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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cques Aug 12. 2022

<욕망의 모호한 대상> (1977)

Cet obscur objet du désir

어린 시절 누군가 한번쯤은,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 이유엔 여러가지가 있을텐데요. 제 이유 중 하나는, "18세미만 관람불가"인 영화들을 마음껏 볼 수 있다는 점이었어요. 애절한 느낌 가득한 영화 포스터 아래에 "미성년자 관람불가"라는 마크가 붙었을 때 안타까움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고, 대학생이 되자마자 저 영화들을 봐야겠다고 다짐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나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셰익스피어 인 러브> 등이 바로 이 애절한 포스터로 저를 사로잡은, 18세이상 관람가에 해당하는 영화들이였구요. (셰익스피어 인 러브는 고등학생 때 EBS 세계의 명화로 미리 보긴 했습니다만 ㅎㅎ) 그리고 아무래도, 대부분의 예술영화들에는 그 난해함과 기괴함으로 인해 18세 딱지가 많이 붙었었는데요.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지금은 추억의 뒤안길로 사라진 극장 코아아트홀에 걸렸던 포스터들을 보면서 무척이나 신기해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중의 한편이 바로 <욕망의 모호한 대상> 이었어요.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한 그 이름, 루이스 브뉘엘 감독의 이름을 처음으로 듣게 되었고, '욕망'이라는 단어 자체가 저에게는 금기시되면서도 자꾸만 떠올리게 하는, 금단의 영역이었습니다.



성인이 되어서 본 이 영화는, 생각보다 해석하기 쉽지 않으면서도 여러모로 흥미로운 작품이었습니다. 영화의 도입부, 같은 기차칸의 승객들에게 마테오가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풀어놓는 장면에서는 톨스토이의 소설 <크로이처 소나타>가 저절로 떠올랐구요. 가장 흥미로웠던 건, 두 여배우가 콘치타라는 여주인공을 동시에 연기하고 있다는 점이었어요. 시대나 나이가 다른 것도 아니고, 동일한 인물인 어쩔 땐 이 사람이 되었다가 저 사람이 되도록 설정함으로써, 욕망이라는 것이 얼마나 자의적이고 주관적인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이 영화에서처럼, 외모가 완전히 달라지는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더라도, 우리도 살다보면 누군가를 만났을 때 이 사람이 정녕 내가 알고 있던 그 사람이 맞는지 혼동하는 경우가 적지 않지요. 인격이나 말투가 달라졌거나, 인상이 달라져서 오히려 기시감이 사라지게 되는데요. 특히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다면, 매일매일이 새롭고 나의 눈에 드리운 눈꺼풀로 인해 더 이상의 객관적인 평가는 불가능해지죠. 욕망도 우리의 이성적인 판단을 한순간에 붕괴시켜 종잡을 수 없게 만드는 데요.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도 이성에 이끌리는 욕망을 주체할 수 없는 마테오의 눈에 비친 콘치타는 언제나 다른 모습이었겠지요.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시대적 배경입니다. 이 작품은 본래 1898년 발표된 프랑스 작가 피에르 루이스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영화는 1960~70년대로 배경을 옮겨 극좌파 테러집단으로 인해 혼란이 가중되던 스페인과 프랑스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습니다. 주인공들의 욕망이 그렇듯이, 당시의 정치적 불안도 한치 앞을 예상할 수 없었고 영화 초반부 세비야에서 발생한 자동차 테러는 마테오와 콘치타의 관계 역시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게 될 것이라는 걸 암시하고 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음악이 등장합니다. 아케이드의 한 상점에 발길이 멈춘 마테오와 콘치타. 라디오에서는 테러의 긴박함을 전달하기 바쁘고, 아나운서가 잠시 기분전환을 위해 음악을 틀겠다고 합니다. 기분전환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엄숙한 오페라의 아리아가 들려오기 시작하는데요. 이 장면에 등장하는 오페라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연작 중 두 번째 작품인 <발퀴레>로, 서로가 쌍둥이인지 모르는 지그문트와 지클린테의 사랑이 줄거리의 한 축으로 전개되는 작품이지요 (말 그대로 한 축일 뿐, 이 오페라는 매우 복합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둘의 관계는 불륜이자 근친상간으로 요약될 수 있을 텐데요. 오페라의 1막에서 지그문트가 먼저 "Winterstürme wichen dem Wonnemond(겨울 폭풍은 사라지고)"를 부른 후, 지클린데가 지그문트에게 "Du bist der Lanz(그대는 나의 봄)"이라고 이어 부르면서, 서로에 대한 헌신과 사랑을 확인합니다. 콘치타와 마테오 사이의 끈질긴 욕망을 생각해 봤을 때, 더 없이 적절한 선곡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https://youtu.be/sn1_Esqj53c


위의 영상을 끝까지 보신 분들은 (스포 주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예상치 못한 한방에 크게 놀라셨을  같은데요. 사회적인 불안도, 우리의 욕망도 종국에는 모든 것을 파멸로 이끄리라는 섬뜩한 경고는 쉽게 머리 속을 떠나지 않을  같습니다.  계속 미뤘던 라캉의 욕망이론을 들춰보기라도 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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