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빛, 사랑》그는 내 마지막 연애였다

두 번째 빛의 색: 달빛처럼 조용한 마지막 사랑

by J이렌

•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단단한 사랑

• 가장 아름다웠기에, 가장 아픈 이별


1화. 매칭률 96.8%


2035년 6월,

정하는 감정 분석 매칭 시스템 ‘L.A.I.L’에게 마지막 연애를 의뢰했다.

“사랑은, 이젠 더는… 못하겠어요.

이게 마지막이어야 해요.

그러니까 진짜였으면 해요.”


며칠 후,

그녀는 한 줄짜리 분석 리포트를 받는다.


“적합 매칭 대상 1명 발견.

감정 일치율 96.8%

단, 리스크 수치 경고:

상대방의 생체데이터상,

잔여 생존 가능 시간 176일 추정.”



정하는 리포트를 몇 번이나 읽었다.

‘사랑할 수 있는 시간, 단 176일.’

정확한 죽음의 예고는 아니었다.

하지만 ‘추정’이라는 단어는 너무나 정확하게 들렸다.


그날 밤, 정하는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이 사람, 꼭 만나야 하나요?”

“그렇다면 당신은 후회하지 않을 연애를 하게 됩니다.”

– 라일


이로를 처음 만난 건, 맑은 날이었다.

생각보다 키가 컸고, 유난히 맑은 눈을 가졌다.

죽음과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선,

오히려 가장 생기 있는 향기가 났다.


정하는 되묻고 싶었다.

“이 사람… 진짜 죽을 사람 맞아?”


하지만 그 질문은, 라일에게도, 그에게도 묻지 않았다.

그날 그들은 함께 커피를 마셨고,

서로의 숨소리를 듣는 데 많은 시간을 썼다.

불필요한 말은 없었다.


그의 마지막 사랑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정하의 목을 조이는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의 마음을 천천히 따뜻하게 데우고 있었다.


“당신은… 왜요? 왜 마지막이길 원한 거죠?”

– 이로의 물음에

정하는 답하지 않았다.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그녀는 생각했다.

모든 것은 그 176일 안에 담겨 있을 테니까.


사람들은 왜 ‘처음’을 기억할까.

정하는 생각 했다.

아마도, 마지막을 몰랐기 때문일 거라고.

그런데 자신은 지금,

‘마지막’을 알고 시작한 연애를 하고 있었다.


그날은 비가 왔다.

도시의 모든 소리가 눅눅해지고,

우산 아래 두 사람만 선명해지는 밤.


정하는 이로의 손을 잡고,

골목을 천천히 걸었다.

말없이, 발맞추며.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우리, 이런 게 연애였어요?”

“응. 나는 지금 처음 배워.”


이로는 고개를 들어 정하를 봤다.

표현이 서툰 눈동자,

하지만 확실한 감정이 머물던 그 시선.

정하는 그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비에 젖은 그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


“나는 지금 이 시간이 너무 아까워.

하루가 일 분처럼 지나가.”


그 말에 이로는 정하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젖은 셔츠 너머로 전해지는 체온.

서로를 마치, 하나의 생명처럼 끌어안았다.



그날 밤, 둘은 처음으로 정하의 방에서 함께 잠들었다.


불 꺼진 작은 방.

창밖엔 아직 비가 내렸고,

그들의 숨소리만이 조용히 방을 채웠다.


“정하.”

“응?”

“다음 생에 또 나 찾아줘.”


정하는 대답 대신 이로의 손을 꼭 쥐었다.

긴 숨, 느린 심장.

그리고 아주 작은 속삭임.


“이번 생에도 결국 널 찾아냈는걸.”


첫 만남 이후, 정하와 이로는 특별한 말을 나누지 않았다.

시간은 사치였고, 침묵은 배려였다.

그들은 매주 수요일 오후, 같은 카페에서 마주 앉았다.

서로에게 다가가지 않으려 애쓰면서, 동시에 더 깊이 스며들었다.


어느 날, 이로가 말했다.


“나를 좋아하지 마요.

나는 당신을 오래 볼 사람이 아니니까.”


정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좋아하지 않을게요.”

“대신, 사랑할게요.”


그 말에 이로는 처음으로 정하를 쳐다봤다.

그녀의 눈은 슬프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했다.

이미 이별을 체념한 사람의 눈.



176일은 의외로 빠르게 흘렀다.

정하는 카운트를 세지 않았지만,

몸이 먼저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기침이 늘어나고, 숨이 가빠지고,

목소리가 점점 낮아질수록.


어느 날,

이로가 쓰러졌다.

정하는 그를 병원까지 업었다.

땀에 젖은 그의 머리칼이 뺨을 스쳤을 때,

그녀는 깨달았다.


“이 사람은 지금,

내게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주고 있는 거구나.”


그 순간, 정하는 모든 두려움이 녹아내리는 걸 느꼈다.

이별을 예약하고 시작한 연애지만,

그 안엔 어떤 시작보다 진실한 감정이 있었으니까.



Emotion Credit


우리는 서로를 고르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배정되었다.

그래서 그 사랑은 처음부터 운명이었다.

끝이 보이는 연애라 슬프냐고?

아니, 그래서 더 귀했다.

한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단단한 감정은,

끝을 알면서도 시작하는 용기다.

슬펐지만 아름다웠다.

사라질 걸 알았기에, 더욱 깊어졌다.


– 감정코드 L-042, 정하의 174일 연애 중 가장 따뜻했던 밤



죽음 앞에서 사랑은 말을 잃는다


병실 창밖으로 오후 햇살이 길게 들어왔다.

이로는 창가에 기대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정하가 사 온 작은 스피커가 놓여 있었다.

그날따라 틀어놓은 음악은 아주 느린 첼로 곡이었다.

말없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둘은 그 자리에 있었다.


정하는 병실 의자에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별이란 말을 꺼내는 순간,

모든 게 현실이 될 것 같아서.


“무슨 생각해요?”

이로가 먼저 말을 걸었다.


정하는 창밖을 봤다.


“당신 없는 계절에 대해.”


그는 웃었다.


“그 계절도, 아름다울 거예요. 당신이 있으니까.”


정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절대 그 계절을 아름답다고 기억하지 않을 거야.

난 당신이 있었던 계절만 기억할 거니까.”



며칠 뒤, 이로는 말이 줄었다.

눈빛이 무거워졌고, 손끝이 차가워졌다.

정하는 자주 그의 손을 감쌌다.

작은 보온팩처럼, 아무것도 못 막지만 그래도 놓지 않았다.


어느 밤, 이로는 마지막으로 정하의 손을 잡고 말했다.


“사랑해요.

사랑해서, 떠나야겠어요.”


정하는 웃으며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 말을… 평생 기다렸던 것 같아.

듣자마자, 잃게 될 줄도 모르고.”


그 밤 이후, 그는 잠들었다.

다시는 깨지 않았다.



며칠 후, 정하는 그의 마지막 메시지를 받았다.

자동 전송으로 예약된 단 하나의 메일.


“정하.

나를 울게 하지 말아요.

당신의 눈물이 나를 이 세상에 붙잡아요.

나는 기꺼이 가지만,

당신은 기꺼이 살아줘요.

끝까지 사랑해 줘서 고마웠어요.

당신은 내 인생의 마지막,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에요.”



Emotion Credit


나는 그를 사랑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죽음 앞에서도 절대 작아지지 않는다는 걸

처음 알게 해 준 사람이었다.


그가 남긴 건 슬픔이 아니라—

내가 다시 사랑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 감정코드 L-043, 정하의 마지막 연애 기록에서


4화. 사랑은 결국, 기억으로 남는다


장례식장은 작고 조용했다.

정하는 사람들이 떠난 뒤에도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슴 위에 작은 편지 한 장을 올려놓고.


그가 생전에 남긴 손편지였다.


“정하.

내가 만약 이 세상을 떠난다면,

부디 슬픔 속에 나를 두지 말아 줘요.

나라는 기억을, 당신의 행복 안에 넣어주세요.

다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다면,

나를 두 번 죽이는 일이니까.”


그 문장은 마치 유언 같았고,

정하는 그 말대로 살기로 마음먹었다.


몇 주 후, 그녀는 평소처럼 기억 보관소를 찾았다.

하얀 셔츠를 입고, 단정한 정장을 입은 채.


“기억 저장이 아니라, 삭제 요청이에요.”


시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삭제 전 확인하시겠어요?”


정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 사랑은…

이제 제 안에서 영원히 꺼내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기억 저장 장치를 내려놓고 조용히 돌아섰다.

누군가는 그렇게,

사랑을 간직하는 방식으로 이별을 선택한다.


그의 이름은 이로였다.

그녀의 계절은, 이제 끝이 났다.



Emotion Credit


사랑은 결국 기억으로 남는다.


그리고 어떤 기억은—

절대 다시 꺼내지 않아도,

가슴속에 살아남는다.


– 감정코드 L-045, 잊지 않는 사람들의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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