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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재희 Nov 11. 2019

베트남 쌀국수 (Pho)

따끈하게 속을 달래주는 달콤 향긋한 소고기 국수의 맛 

쌀국수 땡기는 날

날씨도 추워졌고, 회사에서 하루 종일 숫자를 가지고 하도 씨름을 했더니 퇴근 후에 따끈하고 향긋한 소고기 쌀국수 한 그릇을 흡입하면 이 스트레스가 좀 풀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니 배도 고프고 해서 더욱 참을 수가 없어졌다. 그런데 내가 가는 이 식당은 저녁 8시면 문을 닫는다. 메뉴도 쌀국수 딱 하나이고, 무조건 현금결제인 데다가 8시면 문을 닫아버리는 불친절한 곳이지만 식당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이유는 아주 심플하다 - 맛있고 싸기 때문이다. 회사 일이 많아서 늦게 나오는 바람에 어느덧 가게 마감 시간에 가까워져 버렸다. 초조하게 내비게이션을 보니 7시 45분 도착 예정이라고 나온다. 아, 그냥 포기하고 집에 가서 대충 때울까. 하지만 나는 초조해하면서 계속 달린다. 바로 앞에서 긴 신호가 걸리는 바람에 결국 식당 주차장에 도착하니 7시 50분이 되어 버렸다. 이 시간엔 아마도 손님 안 받을 것 같은데... 반쯤 포기한 심정으로 가게문을 열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식당 안을 살펴보니 아직 식사 중인 테이블이 꽤 된다. 무표정의 베트남 아저씨에게 아직 하냐고 물으니 (흔들림 없는 표정을 그대로 유지하며) 고개를 끄덕하더니 손으로 저쪽 가서 아무 데나 앉으라고 테이블을 가리킨다. 아저씨가 친절 서비스 정신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지만 나는 그저 이 집 Pho를 먹을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 기쁘다. 아,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군. 자리에 가는 도중 혼자 온 누군가가 자리에서 일어나던 중 나와 눈이 마주쳤다. 저 사람 누구더라... 생각해 보니 이전에 살던 동네에서 내가 다니던 이발소 사장인 베트남 아저씨다. 아니, 저 아저씨는 이거 먹으러 혼자 여기까지 온 건가. 어쩌면 이 동네에 사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내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하는 것 같은 광경이어서 더욱 기대되었다. 기다리는 동안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Pho를 찾게 된 거지.


문 닫기 직전까지 먹고 있는 손님들께 감사를 


한국에서 먹은 쌀국수, 미국에서 먹은 Pho

베트남 쌀국수는 한국에도 잘 알려진 음식이고 쌀국수를 하는 식당도 많다. 나도 직장이 있던 여의도에 제법 알려진 쌀국수 집이 있어서 가끔 먹었다. 하지만 가끔 한 번씩 별미로 먹는 정도였지 정기적으로 먹어 줘야 하는 음식은 아니었다. 게다가 고기도 그리 많이 들어 있지 않아 뭔가 한 끼 식사로는 부실한 느낌이 없지 않았다. 종합하면 베트남 쌀국수는 그저 한국에 잘 (또는 유일하게) 알려진 베트남 음식으로 가끔 먹을만한 음식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다 직장 그만두고 미국에 유학 왔던 시절, 학교 앞에 꽤 인기 있는 베트남 쌀국수 집이 있었는데 뭔가 따끈한 국물 요리를 먹고 싶을 때 자주 가게 되는 곳이었다. 학교 이벤트에서 나오는 공짜 피자 같은 것으로 점심을 때우고 나면 저녁에는 좀 몸과 마음을 달래 주는 따뜻한 식사를 하고 싶어 졌다. 게다가 보스턴의 추운 겨울, 그리고 따끈한 탕면류를 좋아하는 와이프의 취향 덕에 더 자주 갔다. 졸업 후 DC 지역에 와서는 동네에서 찾기도 힘든 데다, 이것 말고도 먹고 싶은 음식들이 많았기 때문에 한동안 찾아 먹지 않았다. 술을 즐기는 회사의 한국인 동료들이 해장국 대용으로 가끔 버지니아에 있는 Pho집까지 찾아간다는 소식만 간간히 들을 뿐이었다. 


그러다 교외로 이사를 가고 나서 어느 순간 동네 맛집 검색에서 뜬 베트남 식당을 가 보게 되었는데 매우 후줄근해 보이는 동네에 있었다. 잘못 왔나 하는 생각이 들 무렵 음식이 나왔는데 글쎄 이 곳 음식이 너무 맛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가격도 너무 착했다). Pho는 물론이거니와 돼지고기 숯불구이 덮밥, 토마토 밥을 곁들인 닭고기 구이 등 다양한 메뉴에 홀랑 빠져 이 후줄근한 동네에 좀 더 자주 오게 됐다. 자주 오다 보니 베트남 식당들 말고도 뭔가 본토 느낌의 라틴 아메리카 식당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동네가 후줄근할수록 거주비용이 저렴하니 개도국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이 많이 살게 마련인데, 그런 사람들을 상대로 음식장사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가격은 저렴하고 음식은 본토의 맛을 잘 살리는 식당들이 살아남게 되는 것이다. 이때부터 나는 후줄근한 동네에 있는 Ethnic Food (미국적인 표현인데, 미국의 주류가 아닌 소수민족의 음식을 뜻한다) 맛집들을 발굴하는 데 취미를 갖게 되었다. 아무튼 이 집의 Pho는 국물 맛도 훌륭했지만 국수 안에 들어 있는 얇게 저민 소고기들도 매우 다양하고 맛있었다. 


다양한 부위의 얇게 저민 소고기가 실하게 들어 있는 쌀국수


베트남 타운 + 코리아 타운

그렇게 그 식당을 이후 정기적으로 방문하다가 강 건너 버지니아 북부의 다른 교외로 이사를 오게 되었는데, 이쪽 부근에는 거대한 베트남 타운 (베트남 식당만 한 50개 정도 모여 있는 거대한 식당가도 있다), 그리고 코리아 타운이 형성되어 있었다. 정말 많은 베트남 식당들이 도처에 있는데 그중 코리아 타운 가까이에 자리 잡은 베트남 식당 중에서는 한국인 손님들도 많다 보니 아예 한국어가 적힌 메뉴를 준비하는 곳도 있다. 미국에서 원조 베트남 식당에 갔는데 메뉴에 한국어가 쓰여 있으니 다소 혼란스러웠지만, 덕분에 나는 Pho에 어떠한 부위의 소고기가 들어가는지 한국어로 자세히 알게 되었다. 


이렇게 친절한 3개국어 메뉴판이라니


양지머리, 차돌박이, 치마살, 힘줄, 양 등 다양한 부위의 소고기 슬라이스가 들어간 Pho는 각 부위의 다양한 맛과 텍스쳐를 즐길 수 있기에 (또한 홍두깨살의 경우 익히지 않은 생고기를 뜨거운 국물에 그대로 얹어내어 마치 샤브샤브와 같은 느낌으로 먹을 수 있다) 그저 국수 한 그릇 후루룩 넘기는 것을 넘어 다채롭고 흥미로운 식사 경험을 제공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이렇게 다양한 부위의 고기를 제공하지 않는 쌀국수는 제대로 된 쌀국수를 먹은 느낌이 들지 않아 성에 차지 않게 되었다. 서빙되는 그대로도 깊은 국물 맛을 자랑하는 Pho이지만 함께 서빙되는 베트남 고수풀 (한국인들은 일반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숙주나물, 라임 등을 넣어 먹으면 좀 더 향긋한 맛을 느낄 수 있다. 베트남 현지에서 쌀국수를 먹어본 적이 없기에 다소 조심스럽지만 이 정도면 제대로 된 본토의 맛인 것 같다. 베트남 타운에 위치해 있고 실제 베트남인들이 많이 와서 먹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지난번 휴가 때 한국에 들어갔을 때, 제법 괜찮아 보이는 베트남 쌀국수 집이 있어 기대하고 가 봤다가 심히 실망한 적이 있다. 첫 가게에 실망해서 다른 가게에 또 갔는데 둘 다 영 아니었다. 일단 국물 자체가 맹맹했을뿐더러 고기도 하나의 부위만을 썰어 넣은 듯했다. 내가 예전에 한국에서 나름 맛있게 먹었던 쌀국수도 이 정도 수준이었던 것일까? 한국에서는 한식만 먹다 보니 오랜만에 생각나서 간 것이었는데 오히려 미국에 돌아가면 빨리 제대로 된 Pho를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더 크게 들고 말았다. 그렇다, 나는 대략 이런 과정을 과정을 거쳐 Pho를 자주 찾게 된 것이었다.


기억을 더듬던 중 서빙된 쌀국수


쌀국수 땡기는 날의 마무리

5분 만에 나의 쌀국수가 나왔다. 맛있게 후루룩 거리며 먹는 사이에 어느덧 손님들이 하나둘 떠나고 식당에는 나와 다른 하나의 테이블만이 남았다. Pho는 뭐랄까, 참 쨍하고 강렬하게 맛있는 음식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은은하게 사람의 입맛을 사로잡아 이렇게 한 번씩 꼭 먹고 싶게 만드는 맛이 있다. 마지막 남은 고기와 숙주나물 조각까지 다 먹고 나서 아까 식당에 들어올 때보다는 훨씬 밝아진 표정과 여유로워진 걸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운터에 가서 10불짜리를 건네니 아저씨가 마치 팁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한 쿨한 표정으로 거스름돈을 건네준다. 뭔가 남는 장사를 한 기분이다. 속이 뜨뜻해진 채로 밖에 나와 찬 바람을 맞으니 청량하다. 뭔가 내일도 열심히 일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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