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그녀의 무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by J이렌



“감사팀이 다시 연락했다는 건, 그들도 뭔가 느꼈다는 뜻이야.”

다니엘은 조용히 말했다. 혼잣말이었지만, 그 말은 실내를 무겁게 울렸다.

그녀는 고요한 사무실에 혼자 남아, 다시 엑셀을 열었다.

회계 시스템의 로그 파일, ERP에서 추출한 거래내역, 그리고 승인 경로 추적 시트.

각각의 셀들이 하나의 문장이 되어 그녀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이들은 공모하고 있다.'

'자금은 특정 시기에 집중되었다.'

'승인 경로는 변경되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 ‘이 모든 흔적은 남아 있다.’


그녀는 다시 'Altavia'의 인보이스 패턴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서비스 일자는 없었고, 설명은 모호했다.

‘전략적 기술 지원’, ‘통합 자문’, ‘API 연계 조율’ — 그 어떤 것도 명확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인보이스의 마지막 승인자는 ‘O.L’ — Otterlim이었다.

다니엘은 그 이름을 보며 손끝에 힘을 주었다.

그는 늘 조용했고, 언제나 분석적이며 거리를 유지하는 듯 행동했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 차가운 침묵 뒤에 숨겨진 오만과 확신을.

그가 만든 체계는 치밀했지만, 결코 완벽하지 않았다.

사람은 실수한다. 숫자는, 그 실수를 기억한다.


****

“Daniel, 오랜만이지. 나 기억하려나 모르겠네.”

그녀가 메일을 확인한 건 밤 11시 03분이었다.

보낸 사람: lucia.kwon71@pm.me

제목: [Sharon_P_final.zip]

내용은 단 세 줄.

“작년 가을에 퇴사한 Lucia야.

그때 인보이스 정리하다가 의심 가는 파일 몇 개 백업해 뒀었어.

혹시 네가 필요할 것 같아서 보내.”

Lucia.

1년 전 조용히 퇴사한, 전 회계팀 스태프.

인보이스 정리는 그녀의 주 업무였고, 마지막 퇴근날엔 아무 말도 없이 책상만 비우고 나갔던 사람.

다니엘은 압축파일을 열었다.

폴더명: PNT_Shadow_Audit

그 안에는 날짜별 인보이스 PDF, 회계 시스템 로그 캡처, 그리고 ‘invoice_edit_log.csv’라는 엑셀 파일이 있었다.

그녀는 그 파일을 열었다.

DateVendorEdited ByField ChangedBeforeAfter

2024-11-03NexaFrontbillgPayment Amount39,200.0042,000.00

2024-11-03NexaFrontbillgApproval ChainDaniel HanVicky R.

2024-11-04AltaviabillgProject CodeInQ-112InQ-301

다니엘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건 명백한 조작 로그였다.

금액 수정, 승인권자 변경, 프로젝트 코드 위조.

그리고 편집자는 — Bill G.

그녀는 동시에 생각했다.

Lucia는 왜 이걸 남겼을까? 왜 지금?

다시 메일을 봤다.

Lucia는 마지막에 이렇게 썼다.

“나도 예전에 아무 말 못 하고 나갔지만,

너만큼은 — 제대로 싸워줬으면 해.

그리고... 내가 틀리지 않았단 거 증명해 줘.”

다니엘은 그날 밤, 새 폴더를 만들었다.

폴더명: Final Assets

파일 이름: Judgment_008.xlsx

탭 이름: [Shadow Log]

그리고 마지막 행에 이렇게 적었다.

“사라진 자들이 남긴 숫자들이, 이제 증인이 된다.”


***

다니엘은 감사팀에 파일을 보낼 준비를 했다.

그러나 이번엔 조금 달랐다.

단순히 자료를 첨부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을 함께 덧붙였다.

“첨부된 Altavia 인보이스 분석 파일은 거래 금액, 결제 주기, 승인자 일치 여부, 계좌 전송 경로 등을 기준으로 정리되었습니다.

참고로, ‘Sharon Palantella’ 명의의 프로젝트가 가장 많은 중복성과 불명확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관련 데이터는 검토 부탁드립니다.”


이메일을 보낸 후, 그녀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제 돌이킬 수 없었다.


‘이건 고발이 아니라 증거다. 누가 누구를 해코지하려는 게 아니다. 그저, 진실을 보여주는 것뿐.’

그녀는 그렇게 믿었다. 믿고 싶었다.


며칠 후, 비키가 그녀의 자리를 찾았다.

“다니엘, EY에서 이상한 요청이 왔어요. InQComm 파일이랑... Palantella 프로젝트 관련 회계 흐름이래요.

혹시 그쪽에 따로 뭐 전달한 거 있어요?”

다니엘은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전달했죠. 요청이 왔으니까.”

“근데, 왜 그게 지금 와서야...?”

“아마도 숫자들이, 말하기 시작했나 보죠.”

비키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평소처럼 얄미운 미소도, 차가운 태도도 없었다.

그저 처음으로 — 당황한 눈빛. 그걸 본 다니엘은 속으로 작게 웃었다.

이제 그녀의 무기는 살아 있었고, 그녀는 그 무기를 쥐고 있었다.


그날 밤, 다니엘은 다시 회계 시스템을 열었다. 아직 풀리지 않은 고리가 있었다.

‘Syntellis’ — 그리고 그와 연결된 또 다른 프로젝트.

“다음은 너야.”

그녀는 조용히 중얼이며 새 시트를 열었다.

파일명은 바뀌었다.

Judgment_002.xlsx

이 숫자들은 증오의 무기가 아니라, 생존의 기록이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겐 심판이었다.



회사의 공기는 달라졌다.

출근길 복도에서 마주친 사람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누구는 인사를 피했고, 누구는 의미 없는 미소로 얼버무렸다.

다니엘은 그 변화를 감지했다.

누군가는 그녀를 무시했고, 누군가는 조심스러웠으며, 또 누군가는 이미 진실을 알아챈 듯 보였다.

“감사팀, 오늘 본사 온대요.”

Finance Analyst 중 한 명이 회의실 앞에서 수군거렸다.

그녀는 태연하게 걸어 들어갔다. 하지만 마음속은 고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보낸 파일, Judgment_001.xlsx와 002.xlsx, 그리고 해석 노트.

그것들이 이제 사람들의 표정에 스며들고 있었다.





오후 2시.

EY 감사 파트너가 본사 4층 회의실에 도착했다.

다니엘은 공식적으로 참석 요청을 받진 않았지만, 회계팀의 정기 서류 점검을 이유로 회의실 근처에 머물고 있었다.

그리고 문틈 사이로 들려온 몇 마디.

“이 거래, 이 계좌... 담당자 누구죠?”

“지난 분기 기준으로는... 오터림 CFO였던 걸로—”

“···결재 승인자는?”

“···비키 R···”

그 짧은 대화 속에서, 다니엘은 확신했다.

그들은 이제, 숫자가 말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날 오후 늦게, 경영진 미팅이 별도로 열렸다.

그녀는 그 자리에 초대받지 않았다.

대신 Finance팀 메신저에는 이런 문장이 뜨기 시작했다.

“오늘 미팅, 꽤 날카로웠다고 하네요.”

“감사파트너가 직접 자료 요청했대요.”

“InQComm... Sharon Palantella... 두 이름이 회의 내내 오갔다더라.”

다니엘은 메신저 창을 닫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지. 이제 시작이지.’


몇 시간 후, 시스템에서 하나의 알림이 떴다.

ERP 접속 로그 — 사용자 'VickyR'의 활동 내역 중 일부 제한.

그리고 이어서 또 하나.

‘Otterlim’의 결재 권한 일시 중지.

다니엘은 손을 멈췄다. 화면을 바라보며, 잠시 말을 잃었다.

‘지금 이 순간, 그들에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그날 저녁, 그녀는 평소보다 조금 늦게 사무실을 나섰다.

정문을 지나 복도로 향하는 길목에서, 한 남자가 조용히 다가왔다.

감사 파트너였다.

“다니엘 씨.”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

“감사합니다. 전달해 주신 파일들... 상당히 정교하게 정리돼 있더군요.”

그 말 한마디에,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짧게 대답했다.

“그저, 숫자들이 말하는 걸 정리했을 뿐이에요.”

“그 숫자들이 지금 회사를 움직이고 있어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 사라졌다.



그날 밤, 다니엘은 오랜만에 평화롭게 잠이 들었다.

누구는 해고될지도 모른다.

누구는 조사받게 될지도 모른다.

누구는 기억에서 사라지겠지만,

숫자는 기억한다.

숫자는, 배신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숫자들이 만들어낸 하나의 결과 —

누군가는, 무너진다.



****

“Daniel, 우리 둘이 잠깐 얘기할 수 있을까요?”

월요일 아침. 다니엘은 인사팀에서 온 미팅 초대를 받았다. 발신자는 HR Generalist였지만, 수신자 리스트에는 한 명의 이름만 더 있었다.

Vicky R.

작은 회의실. 창문 없는 공간에 둥근 테이블 하나.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Vicky는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앉아주세요.”

낯선 미소였다. 지난 몇 달간 보지 못했던 표정이었다.

“어떻게 지내세요?”

Vicky가 커피를 권했지만, 다니엘은 받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무슨 일이죠?”

Vicky는 테이블 위의 서류 파일을 펼쳤다. 회계 시스템의 권한 구조 변경, 담당 업무 재조정, 그리고 “조직 리더십 전환을 위한 제안 사항.”

“아시다시피, 최근 감사 대응으로 조직이 많이 흔들렸죠. CFO도 현재는 휴직 중이고... 그래서 내부적으로 팀 리더십을 조정할 필요성이 생겼어요.”

“조정이라는 게··· 어떤 의미죠?”

“조직의 안정성이 중요하니까요. 당신 같은 시니어 인력은, 실무보다는 전략과 자문 역할에 집중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말은 그럴싸했다. 하지만 다니엘은 들을 수 있었다.

그 말 사이에 숨어 있는 본심을.

'당신은 이제 리더가 아니다.'

“···누가 결정한 건가요?”

Vicky는 웃으며 대답했다.

“CEO와의 논의 끝에요. 하지만 이건 절대 강등이 아니에요. 단지, ‘역할 조정’ 일뿐이죠.”

그 순간, 다니엘의 머릿속에 지난 며칠간의 데이터 흐름, 감사팀의 회의, 그리고 ERP 시스템의 권한 로그들이 떠올랐다.

이들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조정은, 그 흔들림의 반작용이었다.

“거절하겠습니다.”

다니엘은 단호하게 말했다.

“어쩌면 오해가 있는 것 같네요,” Vicky가 목소리를 낮췄다. “지금은 갈등보다는 협력이 필요한 시기예요. 우리 모두 회사를 위하는 마음으로—”

“저는 회사를 위하고 있어요. 다만, 진실을 덮는 방식이 아니라, 드러내는 방식으로요.”

Vicky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럼, 이 안건은 다시 경영진과 논의해 보겠습니다.”


회의실을 나서자마자, 다니엘은 숨을 내쉬었다.

이건 명백한 보복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만큼 그들이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점심시간, Danny가 그녀를 찾아왔다. 조심스럽게 자리 앞에 앉으며 말했다.

“Daniel... 저기, 감사팀에서 또 자료 요청이 들어왔어요. 이번엔 InQComm이 아니라 Sharon Palantella 자회사 목록이래요.”

“···리스트 있어?”

Danny는 태블릿을 내밀었다.

파일 제목은 이랬다.

SPG_Subledger_Matrix.xlsx

(Prepared by: Otterlim / Reviewed by: Vicky R.)

다니엘은 스크롤을 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녀가 찾고 있던 걸 발견했다.

법인: Avalon Strategic Partners

주소: Grand Cayman, KY

계좌 개설일: 2023-07-19

승인자: Johnny K.

“···찾았다.”


그날 밤, 다니엘은 다시 코워킹 스페이스로 향했다.

창밖에는 어둠이 깔려 있었고, 그녀의 눈엔 싸움의 서막이 다시 떠올랐다.

이제, 증거는 모였다. 숫자들이 정렬됐고, 권한 로그도 확보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필요한 건 — 선언이었다.

다니엘은 워드 문서를 열었다.

Subject: Regarding the Palantella Structure & Related Party Transactions

한 줄, 한 문단.

그녀는 차갑고 정확한 언어로 써 내려갔다.

이제,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

누가 무너질 것인가.

누가 침묵했고, 누가 싸웠는가.

그 답은 이 문서 속에 있다.

그리고, 장부 위에 남는다.


다음 화 예고 — 〈마지막 경고〉

회계 시스템은 조용했지만,

로그는 이미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잔액이 맞지 않는 전표.

사라진 승인 내역.


다니엘은 그날,

‘그들’이 실수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것은,

마지막 경고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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