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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크슈타인 Jun 26. 2024

부조리한 세상을 대하는 삶의 자세

스데롯 극장의 VIP석에서


세상이 부조리로 가득하다.


거대한 관념적, 기술적 틀로 보자면 인류는 지속적으로 발전해 왔다고 한다.  20~35만 년 전에 현생 인류가 출현한 뒤 마지막 빙하기를 지나 기원전 1만 년 전후로, 집단거주를 했던 정주의 형태와, 농경 및 목축이 시작되었고, 인류는 소위 ‘문명’이라는 것을 일구기 시작했다.


그 뒤로 철기의 사용에서 시작해 창칼과 활, 화약과 같은 도구와 무기의 발달, 사회체제의 고도화, 항해술의 발달,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촉발된 산업혁명과 작금의 AI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발전이었는가. 자유롭게 산천에서 수렵채집 활동을 통해 과일과 열매, 생선과 고기를 먹으며 살았던 시절에는 계절에 따라, 혹은 사냥의 성공 여부에 따라 배를 곪는 날들도 있고 불규칙한 환경에 적응하고 버티며 사느라 힘든 점도 많았겠지만, 고대의 그 사람들이 현대인보다 ‘지유’를 더 누리지 못했다고 볼 수 있을까. 누가 더 속박 속에 살고 있는 것일까.


농업혁명이야말로 인류를 영원한 노동의 굴레에 속박해 버린 시작점이었고, 체계화, 시스템화된 종교는 서로 다른 ‘신’을 믿는다는 이유로 그 어떤 원인보다도 더 많은 시람들을 서로 배척하고 학살해 왔으며, 기술의 발달과 대량생산으로 물욕에 눈이 어두운 욕망의 화신들은 그 알량한 문명을 명분으로 스스로를 문화인으로, 타 세계의 사람들을 야만인이나 동물로 취급하면서 마구 죽이고 노예로 부렸다.



그들의 땅과 자원을 빼앗고 자신들의 배를 채워 넉넉히 부유해진 그들이, 지금은 이제 와서 인권과 정의를 부르짖는 위선을 보이고 있다.  현재 개도국이나 후진국으로 불리는 제3세계, 아프리카나 중남미, 중동, 남아시아 등의 수많은 나라와 국민들이 극빈의 삶에 내동댕이 쳐지고, 혼란한 내정과 내전에 시달리고 있는 원인을 제공한 자들이 말이다.


역사를 공부하면 할수록, 무릇 인간세계의 역사 자체가 부조리와 내로남불로 점철되어 왔고, 역사의 승자는 바로 그런 것들을 잘해온 자들이 챙겨갔다는 점을 소름 끼치게 느끼게 된다.



거창하게 역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 사는 내 주변의 세상만 보더라도 크게 다를 바 없다.  결국은 파워 게임이고 우리는 다만 친구, 지인, 거래처, 고객.. 다양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신에게 필요하고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각각의 관계에 맞는 적절한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상대에게 파워가 있다거나, 내가 아직 얻어낼 게 있다거나 하는 그런 상황이라면, 상대방이 그 어떤 무도한 짓을 하더라도 내가, 우리가, 전 세계가 그냥 지켜만 본다.



비록 아직은 소수이더라도, 선의를 가진 사람들이 각자의 위치와 역할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내어 하나씩 하나씩 실천해 나갈 때, 세상은 아직 희망이 있나 보다.. 싶다가도, 이런 현살을 목도할 때마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하고 다시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게 된다.


하나하나의 그러한 작은 선의가 전파되어 거대한 파도를 이루고 강력히 힘을 받아 현실을 뒤바꿀 수 있기까지에는 너무나 많은 세월과,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요구되는 것 같다.  우리의 역사, 세계의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는 터.



인간의 무지와 무력함 때문에 신께 기대는 거라면, 신(들)은 왜 이다지도 많은 피와 고통이 질척이게 쌓여야만 역사하시는 것인가. 심지어 아무런 응답도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존재하지도 않는 신을, 마음을 기댈 허상의 관념으로 만들어낸 인간의 자업자득인 것일까.


무고한 시민들이 총칼과 미사일에 희생되건, 노동자들이 불법부당한 대우를 받고 작업장에서 죽어 나가던, 아이와 노인과 여성들이 잔혹한 학대와 갖가지 범죄에 당하고 있건 간에.. 세상은 그렇게 평화롭게 흘러간다.  우리는 브레이킹 뉴스 속 화면에 흘러가는 소식들에 놀라고 분노하면서도 그러한 충격에 익숙하듯 또 그렇게 영상을 소비하며 살아간다.  내 주변의 안전에 안도하며, 뉴스 속의 저들은 저 멀리 딴 세상 속의 일로 치부하며 그렇게 그렇게.



어떤 사람들은 한번 해보기도 힘든 대출을 손쉽게 여러 곳에서 몇십억씩 받는 사람들도 있고, 보통 사람들은 징역을 안 받더라도 기소만이라도 되거나 벌금형만 받더라도 일상을 위협받고 직장에서 잘리며 인생이 꼬일까 전전긍긍하게 마련인데, 어떤 이들은 대형로펌의 전관들에게 변호를 맡겨 소송을 밥 먹듯 하고 잦은 벌금과 징역에도 불사조처럼 당당히 살아간다.


‘강약약강’한 사람들이 득세하는 세상.  피해를 입은 당사자가 ‘강자’가 아니라면 진실은 드러나기 어려운 것이 현실. ‘약자’의 진실은 수면 위로 간신히 떠오르기조차 힘에 부친다.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실질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자들일수록 더더욱. 자신들의 부와 권력의 유지에 조금이라도 피해가 갈까 싶어 애써 외면한다. 신문과 방송은 심각히 연성화되어 쓰레기 같은 기사와 뉴스만 잔뜩 뽑아내고 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고뇌하며 한 팔의 힘이라도 보태려 노력하며 살아가야 할 것일까.  힘의 논리로 작동하는 세상을 살아내기 위해 열심히 힘을 키우는데 집중해야 하는 것일까.


전자가 아무런 의미 없는 몸부림일까.

후자는 무조건 나쁜 것일까.


답이 없는 세상..

어떻게 살아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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