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숫자 위의 유서

by J이렌

폭로하지 못한 자의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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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ccountant: 장부의 심판》은 전적으로 허구의 작품입니다.

여기 등장하는 회사, 인물, 사건은 모두 작가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픽션으로, 실제 인물이나 조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현실에선 숫자를 들이밀기 전에 잘릴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 이야기는 현실에서 작가가 경험하거나 목격한 수많은 조직 내 부조리와 구조적 차별, 그리고 말하지 못한 침묵들에서 출발했습니다. 현실 속 우리는 때로 진실을 마주해도 말하지 못하고, 결국 먼저 잘려나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 속 주인공은 다릅니다. 그녀는 장부 위의 숫자들을 무기로, 아주 조용하고 정교하게 싸워갑니다.

이 소설을 쓰며 저는 이런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만약, 숫자로 싸울 수 있다면?"

"말 대신 셀을 열고, 복수 대신 정리를 택한다면?"

그리고 독자 여러분이 이 이야기를 읽는 동안, 한 번쯤은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프롤로그 — 숫자 위의 유서




달그락.


커서가 엑셀 셀 위를 가로질렀다. 고요한 사무실, 컴퓨터 팬 소음, 그리고 그녀의 손가락이 만들어낸 규칙적인 타자음.


다니엘 한. 47세. 실리콘밸리에 거주하지만 샌프란시스코에 본거지를 둔 한 위성 제작 스타트업 회계 책임자.

월말 마감 120회 차. 감사 파일 정리 33회 차. 조정 분개 무한 반복.


삶은 숫자였다. 그 숫자 속에 익숙해진다 생각했지만, 그날의 0.05%는 익숙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건··· 흔적이야.”


누군가 계산기를 두드릴 때, 아주 약간 손을 떨었던 것처럼 — 그것은 흔적이 아니라 의도였다.


3년 전부터, 7개의 프로젝트. 그리고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세 개의 법인. 하지만 그녀의 눈은 놓치지 않았다.

동일한 패턴. 동일한 방식. 동일한 결론.


“숫자는 조작할 수 있어. 하지만 진짜 숫자는 숨지 않아.”


다니엘은 한국에서 유학 와서 MBA를 받고 이민 온 지 20년이 넘었다.

화려하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성실하게, 조용히, 묵묵히 올라왔다.

하지만, 그녀 위의 사람들은 — 비키, 오터림, 그리고 그들의 이름 없는 내통자들 — 늘 동양계 여성을 과소평가했다.


오터림은 처음 와서 말했다.

“난 ‘구조적 비효율성’을 싫어합니다.”

그 말은 곧, “내가 데려온 백인 남자들을 믿고, 너희는 이제 필요 없어.”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다니엘은 알고 있었다. 이 회사의 진짜 구조는, 비밀로 가득 찬 부패였다.


거짓 인보이스, 허위 프로젝트, 가공된 커미션. 그리고 그 뒤엔 정부 투자기관 ‘InQComm’과의 미심쩍은 계약.


그녀는 장부를 닫았다. 아니, 닫는 척했다.

하드디스크 깊은 곳에, 비밀 파일 하나가 생성되었다.

Judgment_001.xlsx


그날 밤, 그녀는 칼트레인 막차에 올랐다.

창밖엔 어둠뿐. ‘Sunnyvale’이란 말이 무색했다. 하지만, 그녀는 웃었다.


“어둠 속에 숨는 건 내가 아니라, 그들이지.”


그녀는 피를 흘리지 않을 것이다. 대신 숫자로. 조용히.

그리고, 완벽하게.


제1장: 조용한 이상 징후


다니엘은 오늘도 8시 5분, Sunnyvale 역에서 Caltrain에 올랐다.

눈앞엔 익숙한 회계 파일 대신, 지난밤 새벽까지 비교했던 숫자들이 떠올랐다.

어딘가 이상했다. 어딘가, 아주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조작된 흔적이었다.


그녀가 다니는 회사 이름은 ‘마스텔리스’.

샌프란스스코에 위치한 하이텍크, 위성 데이터 회사였지만, 재무팀은 극도로 보수적이었다.

월마감, 분기마감, 감사자료··· 그저 반복되는 루틴일 뿐이었다. 다니엘은 늘 그 안에서, 자기 몫을 성실히 해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번 달, 몇몇 거래처에 대한 AP 처리 내역이 다니엘의 눈에 걸렸다.

금액은 항상 기준치 바로 아래. 그리고 항상, '셔론 팔란텔라'라는 업체와 연결되어 있었다.


셔론 팔란텔라. 존재하지 않는 회사였다.

다니엘은 내부 시스템에서 이 회사의 세금 ID를 추적했다.

허공에 입력된 숫자 하나. 법인 주소는 사라진 창고 건물. 계좌이체 내역은 캐리비안의 어느 은행.


“누가 이걸 세팅했지···?”


그 순간, 다니엘은 오래된 통화 기록 하나를 떠올렸다.

입사 초기, 전 CFO가 남긴 메모. 그리고, 그와 함께 밀려난 사람들.

그 중심엔 현재 임시 CFO, 오터림이 있었다.

그는 현재 CEO 스탠퍼드 동창으로 전 팔란텔라의 CFO였다.

팔란텔라에서 데려온 사람들로 조직을 다시 짰고, 그 안엔 비키가 있었다.

하바드 사회학과 출신의 HR 총괄, 젊고 똑똑하며 오만했다.


비키는 리크루팅부터 통제했다.

회계팀, AP팀, 심지어 재무분석 인턴 채용까지 — 동양인은 없었다.

아니, 고의로 제외됐다. 다니엘은 눈치챘다. 그것이 ‘우연’이 아님을.


“그래. 이건 시작일 뿐이야.”


그날 오후, 다니엘은 점심을 핑계로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Embarcadero를 따라 걷다가, Bay Bridge가 보이는 벤치에 앉았다.

도시의 소음 속에서, 그녀는 조용히 다짐했다. 이 판을 — 숫자로 뒤엎겠다고.


폭로도, 고발도 아니었다.

다니엘은 회계사였다. 증거를 모으고, 분석하고, 정리해 간다. 누구도 의심하지 못하게. 누구도 피해 갈 수 없게.


장부는 그녀의 무기였다. 그리고 숫자는 진실을 향한 좌표.


그녀는 그 벤치 위에서, 첫 장의 메모를 시작했다.


‘Altavia 거래 내역부터 재검토 — 송금 주체: 비키. 승인: 오터림.’


작은 노트 한 장이 펼쳐졌다. 조용한 혁명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예고편:

〈제2장. 낯선 관찰자〉

새로 부임한 CFO 오터림, 그리고 그가 이끌고 온 낯선 얼굴들.

그들의 말 없는 시선, 불친절한 대화, 그리고 감춰진 조직 재편의 시그널.

다니엘은 그날의 회의실에서 처음으로 ‘위험’의 냄새를 맡게 된다.

"조직은 변할 겁니다. 그 변화를 따라올 준비가 되어 있길 바랍니다."

그 말은, 곧 누군가 사라질 거라는 예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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