 거죠?”

Otterlim은 책상 위를 손가락으로 천천히 두드렸다.

“어떤 숫자들은 굳이 정리하지 않아도 됩니다.

특히, 감사를 위한 자료가 아닌 ‘개인 백업’ 형태의 문서라면 더더욱.”

다니엘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그가 알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던진 말일까?

“그 문서들이 회사에 도움이 된다면 — 저희는 환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감정적인 판단으로 인해 구조가 흐트러지는 건 원치 않아요.”

그는 말을 멈추고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그냥 ‘이건 경고다’라는 신호일뿐.

“저는 회계사입니다. 숫자는 정리해야죠. 정리하지 않은 숫자는 위험하니까요.”

다니엘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Otterlim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다만... 회사의 방향에 맞는 숫자들이길 바랍니다.”

그는 일어서지 않았다. 다니엘만이 먼저 회의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는 주먹을 쥐었다.

침착했지만, 손바닥은 땀에 젖어 있었다.

그날 밤, 그녀는 하나의 탭을 새로 만들었다.

Judgment_005.xlsx

[Tab Name: Pressure Points]

A열: 날짜

B열: 비공식 발언

C열: 발신자

D열: 추정 목적

첫 번째 셀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정리하지 않아도 되는 숫자’ = 감추고 싶은 숫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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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train 야간열차 안, 그녀는 메모장을 꺼내 마지막 줄을 적었다.

‘모든 숫자는 누군가를 향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나는 그 화살표의 끝에 당신들을 올려놓겠다.’

곧, 전면전이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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