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11일 목요일
감기가 도무지 떨어지질 않았다. 한동안 감기에 걸린 적이 없고, 또 이렇게 오랫동안 앓아 누운 적도 없어서 마음이 점점 더 초조해졌다. 한창 '뭔가' 하고 있어야 하는데 감기 때문에, 내가 아파서 이게 더뎌지면 어떡하지 하는 고민들이 계속 들었다. 하루는 자다가 누가 나에게 종이로 만들어진 인형으로 커뮤니티를 만들라고 시키는 꿈을 꿨다. 그냥 웃고 깼으면 되었는데, 그날 밤 내내 나는 입도 없고 스스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얘네들로 어떻게 커뮤니티를 만들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렇게 꿈인듯 아닌듯한 것을 지나가고 나서야 내가 진짜 쉬어야 하고, 부담을 좀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몸이 안좋으니 멘탈이 안좋아지고, 계속 다 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이어졌다. 그동안 스스로의 '회복탄력성'이 내 강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것은 내 기질이 아니라 건강한 몸에서 나오는 것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렇게 딱 일주일이 지나고, '이제 진아님의 에너지로 점점 돌아오고 있어요.'라는 말을 동료들에게 들을 만큼 회복했다.
오늘은 아침부터 미팅이 있었다. 요즘 하는 일은 대부분 빌라선샤인의 시즌1에서 우리 멤버들이 만날 사람들, 논의할 주제들,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정의하는 일이다. 아침 미팅에서는 입주설명회에 오실 스피커분을 만났고, 사전미팅은 예상보다 더 좋았다. 위대한 누구가 아니라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을 레퍼런스 삼아서 함께 잘해보기. 친구의 경험을 내려치지 않기. 부정적인 언어로 빨려들어가지 말고 상황을 전환할 수 있는 말로 상황을 반전시키기. 내게 남은 시간을 더 여유있게 생각하기. 빌라선샤인이 좋은 커뮤니티가 되면 안에 담길 좋은 경험들이 그대로 대화 안에 담겨있었다. 이런 미팅을 하고 나면 고마운 마음도 들고 안심이 된다. 아직 아무것도 명확한 것이 없는 상황에서 지금 그대로 조금 더 가봐도 좋다는 신호를 만난 기분. 오늘도 그런 기분으로 동료들과 망원동 길을 걸어 사무실로 돌아왔다.
사무실에 와서 몇 가지 결정을 하고, 한 번의 미팅을 더 했다. 하고자 하는 일은 다르지만 처음 생각이 비슷했던 그룹과의 만남. 얘기를 하다가 여성 기술자들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용접을 하는 기술자들은 기술에 따라 급이 나누어져 있는데, 조선소에서 일하며 가장 상위의 기술을 가지고 있는 기술자들은 여자에게 자신의 기술을 물려주지 않는다고 한다. 그 피라미드 끝까지 가는 여성이 없을 뿐더러, 있더라도 여성은 기술을 가질 수 없다. 이것은 비단 여성이 가지지 못하는 기술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이것이 만드는 사회 속에서 사라지는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디 조선소만 그럴까. 보이지 않는 네트워크 안에서 은근히 내려지는 기술과 도구들, 지혜들, 어쩌면 그 존재가 뭔지도 모를 어떤 것들이 전해지고 이용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설령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해도, 아주 오랫동안 나와 여성 동료들은 이 결과가 내가 정보가 없기 때문인지, 실력 부족 때문인지를 고민하는데 에너지를 들여야 하는 구조 속에서 일해야 할 것이다.
그런 얘기를 나누다가, 헌법재판소가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를 선고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작은 사무실에 모여있던 다섯명의 여성이 같이 기뻐했다.
"이렇게 좋은 날 만나서, 회의를 하다가 소식을 같이 듣네요."
오늘 처음 만난 사람들과 같이 기뻐하고는 좀 어떨떨했지만, 이게 처음하는 경험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안희정 2심 결과가 나오던 날도 그랬으니까. 다 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날들의 끝에 겨우 찾아와준 이런 소식들 덕분에 회의를 하던 누군가와, 집회 자리에서 만난 모르는 여성과, 서로 가는 길을 묵묵히 보던 친구들과 축하하고 겨우 다음으로 갈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어쩌면 이런 일들이 계속 이어지는 지난한 삶이겠지만 그래도 다 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될 어느 날, 오늘이 기억났으면 좋겠다. 여성에게 기술을 물려주지 않는 남성들이 존재하지만, 여성이 시민이고 나답게 살아가며 사회와 관계 맺을 수 있는 존재인 한 언젠가 최고의 기술을 가진 여성이 등장하고 그로 인해 기술이 누구에게나 전달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아주 느리지만 나아가고 있는 세상을 경험하고, 그 힘으로 세상을 좀 더 밀어보는 것이 여성들에게 중요한 이유다. 그리고 이건 눈으로, 감으로 확인할 수 있는 존재들에 의해 더 힘이 세진다.
드디어, 봄. 다 꺼졌으면 좋겠는 마음을 에너지로 삼아 봄을 기다렸다. 그동안 '커뮤니티가 뭐라고 생각하세요?'라는 물음에 '개인이 가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최소한의 단위요'라고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빌라선샤인은 지금 내 옆에 있는 동료 여성들과 함께,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의 문제에 대해 얘기하며 나아가고 있는 세상을 경험하고, 그 힘으로 세상을 좀 더 밀어보려고 한다.
감기가 거의 나았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