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태(母胎)의 목소리

신의 아이를 밴 여인

by 송옥돌
**고대에는 아버지를 밝히기 어려운 임신을 신이나 초자연적 존재와 연결해 설명하곤 했다. 아마존 강 유역에서는 분홍돌고래 ‘보토’가 인간으로 변해 여성을 임신시킨다는 전승이 있으며, 그리스 신화에서는 제우스가 동물로 변신해 여인을 임신시켰다는 이야기가 반복된다. 미혼모나 성폭력 피해자들이 아이의 아버지를 제우스로 칭하며 신전에서 출산했다는 속설도 있다.


상상해 봐, 회갈색 돌벽으로 쌓아 올린 집이 빼곡한 마을에 살고 있던 너를.

떠올려 봐, 네 뱃가죽을 안쪽에서부터 자근자근 밟아대던 작디작은 발자국들을.

기억해 봐, 너는 신의 아이를 가졌어. 사실 그의 존재를 믿어본 적도 없지만.


아이의 아버지는 누군지 몰라. 올리브 농장의 첫째 아들이었나? 광장에서 젠체하던 철학자? 아니면 떠돌이 극단의 얼굴 흰 소년이었을지도 모르지. 어쨌든 네 안에선 다섯 개의 씨앗이 자라고 있어. 그보다 더 많을 수도 있겠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지만, 흰 수염에 빵 부스러기를 매단 치유사는 네 아랫배를 마구 만지더니 다섯이라고 확신해.


사람들은 열광해. 시집도 안 간 처녀인데 임신을 하다니! 하나도 둘도 아닌 다섯 생명을 한 몸에 품다니! 신의 아이를 밴 게 아니고서야 설명할 수 없는 일이지. 이건 천 년에 한 번 나타날 법한 상서로운 징조야. 하늘에서 내려온 축복의 증표야. 열 달이 지나면 성스러운 피가 흐르는 다섯 아들이 태어날 거야. 마을에 젖과 꿀을 흐르게 하고, 식탁에 술과 고기를 넘치게 하고, 온 세상에 복과 영광을 가져올 테지.


아무도 너에겐 관심을 갖지 않아. 출산하다 죽는 것 정도는 대수롭지 않은 세상이야. 강가를 함께 쏘다니던 소녀들, 참나무통에 담긴 포도를 신나게 밟던 친구들. 그들 중에서도 붉은 태반과 엉켜버린 탯줄을 매달고 스러진 이들이 많아. 온몸이 열린 채, 얼굴이 창백해진 채, 가족 모두가 쉬쉬하는 비극이 되어 죽어버린 여자들. 큰 도시에서는 의사들이 깨끗한 날로 배를 갈라 아기를 꺼내고 꿰매 주기도 한다지만, 거룩한 핏줄을 잇는 일에 이런 부자연스러움은 허락되지 않겠지.


배가 조금씩 불러올수록, 약속된 열 달 후가 가까워질수록, 숨 막히는 두려움이 차올라.


너는 죽을 거야.


몸 구석구석이 갈가리 찢긴 채 터져 죽고 말 거야. 운이 좋다면 핏덩이 같은 자식들을 세상에 밀어낸 채로 너는 잊힐 거야. 돌아가신 아버지 말대로 몸을 함부로 굴려서 받은 저주일까? 떨리는 손으로 짓무른 눈 주위를 꾹꾹 누르며 너는 후회해.




약속의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어. 절대자의 성은을 입은 여인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너는 마을 가장 깊숙한 곳으로 끌려가지. 눈부시게 빛나는 새하얀 신전 속, 차갑고 거대한 돌기둥이 받치는 방에 억지로 뉘어져. 매일 아침 사람들이 네 발밑에 기어와 둥근 배를 더듬으며 소원을 빌어. 눈물을 흘리며 축복을 구걸하는 자도, 저게 신이 탐한 여자인가 하는 호기심으로 너를 음흉하게 훑는 이도 있지.


널 영원히 괴롭힐 것 같은 숙취 같은 오심은 겨우 멎었으나, 이제 척추와 골반이 끊어질 듯 아파. 이상하리만큼 날것과 붉은 것이 먹고 싶지만, 부푼 아기집이 창자를 눌러 제대로 식사할 수조차 없지. 뚜렷하게 부른 배와 땡땡 부은 팔다리와 시꺼멓게 물든 겨드랑이와 빨간 벌레가 기어가듯 튼 피부. 세숫물에 비치는 수척한 모습이 보기 싫어 고개를 돌려.


달력이 한 장씩 넘어갈수록 창문 너머 환호는 커져가. 너는 살얼음 호수 위에 선 광대가 된 기분이지. 끔찍한 예언이 실현될 날을 얌전히 기다릴 수밖에 없는 무력함이 너를 덮쳐. 도마뱀처럼 몸을 잘라내고 도망갈 수는 없을까? 훌쩍 이 껍데기를 벗고 떠나버릴 수는 없을까? 네 육신이 네 영혼을 점점 조여와.


뒤척이던 어느 날 밤, 한 줄기 달빛에 눈을 뜬 너는 태어나지 않은 목소리를 들어. 뱃속에서 울리는 걸까? 아니면 머릿속에서? 킬킬거리며 울부짖는 수십 겹의 속삭임들. 네 몸을 양분 삼아 발아할 거라고. 너는 썩은 나무거죽처럼 버려지고 우리는 그 피를 빨아 새 생명을 얻을 거라고. 운 좋게 살아남는다 해도 그 순간부터 영원히 우리를 섬기게 될 거라고. 사지가 빳빳이 굳어. 뒷목에 싸늘한 한기가 돌고 관자놀이가 대바늘로 쑤시는 것처럼 아파와. 손가락을 까닥이려고 젖 먹던 힘을 다해 낑낑거릴 때, 어떠한 직감이 벼락처럼 너를 꿰뚫어.


이 악몽 같은 울림은 신성한 계시가 아냐.

네가 잉태한 그것들은 숭고함을 사칭한 악마.

수치스러운 자유를 볼모로 네 몸을 취하려는 악령.


깨달음과 동시에 꿈틀거리고 꾸물거리는 이물감이 찾아와. 배를 걷어차는 수많은 발자국. 두 개? 열 개? 아니면 수십 수백 수천 개? 발악하듯 점점 늘어나는 태동에 너는 터질세라 아랫배를 꽉 움켜쥐어. 제의 때 울리는 양가죽 북이 된 것처럼, 거센 발길질에 널 감싼 얇은 피복이 둥둥 울려. 네 팽팽한 살 아래 잡히는 이 통통한 조직은 다섯 중 누구일까? 네 피부 아래 숨죽이고 있지만 네 뼈도 내장도 아닌 이것은, 언젠가 널 찢고 나올 이것은 팔일까 다리일까 머리일까 혹일까.


너는 문득 살고 싶어져. 잡아먹히고 싶지 않아져. 순순히 속이 다 갉아 먹힌 숙주가 될 수는 없다는 결심이 서. 크게 고함을 질러. 보초들이 달려오는 기척이 들려. 재빠르게 침대 옆 은 물병을 치맛자락에 엎어. 무슨 일이냐는 물음에 양수가 터진 것 같다고 힘겹게 말하자, 그들은 문을 닫을 새도 없이 허둥지둥 산파를 부르러 뛰쳐나가지. 너는 그 틈을 비집고 빠져나가.




정처 없이 달려. 발바닥이 얼얼하게 감각을 잃고 폐에선 피 맛이 올라와도 어쩔 수 없어. 이러다 네 안에 자리 잡은 낯선 것들이 다 쏟아져 버린대도 오히려 잘 됐지. 너는 본능적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알아. 협곡 아래 숨겨진 오두막이 너를 불러. 돌과 가래침을 맞으며 쫓겨난 창녀. 가족 대신 미끈한 뱀과 산다는 괴물. 아기들을 잡아먹고 처녀들을 홀린다던 마녀의 집으로.


내리막 흙길을 구르고 쓰러진 나무를 기어 넘고 뾰족한 잎에 생채기를 입어가며 도착한 곳은 덩굴이 내려앉은 작은 통나무집. 문을 열고 나온 늙은 여인에게선 태운 찻잎과 향나무 진액 냄새가 나. 이 노파가 마을 사람들이 입을 모아 욕하던 그 악당인가? 어린이가 말을 배울 때가 되면 가장 먼저 들려주는 이야기 속 죄인인가?


그녀의 코는 휘었지만 눈빛은 형형해. 허리는 굽었지만 머리는 풍성해. 나이를 추측할 순 없지만 네가 아는 어떤 존재보다 더 긴 세월을 버텨온 건 확실하지. 파도에 닳은 자갈처럼 반들한 눈길이 너의 얼굴을 스치고 몸통에 가서 멎어. 보통 임산부보다 몇 배는 크게 부풀어 오른, 푸른 핏줄이 비치고 검은 배꼽이 튀어나온 너의 배.


네가 신의 아이를 가진 여자구나.

어떻게 아셨나요.

새들이 소문을 전해줬지.

다섯이 맞나요?

알 수 없는 일이며 하물며 중요하지도 않단다.

진짜 그의 아이가 맞는지 물어보실 줄 알았는데요.

네가 올 줄 알고 있었다.


노파는 말이 끝날 때마다 바람 빠진 소리로 웃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지겹게 반복되어 온 우스운 농담을 다시 듣는 것처럼. 네 배에 손을 얹고, 널 마구 헤집는 수만 갈래의 박동이 느껴지는 듯 고개를 끄덕이지. 그녀는 뒤돌아 너를 정원으로 데려가. 응당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언뜻 방치된 듯 보이는 뒤뜰에는 높은 풀이 무성해. 꺾이고 솟아나고 기어가고 흐드러지며 자란 알록달록한 식물들. 노파는 자기 몸보다 큰 잎들과 가시를 무심히 치우며 널 좁은 오솔길로 이끌지. 어디선가 쉬시식, 뱀의 비늘이 땅과 비벼지는 소리가 들려와. 소스라친 널 보고 그녀는 우렁찬 웃음을 터뜨려. 뱀은 우리의 친구이자 보호자란다. 뱀을 적으로 여기는 이들은 따로 있지. 미로를 척척 헤치고 나아가는 여자의 뒷덜미에 허물 무늬가 비쳐 보인다면 네 착각일까.


다 왔다는 말 없이도 다 온 걸 알 수 있어. 네 눈에 비로소 그 나무가 들어와. 가까이 가서도 떠올려서도 안 되는 위험한 즙을 뿜는 나무. 항구에서 쓰는 밧줄보다 두꺼운, 셀 수 없이 많은 뿌리들이 얽히고설켜 땅 위를 뒤덮고 있어. 네 시선이 거칠고 우람한 줄기를 따라 올라가던 찰나, 열매를 가득 매단 가지 하나가 악수를 건네듯 이마를 톡 치고 늘어져. 둥글고 검붉은 껍질. 익을 대로 익어 물러 터지기 직전의 향내. 혀뿌리와 볼 사이에 너도 모르게 신 군침이 고이지. 때늦은 죄책감에 손을 뻗기를 망설일 때, 노파의 목소리가 널 두드려.


중요한 건 하나뿐이지. 신의 목소리를 이을 것이냐, 네 목소리를 지킬 것이냐.


마녀의 속삭임을 듣고 너는 결국 그 열매를 따내. 최초의 아버지를 살해한 독약. 금기된 타락의 원천. 너의 죄악을 사해줄 성수. 크게 열매를 베어 물어. 농후한 단맛과 미묘한 소금기, 곧 느껴본 적 없는 고통이 찾아와.

네 안에 고여 있던 침입자들이 하나로 뭉쳐 필사의 몸부림을 쳐. 손끝과 발끝 얇은 혈관까지 펄펄 끓는 물이 퍼져나가는 듯 쓰라려. 타오르는 장작불 위에 올라선 것처럼 네 몸이 반으로 접히고 오그라들어. 격렬한 통증을 견디다 못해 아득하고 몽롱해질 때, 노파의 마른 손이 네 어린 어깨를 감싸. 견뎌야 해, 이겨내야 해, 신의 뜻을 거부한 불경하고 배덕한 삶일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가야 해.




일곱 시간이 지났을까, 일주일이 지났을까, 너를 매어두던 족쇄가 마침내 끊어진 걸 느껴. 꿀렁이는 찌꺼기가 비명을 지르며 다리 사이로 쏟아지지. 한 차례 작열감이 지나간 후 갑자기 찾아온 오한에 몸을 오소소 떨어. 넌 신성한 약속을 깼어. 다시 돌아갈 수 없지. 네 발치에 고인 붉은 웅덩이는 순결하지 못한 자라는 낙인. 그런데 입가에 떠오르는 이 미소는 뭘까? 해방감? 승리감? 드디어 미쳐버린 걸까?


너는 젖은 눈으로 노파를 바라봐. 마주한 눈동자가 말해줘. 그녀도 신의 섭리를 거스른 자라는 걸. 네 운명도 그녀와 다르지 않아. 평생을 비난에 쫓기고 모욕에 시달리며 보내야 할 수도 있지. 그러나 분명한 건 하나.


너는 너로서 살아남았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