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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i Jun 20. 2021

꽃길

색연필 그림일기


어쩌다 보니 동생과 함께 횡성 어머니 땅에다 학원을 지었다. 비가 자주 내렸고 생각이 빗나가는 우여곡절 끝에 동생은 영어를 나는 국어를 개설하며 수업을 시작했다. 학원은 수업뿐 아니라 학부모 상담, 학생관리, 학원 시설관리 등 일이 많다. 또 늦은 시간에 끝나는 일이라 시간 반이 걸리는 양평집까지 매일 출퇴근한다는 건 무리였다. 결국 주중엔 횡성 어머니 집에서 지내기로 했다.


잠자리에 민감한 나는 어머니 집이라고 다르지 않아 잠을 쉽게 이루지 못하고 있다. 그 덕분에 일찍 잠에서 깬다. 창이 훤해 시간을 보면 5시가 채 되지 않았다. 벌써 2주가 넘었는데 아직도 잠을 설친다. 다시 잠을 하지만 새벽의 복병 조이가 씩씩하게 짖었다. 잠들긴 틀렸다. 5분 남짓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섬강의 자전거길로 아침 산책을 나갔다.


도로 옆 작은 공원에 차를 두고 길로 들어서니 약 10km 이상 강을 따라 자전거길이 이어진다. 길 아래로 큰 섬강이 흐르고 주변은 온통 푸르다. 부지런한 새들이 여기저기 날아오르며 명랑하게 수선스럽다. 살짝 부는 바람엔 축축한 이슬과 풀냄새, 강 비린내가 섞여 났다. 부족한 수면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상쾌해지면서 피로가 사라졌다. 어느새 해는 높이 떠 등 뒤로 쫓아왔다. 진입로 앞에서 간단히 스트레칭을 하고 큰 나무를 돌아 길에 들어서는 순간 눈앞이 노랗다. 아, 꽃길이다!


섬강 자전거 꽃길

노란 금계화가 길 양쪽으로 줄지어 섰는데 지평선 끝 소실점까지 노랗다. 중국의 황사를 타고 꽃씨가 날아와 우리 산하를 온통 점유하고 있다는 기사가 생각났지만 이런 장면 앞에서 황사를 타고 들어온 외래종이니 어쩌니 하는 말이 무색해진다. 꽃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저토록 예쁘게 피어 보는 이를 기쁘게 하는데....


노란 꽃길!

꽃.

, 꽃


세상은 너무 빨리 변하고 당연한 순리라고 믿었던 이치들이 당연하지 않게 돌아간다. 사람들이 그렇다니 그렇다고 믿은 나는 쉽게 바보가 된다. 그 덕분에 하루에도 서너 번 진짜 바보가 아닐까, 라며 스스로를 비하한다. 60년 가까이 살았는데 이 세상에서 나는 여전히 이방인이다. 얼핏 잘 섞이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겉돌고 있다. 그래서 늘 세상과 거리를 두고 홀로 쉬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휴식은 주어지지 않을래나보다. '너 유유자적하며 놀 줄 알았지? 아직은 아니야. 지금보다 더 네 몸이 네 맘대로 움직이지 않고 너 정말 늙었구나, 하고 내가 인정할 때까지, 이러저러한 희망도 바람도 희미해질 때까지 소처럼 일해야 돼. 어쩌겠어. 이 연민한 실존아' 하며 세상은 내게 혀를 내민다. 무력한 내겐 선택의 자유가 없다.


그런 내게 미안했을까?  

꽃길을 보여주며 위로를 건네는 건가? 나는 또 홀랑 마음을 풀고 넘어갔다. 꽃길이 뭐라고. 밸도 없이. 

그리고 어느새 저자세가 되어 손을 모았다. 저 노란 길 따라 나의 기원이 어딘가에 가 닿기를 바라며 노란 리본에 소망 하나씩 달아 나무에 걸었던 이야기처럼 이 노란 금계화 꽃잎 하나씩 세며 나의 기도를 하늘에 띄웠다.


"동생과 함께 시작한 일이 이 길처럼 꽃길이게 하소서. 

특히 동생의 앞날이 꽃길이게 하소서. 

궁핍해도 유유자적하고 싶었던 내가 

그래서 시작한 일이니 부디 내 소망을 외면하지 마소서. 

그러니 들으소서. 당신이 사랑하는 연민한 인간의 노란 소망들을."


길은 노랗게 이어지고 

나의 염원도 길 따라 이어졌다.

이른 시간, 세상의 소리 들리지 않았고

금계화 노란 꽃길은 황홀하고 적막했으며 고맙게도 날이 참 좋았다.

길에 서 있던 시간만큼

나는 세상에서 놓여나

조금 더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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