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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Y Mar 06. 2019

우리나라 영어 교육은 죄가 없다

  얼마 전 드라마 <스카이캐슬>이 종영했다. 자녀의 의대 진학을 위해 몇 십억을 들여 전문 코디를 고용하는 상류층의 이야기는 인기를 넘어 ‘스카이캐슬 신드롬’을 몰고 왔다. 드라마의 인기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맹목적인 교육열에 대한 비판 역시 여기저기서 제기되었다.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에 대한 비판이야 비단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서열화와 경쟁을 부추기는 시스템은 교육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한국의 엘리트주의와 연관된 사회적 문제에 더 가깝다.

  하지만 전반적인 교육 시스템에 대한 비판과는 별개로 우리나라 영어 교육에 대한 비판은 항상 이보다 한 발 더 나아가 있다. 10년 넘게 공부하고도 영어 한마디를 못하는 영어 교육이라는 비판과 더불어 문법과 암기식 교육에 지나치게 치중한다는 비판이 주를 이룬다. 영어를 못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이른바 영어 고수들, 그리고 현직 강사와 교사마저도 앞다투어 한국의 영어 교육 시스템을 비판한다. 우리나라의 영어 교육은 정말 그렇게 잘못되었을까?

  나는 대학에서 영어학을 전공했고 독학으로 회화를 공부했으며 10년 넘게 사교육 시장에서 내신과 수능 위주의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오랜 시간 영어를 공부하고 가르치며 한국 영어 교육이 그렇게나 비효율적인지 많이 고민해보았다. 분명 우리나라 영어 교육은 말하기, 쓰기 교육의 부재라는 너무 분명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영어 교육은 읽기 교육에 치중되어 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방향 설정이라기보다는 우리나라의 교육 환경상 어쩔 수 없는 선택과 집중이라고 생각한다. 구체적인 교육 방법에서는 분명 이런저런 문제가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영어 교육이 무가치한 것이라고 비난받을 만큼 엉터리 교육은 아니라는 게 나의 결론이다.

  오히려 이러한 고민을 하며 우리나라 사람들이 영어에 대해 가진 근본적인 오해와 편견이 더 큰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 영어 교육이 뿌리 깊은 교육시스템의 문제와 병들어버린 사교육과 함께 싸잡혀 억울한 오명을 쓰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학교 성적에 대한 집착과는 별개로 영어에 대한 우리의 집착에는 분명 다른 점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의 영어 교육이 올바른 교육인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영어를 배우는 궁극적인 목적에 대해 먼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학교에서는 왜 영어를 가르치는가?


  우리나라 영어 교육에 대해 가장 큰 비판은 단연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고도 회화를 못 한다는 것, 일상생활에서 쓰는 영어와 너무 괴리가 크다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간과하는 부분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다른 과목들도 대부분 실생활에 별로 쓸모가 없다는 사실이다. 수학에서 가르치는 2차 방정식과 미적분, 국어에서 가르치는 ‘청산별곡’ 같은 고전 시가가 대체 일상생활 어디에 쓸모가 있을까? 하지만 이런 사회생활에 쓸데없어 보이는 지식을 가르치는 다른 과목들보다 영어 교육에 비판이 집중되는 이유는 많은 사람이 영어가 사는 데 꼭 필요한, 혹은 적어도 많은 도움이 되는 기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교는 기술을 훈련하는 곳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초중고 교육은 필수 교육과정임과 동시에 대학 진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정 분야의 지식이나 직업 기술을 교육하는 직업학교와 특성화고 시스템도 분명 갖추고 있다.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특성화고와 과도한 경쟁을 부추기는 시스템이 비판을 받는 것은 타당하다. 하지만 인문계 고등학교의 교육과정이 대학 진학에 초점을 맞추는 것 자체에는 비판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이 교육과정을 평가하는 마지막 단계가 바로 수능이다. 정시의 비중이 절반 이하로 줄었다지만 대부분의 내신 교육은 여전히 수능의 커리큘럼과 유형을 따라간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줄임말인 수능은 말 그대로 한 사람이 대학에서 수학할 능력이 있는지 측정하는 시험이다. 결국 우리나라 영어 교육이 올바른 것인지 알아보려면 우리나라 영어 교육이 일상생활에서 사용 가능한 영어인지를 묻기보다는 대학 교육에 적합한 영어인지를 묻는 게 더 올바르다.



원어민도 못 푸는 수능 영어?


  유튜브에 수능에 관한 콘텐츠를 검색해 보면 영어 원어민들이 수능 영어를 푸는 영상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대부분 영상의 목적과 요지는 비슷하다. 외국인들이 수능 영어를 풀며 쩔쩔매는 모습을 보여주고 이 정도로 우리나라의 영어 교육이 말도 안 된다고 말하기 위함이다. 수능 영어에는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하지 않는 어려운 어휘와 수준 높은 독해력을 요구하는 지문이 등장한다. 가끔 과도하게 난해한 지문도 출제된다. 이러한 지문은 당연히 생활 영어와는 괴리가 크다. 하지만 대학 교육에서도 그럴까?

  대학은 고등학문을 교육하는 기관이며 모든 교육의 기본은 누가 뭐래도 독서이다. 결국 수능 영어란 시트콤 ‘프렌즈’를 자막 없이 보고 웃을 수 있는지를 평가하기보다는 대학 진학 후 영어 원서를 독해할 수 있는지를 평가하는 게 당연하다. 수능 영어의 지문이 영어 인문학 서적이나 전공 원서보다 어려울까? 절대 그렇지 않다. 변별력을 위한 최고 난이도 몇 문제를 제외한 수능 영어의 지문은 매우 평이한 수준이다. 미국 대학 생활 가능 여부를 평가하는 토플시험과 비교해도 수능 영어는 쉬운 편에 속한다. 물론 영어만을 사용해야 하는 미국 대학과 한국어를 사용하는 한국 대학을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청산별곡’을 모르는 국문과 학생과 미적분을 못 푸는 수학과 학생이 말이 안 되듯, 수능 영어가 너무 어렵다는 영문과 학생 또한 말이 안 된다. 그리고 영어 관련 전공 이외에도 영어 서적을 써야 하는 학과는 의학, 약학, 무역, 국제학 등 꽤 많다.

   게다가 국내 대학 평가에 가장 자주 언급되는 중앙일보의 대학평가 기준에는 외국인 교수 및 학생 비율, 교환학생 비율 등 국제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꽤 크다. 다시 말해 좋은 대학일수록 영어의 중요성은 높을 수밖에 없고 그에 걸맞은 영어 실력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대학 평가의 국제화 지수가 허울뿐이라는 비판을 듣는 이유는 많은 학생이 영어 원서를 독해하고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을 따라갈 만한 실력이 없기 때문이다. 수능 영어가 지나치게 어렵다는 게 사실이라면 오히려 전공 원서와 논문은 더 쉽게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수능 영어가 어렵다는 비판 자체가 큰 모순을 가진 셈이다. 오히려 터무니없이 쉬운 영어 듣기의 난이도를 수능 지문 수준으로 높이는 것이 더욱 적절해 보인다.

  결국 외국인들이 수능을 풀며 당황한 이유는 수능 영어가 영어 독해력뿐만 아니라 논리력과 추론력을 요구하는 시험임을 몰랐기 때문이거나, 일부 고난도의 문제만으로 수능 전체를 쓸데없이 어려운 시험으로 판단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수능 영어의 앞부분은 원어민들에게 말도 안 되게 쉬운 지문들로 가득하다. 결국 한국 영어 교육이 독해에 집중하는 게 당연하다면, 그리고 수능 영어의 난이도에 큰 문제가 없다면, 우리가 물어야 할 적절한 질문은 공교육을 통해 높은 수준의 독해력과 실용적인 회화 실력을 함께 발달시키는 것이 가능한가이다.



영어는 당신의 생각보다 어렵다


  얼마 전 TV 채널을 돌리다 <어쩌다 어른>이라는 강의 프로그램에 나온 유명 영어 강사 이시원 씨의 강의를 보게 되었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았을 “영어가 안되면 시원스쿨”이라는 카피로 유명한 영어 교육 사이트의 대표이다. 강의에서 이시원 씨가 말한 우리나라 영어 교육의 문제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학생들에게 했던 말과 거의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영어 교육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가장 일반적인 법칙과 원리를 체득시키지 않은 채 예외 사항에만 초점을 맞춘다는 점, 다시 말해 중요한 것보다 덜 중요한 것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일반적인 법칙, 중요한 것이란 결국 동사의 활용과 어순이다. 예를 들어 국어의 ‘먹다’라는 동사는 ‘먹었지’, ‘먹었어요’, ‘먹었다’, ‘먹고 있다’, ‘먹을지도 모르겠다’ 등 여러 형태로 변하고 이런 변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것은 언어 사용의 기본이다. 이시원 씨는 이런 영어의 기본을 수학의 사칙연산에 비유했는데 나도 똑같이 이를 사칙연산에 비유해 설명하곤 했다. 곱셈을 완벽하게 체득하지 못한 학생이 방정식을 푸는 게 무의미하듯, 동사 활용을 완벽히 체득하지 못한 채 다음 과정으로 넘어가는 것 또한 무의미하다.

  이시원 씨는 한국 영어 교육이 동사 활용을 제대로 습득할 시간을 주지 않은 채 예외적인 문법에만 초점을 맞춘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매우 옳은 주장이며 우리나라 영어 교육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이다. 예외보다는 기본을 충실히 하는 것이 독해력과 회화 실력 모두에 훨씬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공교육에서 기본을 체득시키는 교육을 하는 게 생각보다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시원스쿨을 한두 달 수강한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우리가 수학의 사칙연산을 배웠던 과정을 돌이켜 보자. 덧셈과 뺄셈에 익숙해지기까지, 그리고 구구단을 외우기까지 학교 수업 외적으로 얼마나 큰 노력을 들였는가? 하기 싫은 '구몬 수학'과 '해법 수학'을 억지로 풀어야 했고 매일같이 엄마, 아빠 앞에서 덧셈, 뺄셈 시험을 봐야 했으며 머리에 쥐가 날 때까지 구구단 노래를 부른 후에야 비로소 사칙연산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한글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학부모는 자신의 아이들이 한글을 뗀 상태에서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를 바란다. 이는 우리나라의 높은 교육열 때문이기도 하지만 언어 습득에는 어느 정도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하며 학교 수업이 그 물리적인 양에 미치지 못함을 잘 알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국 영어도 마찬가지다. 이미 모국어로서 한국말을 습득한 아이들이 영어 동사의 활용과 어순을 습득하려면 치열한 반복 학습은 필수적이다. 이러한 동사 활용과 어순의 체득과는 별개로 기본 어휘를 반복해서 습득하는 과정도 필요하다. 당연히 그러한 훈련은 학교에서 일주일에 서너 번 듣는 40분짜리 영어 수업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모든 공부가 그렇듯 개개인의 노력이 필수적이다. 결국 실질적인 영어 실력 향상을 위해 공교육이 할 수 있는 일은 학생들이 이런 기본을 습득하고 잘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고 이를 적절히 평가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과목과 영어에는 근본적 차이가 있다. 다른 과목과 달리 영어는 혼자 공부할 수 없다는 점이다. 외국어이기 전에 언어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반복적인 훈련으로 기본을 습득한다 한들 실제 사용 환경에 노출되지 않고서는 그 이상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이 부분에서 공교육은 어쩔 수 없는 한계를 가진다. 수업 시간의 총량 자체가 부족한 것은 둘째 치더라도 학교는 학생들이 영어를 사용하는 환경 자체를 조성할 수 없다.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충분히 영어를 사용하려면 아무리 못해도 다섯 명당 한 명의 교사가 필요하다. 지금과 같은 조별 수업은 실질적인 영어 실력 향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미 한국말을 모국어로 사용하는 아이들이 틀린 영어로 대화하며 서로에게 올바른 피드백을 주기 바라는 것은 차라리 난센스에 가깝다.

  결국 공교육이 정말 실용적인 영어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선 막대한 예산을 들여 다른 과목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교사당 학생 비율과 시설을 갖춰야만 한다. 만약 학교가 이러한 환경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말하기, 쓰기와 같은 실질적인 영어 사용 능력을 평가하면 어떻게 될까? 지금의 영어 교육은 비효율적일지언정 최소한 학교에서 가르친 것만을 평가한다. 하지만 만약 가르칠 수 없는 것을 평가한다면 학교는 교육기관이 아닌 평가기관으로 전락해 버린다. 결국 영어 교육은 사교육으로 넘어가게 되며 공교육이 사교육을 조장한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영어가 뭐길래?


  만약 학교가 사교육을 부추긴다는 비판을 무릅쓰고라도 실용영어 평가에 집중한다면 교육 시스템으로서는 최악일 수 있지만, 실질적 영어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될 수는 있다. 10년 넘게 배워도 말 한마디 못하는 영어 교육이라는 오명도 벗을 수 있을 것이다.

  학교에서 말하기, 쓰기와 같은 실용적인 능력을 평가하게 되면 영어 사교육의 방향성 또한 그렇게 바뀔 것이고 학생들의 실제 영어 실력은 분명 향상될 것이다. 어차피 사교육을 잡을 수 없을 바에야 입시지옥을 거쳐서 영어 하나라도 건진다는 위안이 생기는 셈이다.

  하지만 이런 방향은 영어의 귀족화라는 매우 큰 문제를 발생시킬 가능성이 크다. 실질적인 영어 교육을 사교육이 담당하고 공교육이 이를 평가하는 시스템은 “영어 실력 = 생활수준”이라는 새로운 프레임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읽는 영어와는 다르게 말하는 영어는 일상생활의 빈번한 영어 사용으로 이어지게 되며, 그 과정에서 영어를 하지 못하는 학생은 소외되거나 돈이 없어 사교육을 못 받은 학생으로 비추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미 공부 실력과 생활수준의 상관관계가 갈수록 커지는 상황에서 이러한 문제는 꽤 큰 사회문제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마지막 방법은 정부 차원에서 학생들이 학교 수업 외에도 영어에 자연스레 노출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뿐이다. 영어 콘텐츠 사업을 지원해 TV 및 여러 미디어 콘텐츠를 영어로 내보내고 도서관에 영어 서적의 비율을 일정 수준 이상 갖추고 실생활에서 영어 사용을 유도하는 정책을 다각도에서 펼쳐야 할 것이다. 이는 사실 영어를 공용화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이쯤 되면 우리는 스스로 질문해봐야 한다. 우리는 정말 영어 공용화의 길을 원하는 것일까? 막대한 예산과 노력을 들여 모두가 영어를 잘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만 할까? 왜 이렇게까지 해야만 할까? 대체 영어가 뭐길래?



영어는 우리의 환상이다


  공교육만으로 영어를 잘하는 것이 정말 불가능하다면, 그리고 영어를 잘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거라면, 영어가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지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분명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영어 시험을 잘 봐야 하고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서는 높은 어학 점수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사회적인 요구를 차치하고라도 영어에 대한 우리의 강박은 거의 집착에 가깝다. 새해 목표 순위 중 하나로 빠짐없이 이름을 올리는 영어공부는 비단 사회적인 요구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가 영어에 집착하는 이유는 사실 영어가 우리의 환상이자 자존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려운 수학 문제를 못 푸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영어를 못하는 것은 부끄러워한다. 한글의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생각보다 어렵지만, 새해 목표 순위 상위권에 영어 공부 대신 한국어 공부가 오르는 날은 없을 것이다. 한국어 능력 시험 문제집의 판매량이 토익 문제집의 판매량을 뒤집는 일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많은 한국 사람들에게 영어를 못하는 것은 드러내고 싶지 않은 치부이다. 많은 사람이 살면서 영어가 꼭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일상생활에서, 혹은 직장에서 영어를 써야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왜 영어를 잘하고 싶은지 물어보면 더 많은 대답은 ‘외국인과 대화하고 싶어서’ ‘여행 갈 때 쓰려고’ 혹은 ‘그냥 멋있어 보여서’이다. 단지 외국인 친구를 사귀기 위해, 혹은 많아야 1년에 한두 번 가는 해외여행을 위해 우리는 그 많은 시간과 돈을 영어에 투자해야 할까?

  많은 사람이 영어 공부를 자기 계발의 영역이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유창한 영어 실력은 날씬한 몸매, 잘생긴 외모, 좋은 차와 같이 자존감을 올려주는 수단에 더 가깝다. 우리는 그저 외국인 친구와 유창하게 대화하는 자신이, 외국에서 당당히 영어로 음식을 주문하는 자신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R 발음과 L 발음에 집착하고 연예인의 영어 실력을 평가하며, 말쑥한 백인 앞에서 머리가 하얘지는 자신을 부끄러워한다. 그리고 새해가 되면 다이어리에 다이어트와 함께 영어공부를 목표로 쓰고 회화학원에 등록하는 것이다.

  자기 계발로서의 영어는 오히려 자신의 전문 분야에 관한 정보의 양과 접근성 넓혀주는 역할로서의 영어 공부여야 하며 이를 위해선 원어민 표현을 외우는 것보다는 독해 공부가 더 효율적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하는 영어 교육에 대한 비판은 정당한 비판이라기보다는 지옥 같은 서열주의 교육시스템을 거친 고통에 대한 토로이며, 학교와 사교육이 영어에 대한 환상을 채워주지 못한 것에 대한 배신감의 표현에 가깝다.

  우리가 영어를 말하지 못하는 것은 영어 교육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단지 말하는 훈련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육 전반의 시스템과 방법론에서 분명 문제가 있지만, 대학 교육에서 독서가 차지하는 비중과 중요성을 생각했을 때, 그리고 외국어 교육에서 공교육이 가진 한계를 생각했을 때 영어 교육을 독해에 집중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만약 어느 정도의 영어 독서가 가능한 수준을 수능 2등급으로 가정한다면 그만한 독해력을 갖추고 졸업하는 고등학생은 기껏해야 25%에서 30%에 불과하다. 대략 70%의 학생은 충분한 영어 독해력을 갖지 못한 채 성인이 된다. 결국 대부분의 성인이 ‘뉴욕타임스’를 읽을 수 없는 이유는 우리나라의 영어 교육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열심히 공부를 하지 않은 탓이다.

  회화에 집중하지 않는 우리나라 영어 교육을 비판하기보다는 평가 잣대로 영어 점수를 사용하는 기업들을 비판하는 것이 타당하고, 유창한 영어 실력을 우월하고 멋진 것으로 몰아가는 사대주의적인 문화와 태도를 비판하는 게 옳다. 마치 서울 의대를 가야만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스카이캐슬>의 주인공들처럼 우리 역시 ‘왜’라는 질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은 채 그저 영어 실력에 목을 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결국 문제는 서열화를 부추기고 공부와 성공, 성공과 행복을 같은 것으로 몰아가는 사회의 문제일 뿐이다. 우리나라의 영어 교육은 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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