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에 대하여.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감상은 어디에서 올까?

by 바라문다

'무제'를 대하는 자세


현대 미술전시 관람을 가면 심심치 않게 만나는 '무제'.

돌이켜보면 상대하기 쉽지 않은 '녀석'을 대하는 나의 자세는 오랜 시간 동안 천천히 변해왔다.

어려서부터 미술과 나는 떼어놓을 수 없다는 나만의 압박감 때문이었는지 '무제' 앞에서 나는 바짝 긴장하곤 했다. 그리고 겉으로는 되려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며 작품을 해석해보려 고군분투하기도 했다.


언제부턴가는 마치 같이 놀고 싶은데 무리에 끼워주지 않는 친구들의 비밀 얘기처럼 느껴졌다.

산업디자인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무렵 나 혼자 '무제'에게 삐져서 현대미술 작가들에게 화살을 돌렸다. (물론 아직도 일정 부분 혼자 화나 있는 부분도 많다.)


내가 '무제'와 대면했을 때 스스로를 긴장하게 만들었던 이유는 뭐였을까?

돌이켜보면 그건 작가의 의도를 시험문제를 풀듯 추리하는데서 왔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작품 해설을 읽으며 정답을 맞혔다며 좋아하기도, 틀렸다고 시무룩하기도 했던 경험.

(물론 작품 해설조차 찾을 수 없어 오답체크 마저 허락해주지 않는 불친절한 경우도 많다.)





'제한된 정보 속에서 발현되는 뇌의 폭풍'


이런 나에게 '무제'를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된 계기가 있기는 했다.

대학 시절 산업디자인을 전공했지만 순수 예술적 스토리텔링에 관심이 많았다 보니, 형상 자체보다는 컨텍스트와 스토리에 집중을 많이 하는 편이었다.


그때는 디자인 스토리를 짜고 아이디어와 연결시키는 게 얼마나 재밌었는지.

수업을 마치면 학교 근처 카페에 에서 커피 한잔을 시키고 친구들과 몇 시간이고 디자인 아이디어를 구상했다. 우리는 나름의 규칙이 있었다. 한 사람의 아이디어를 먼저 핑퐁 하며 좋은 디자인을 끌어낸 뒤에야 다음 사람 차례로 넘어갔다.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는 대부분의 상황은 이러했다.


일단 처음 아이디어를 발제한 사람이 러프한 아이디어를 어느 정도 설명한다. 설명의 순서를 1-5단계(큰 틀을 시작으로 점점 구체화하며 설명)로 나누자면 초반 1, 2 단계쯤을 설명하고 있을 때쯤에 아이디어가 가장 샘솟기 시작한다. 서로 말을 끊어가며 아이디어들을 마구 쏟아내는 시점이다.

그런데 초반에 별 리액션 없이 4~5단계까지 설명이 지나간다면 아이디어의 외침이 현저히 줄어든다. (물론 말을 끊지 않기 위해 모든 단계를 다 듣고 얘기하는 경우도 있다.)


사실 이 방법은 실제로 나중에 배우게 된 디자인 방법론 '고든법'이다.

디자인 과정에서 진행자는 최종 디자인할 카테고리나 제품군을 알고 있되, 같이 브레인스토밍을 진행하는 팀원들은 디자인해야 할 제품을 추상화한 형용사 등으로만 전달받으면서 기존 시장의 제품에서 오는 스테레오 타입을 거르는 방법이다.


즉 아이디어를 구상하는 뇌의 폭풍을 위해서는 결론적이고 구체화된 이야기보다 추상적이고 느낌적인 느낌만 전달하는 게 이상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뇌의 폭풍은 뒤에서 말하게 될 적극적인 감상과의 연결고리가 된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감상'


이는 디자인뿐만 아니라 시와 영화, 공연 등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창작과 예술작품에 적용된다.

추상화될수록, 즉 보는 이에 따라 작품이 지루하고 도통 창작자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지 모를수록(마치 이 글처럼?) 그로 인해 생긴 빈 공간에는 감상자의 생각과 경험이 담기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독립영화를 볼 때 많이 느끼는 감정이다.)


감상자의 평소 감성 여부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누구든지 그날의 나에 따라 나의 경험과 생각이 담긴 감상을 통해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을 수 있지 않은가. 나는 이를 작품의 '능동적인 감상'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반대로 자극적인 드라마나 영화는 '수동적인 감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


수동적인 감상이라는 말을 경험으로 느껴보자. 영화관에서 나오자마자 스펙터클한 총격씬과 특수 효과를 얘기하며 3D 기술력에 감탄하는 것도 물론 수동적인 감상이겠지만, 이는 앞서 말한 얘기보다 좀 더 피상적인 차원이다.


우리가 울고 웃으며 감정이 큰 폭으로 오르내리는 영화를 봤을 때는 '능동적인 감상'으로 느낄 수 있지만, 그런 경우일수록 더욱 자극적인 영화일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자극이 큰 영화'란 감상자에게 다양한 생각의 틀을 만들 기회를 만들어 주지 않음을 뜻한다. 그저 영화감독이 의도하는 대로 눈과 귀를 마비시키고 자연스럽게 뇌 의식도 그에 따라간다. 나의 생각이나 상상력이 영화와 만나는 교차점을 만들지 못하게 한다. 이는 영화의 모든 것이 너무나 정교하고 구체적으로 제시됨으로써 감상자는 그저 수동적인 감상밖에 못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와 같은 대중예술(영화는 물론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다)에서 소위 '그들만의 리그'라 불리는 예술로 시선을 옮겨보자. 예술에서는 구체적이고 결과론적인 자극이 낭떠러지처럼 뚝 떨어진다.

대중예술이 감상자의 생각과 감정의 흐름이 자연스레 직진하게 만드는 고속도로라면 현대미술은 그 이정표가 없는 광활한 대지와도 같다. 현대미술은 감상자에게 일률적이고 똑같은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온 경험과 배경에 따라 모두가 다른 감상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내가 혐오했던 '무제'가 왜, 그리고 어떤 과정 속에서 탄생했는지 그 과정을 천천히 같이 걸어보는 과정이다.




'푼크툼'과 '스투디움'


이쯤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작가의 의도는 감상에 있어서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예술 공부가 아닌 감상이라는 측면에서는 말이다. 수능 언어 영역에는 문학 작가의 의도를 맞추는 문제들이 많다. 그런데 실제로 작가 인터뷰에서는 정답으로 규정된 작가의 의도를 작가 자신도 생각치 못한 부분이라고 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있지 않은가.


이런 개념을 정의한 단어들이 있다. '주관적 해석'을 뜻하는 말이 바로 '푼크툼'이고, 반대로 '스투디움'은 작가의 의도대로 그대로 감상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감상은 '푼크툼'을 먼저 느낀 후에 작가는 어떻게 생각하고 의도한 작품인지 들어보며 풍부한 감상을 하는 것이다.




'감정의 파동'을 주기 위한 기회


이쯤되면 작가들이 '느낄 수 있으면 느끼고, 아니면 말고'라는 식의 다소 무책임한들을 내뱉을 수 있는 이유도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는 없겠지만 자극적이고 메시지가 강한 영화는 비교적 나의 경험과 생각들이 대입되기 어렵다. 설령 그렇더라도 뜬구름처럼 커다란 개념 정도일 뿐(어쩌면 너무 당연한 이야기들)이며 쉽게 결론이 난다.


그리고 '제대로 된 감상(적극적 감상)'은 그 감상자가 설령 저명한 미술평론가이라 할지라도 항상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감상이라는 것이 작업에 대한 사회적, 물질적 가치를 매기는 것이 아니라 감상자의 마음에 잔잔한 파동을 주는 것이 맞다면 말이다. 떨어지는 낙엽이나 아름다운 노을을 본다고 항상 감정의 파동이 오는 것이 아니듯이 모든 창작물은 언제 어떤 사람에게 감동을 줄지 모른다.


3년 전에 전시회에서 감상하는 '척'하며 지나갔던 작업을 언젠가 다시 봤을 때 깊은 감동을 느낄수도 있다.

감상이라는 것은 감상자 개개인의 경험과 또 작품을 보게 된 시점으로부터 가까운 기간의 감정, 그리고 그날의 기분 등에 따라 달라진다.


그렇기에 특정 미술품을 보고 감동을 느끼고, 생각의 깊이를 증폭시킬 수 있는 것은 원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현대 미술작가들은 사람들에게 이런 기회를 제공하는 것일 뿐이다.

기회들을 열어놓고 적극적으로 감상해야 하는 것은 감상자이며, 작가는 오히려 소극적인 자세를 취한다.


이렇게 복잡하고 정의내리기가 어려운 예술이기 때문에 돈이나 명예 등에 따라 많이 좌우되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한 건 '진짜' 예술가는 사람들의 감성과 생각의 증폭제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유명한 작품이라고 해서 억지로 감상하려 하거나 작가의 의도를 맞추려고 하지 않고,

그저 '주변의 단풍과 노을과도 같은 하나의 매개체구나.'라고 느끼며 가벼운 마음으로 편하게 감상해보길 바란다. 노을과 단풍에 얽힌 개개인의 추억과 감상이 다르듯이 작품에도 일률적인 해석이 대입될 필요는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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