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03. 서울인쇄센터 일지 4
서울인쇄센터에 새 장비가 들어왔다. 만들어진 지 수십 년이 지나 이제는 단종된 장비니 ‘새 장비'라기 보다는 ‘새 식구'가 들어왔다고 해야겠다. 레터프레스라고 불리는 이 장비는 그림이나 글씨가 새겨진 동판에 잉크를 묻혀 찍어낸다. 활자에 잉크를 묻혀 인쇄하던 방식과 비슷하니, 현역으로 뛰고 있는 인쇄기들 중에서 가장 원형의 인쇄기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3, 40년 전만 해도 활판 인쇄로 만든 책이 흔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글자의 오톨도톨한 윤곽이 느껴지기도 해, 글자를 새기기 위해 누른 프레스의 압박이 정보의 무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후 오프셋 인쇄가 주종을 이루면서 박물관에나 들어갈 것 같은 레터프레스가 요 몇 년 사이 소비자들에게 주목을 받고 있다고 한다.
개성 있는 색다른 인쇄물을 찾는 소비자의 취향과 금박 인쇄 등과 같이 특수공정을 가미해서 부가가치를 올리려는 인쇄인의 궁리가 맞아떨어진 덕이다. 소비자의 취향이 나날이 다양해질 것을 생각하면 레터프레스는 한동안 자신만의 독특한 입지를 굳혀나갈 것 같다.
레터프레스는 수억씩 하는 대형 인쇄기를 갖추지 못하는 인쇄소들에게 쏠쏠한 수입을 안겨주는 기특한 기계이기도 하지만, 일단 기계가 도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수익성이나 생산성보다도 박진감 넘치는 움직임에 중독되고 마는, 매력을 가진 기계이기도 하다.
지금 대다수 디지털 장비들이야 박스형의 외관에 모두 감춰져 있고, 상당수 센서와 프로그램을 통해 자동화되어 그 메커니즘을 눈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심지어는 고장이 나도 기계를 수리하기보다는 모듈화된 부품을 갈아 끼우는 방식이지만, 레터프레스는 다르다. 마치 스팀펑크 장르물에서 나오는 증기 기관처럼 기계 자체의 역동성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기계의 심장인 1.25Kw 모터가 분당 1,400회의 회전수로 돌면, 벨트에 연결된 캠이 회전 운동을 왕복 운동으로 바꿔준다. 제일 상단의 롤러가 잉크를 머금고 기계 팔에 달린 롤러에 잉크를 전해주면, 기계 팔은 동판이 붙은 면을 훑으면서 잉크를 고루 발라준다. 롤러가 자리를 비키면 급지대에서 종이를 문 기계팔이 바람개비처럼 두 팔을 회전하면서 종이를 차례로 프레스에 올려놓는다. 마지막으로 프레스가 동판과 밀착해 인쇄 공정 하나를 마친다.
서로 다른 기계 팔이 군더더기 없이 절도 있게 움직이면서 분당 기백 장씩 찍어내는 모습을 보면, 기계 자체에 생명이 있는 것 같다. 그것도 기계 홀로 동떨어진 생명체가 아니라 기계와 더불어 세월을 견딘 노동자들의 삶과 얽혀 있는, 흡사 노동자들의 분신처럼 느껴진다.
서울인쇄센터에 들어온 레터프레스도 자신의 분신처럼 여기는 이가 있다. 충무로 인쇄 골목에서 청춘을 보냈고, 지금도 현대금박이라는 인쇄소를 운영하는 김용춘 씨가 그이다. 김용춘 씨가 인쇄센터에 레터프레스를 무상 임대하기로 한 것은 인쇄 업계에 청년들이 더 많이 들어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고 한다.
김용춘 씨의 바람처럼 조만간 레터프레스를 배우는 수업을 열 계획이다. 다행히 벌써 기대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레터프레스를 센터에 들여놓고 두 차례 진행한 체험 프로그램에서, 참여자들은 한결같이 레터프레스의 움직임에 환호했다. 지금 준비 중인 레터프레스 교육이 12주 짜리라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단 한 번 레터프레스의 유려한 움직임을 본다면 매력에 푹 빠지지 않을까 기대한다. 강사로는 김용춘 씨와 3년째 곁에서 그를 돕는 그의 아들이 돕기로 했다.
70대 인쇄인과 2,30대 청년들이 50년이 넘은 기계를 두고 만나는 모습은, 청년 인력의 부족과 유래없는 경영난으로 팍팍한 인쇄 현장에 조금이나마 갈증을 달래주는 장면이 될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