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에 포함된 실수를 너그럽게 보기
몇 주전,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영국의 철학자 베이컨이 했던 말을 했다. 베이컨은 인간이 알고 있는 지식을 기억, 이성, 상상으로 구분했는데, 기억은 과거에 대한 기록으로 역사를, 이성은 존재에 관한 탐구와 이해로 철학을, 상상은 이성과 다른 감성과 시간을 초월한 지식으로 이를 시학으로 구분했다.
나는 베이컨의 분류가 우리가 마음속에 담고 있는 생각을 구분하는데도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기억, 이성, 상상은 인간의 정신능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생각은 무엇이든지 기억이거나 이성적 판단이거나 미래를 꿈꾸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는 기억하고 판단하고 상상하며 생각한다.
흥미로운 부분은 기억, 이성, 상상하는 생각의 비중이 나이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이다.
대체로 시니어 세대 사람들은 기억의 비중이 크다. 정신 안에 경험이 많이 축적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시니어는 기억을 반추하고, 경험을 되새김질하며, 경험을 활용해서 삶을 꾸려 나간다.
반면에, 젊은 친구들은 이성과 함께 상상하는 비중이 크다.
어떤 일을 할 것인가? 어디에서 살 것인가? 누구를 만나 어떤 경험을 할까? 청년은 미래에 대한 기대를 하며 상상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선택이다.
나는 시니어를 막 통과한 사람인데, 인생을 관조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주로 살아가는 의미와 살아왔던 삶의 의미를 종종 생각하는데, 이 생각은 현재 이 자리에 있는 이유로 이어진다.
나의 대답은 인생은 선택의 과정으로 꾸려진다는 발견이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유는 내가 여러 가지 선택을 했고, 그 선택이 정한 경로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교류하며, 또한 노동하는 삶을 꾸려온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나는 즐겁고 유쾌하며 때로는 아픈 순간들을 살아왔다. 선택하는 순간에 나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기억하고 이성으로 판단하고 상상했다.
기억과 이성, 그리고 상상은 생각하는 나의 주인이다.
첫 직장을 선택했을 때는 상상이 주인이었다.
탁월하게 일하는 전문가로 성장하는 것, 기업이라는 조직에서 이 꿈을 성취할 수 있의리라는 비전으로 직장을 선택했다.
그런데 첫 번째 선택은 3년을 채우지 못했다. 내 생애 최초의 이직은 그곳에서 일한 지 3년을 앞둔 시점에 이루어졌다.
내 상상은 틀리지는 않았지만 취약했다.
두 번째 직장은 기억과 이성이 힘을 발휘했다.
후회를 남긴 첫 번째 선택을 통해 내가 발견한 교훈을 많이 곱씹었다.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 발견한 내용들(내가 원하는 일과 일하는 방식, 일하는 환경에 대한 지식)을 생각의 재료로 사용했다.
나는 자율적으로 일하기를 원했다.
조직은 사람들이 힘과 노력을 합쳐 목표를 달성하는 곳이다.
조직 전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노동자인 나는 내가 가진 지식과 역량으로 공헌하며 일해야 한다.
나는 지시를 받는 노동자로서 일하는 것을 받아들이지만, 내가 전문가로서 공헌하는 방식은 지시에 따라 일하는 부분과 함께 자율적으로 일하는 방식이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보다 자율적으로 일하는 환경을 갖춘 조직이 내게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성과를 올리는 방식은 자율적 책임과 협력이라는 환경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직장을 선택할 때는 이 기준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이후로 이 기준은 내가 관리자로, 경영자로 더 큰 역할과 책임을 맡고, 유용한 기여를 할 수 있는 전문가로 일과 조직을 선택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완벽한 삶을 기대한다면 완벽한 선택을 내려야 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완벽에 가깝도록 성실한 선택을 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선택의 순간에서 어떤 생각의 재료를 사용했던가, 그리고 사용하는가를 자문해 본다.
왜 이 선택이 좋아 보일까?
왜 이 선택이 아름답게 느껴질까?
나는 기억과 판단과 상상으로 생각하는 나를 인식한다.
선택하는 길 앞에서 내가 기억하는 것, 판단하는 것, 상상하는 것이 올바른 지를 물어보고, 그 답에 따라 삶을 선택하고 싶은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아주 대단한 선택을 고민하는 경우를 말한다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어떤 사람과 만나며, 어떤 대화와 교류를 하고, 어떤 활동을 하는 가도 선택의 영역이다.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와 경험은 그 자체가 인생의 영역이고, 또한 삶의 영역이다. 내가 존재하는 곳은 소유물이 아니라, 거주하는 공간이 아니라, 삶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삶에는 우연히 주어지는 부분도 있다. 가장 큰 우연, 사실 우연이라기보다는 필연이라고 말해야 할 텐데 인간인 우리 모두는 부모의 선택에 의해 삶을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우리 모두는 부모에게서 생명을 얻지 않는가?
이를 빼고는 인생은 선택으로 삶을 만들어가고 그 삶 속에서 우리는 인생을 꾸며 나간다.
선택이란 결국,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활동이다. 그리고 선택은 정신활동이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선택은 온전히 나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때때로 타인에 의해, 타인의 영향을 받아 선택할 수도 있지만, 그 선택으로 인한 모든 것들(삶의 공간과 사람들, 경험)은 온전히 내가 살아가는 삶이 되고, 내가 여행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생각을 들여다본다.
왜 이런 선택이 좋다고 생각했을까?
이전에 했던 선택들에서 내가 후회를 느끼는 지점이 있다. 실수라고 생각되는 선택이 있다.
심사숙고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선택, 다소 쉽게 이루어진 선택들이다. 그러나 이런 실수들이 꼭 잘못된 선택이었을까?
애초에 기대했던, 선택을 통해 얻고 싶었던 것들을 온전하게는 얻지 못했기에 실수라고 생각하지만, 꼭 그런 것이었을까?
그런 선택 중에는 나를 재발견하고, 새로운 삶의 경로를 열었던 선택이 있었다. 2005년에 일반 기업을 떠나 작은 경영컨설팅 회사에 입사했다.
경영학을 전공하고 줄곧 기업에서 15여 년을 일했던 때였는데, 관리자보다는 전문가로 일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던 차에 그 꿈을 좇아 전업을 하게 되었다. 다른 기업으로 이직하는 전직이 아니라 일을 바꾼 전업이었다. 그 회사는 10명도 안돼는 사람들이 일하는 작은 조직이었지만, 나는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팀이 고객들이 찾는 가치 있는 기업으로 성장한다는 비전에 공감했다. 그리고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초기에는 다양한 조직에서 다양한 문제를 분석하고 솔루션을 제공하는 컨설턴트로 신나게 일했다.
지적 자극도 컸고, 학습의욕도 불탔으며, 많이 배우고 공부하면서 일했다. 그러나, 작은 기업이었기에 늘 프로젝트 수주를 고민했고, 그만큼 불안 불안했다. 불규칙한 업무방식과 잦은 출장은 부담이 컸고, 점차 나를 지치게 했다.
결국, 3년 정도 일하고 좀 더 큰 기업으로 이직했다.
그런데, 이 과정은 나를 재발견하는 과정이었다. 나는 내 안에 있었지만 크게 인식하지 못했던 야심과 내 강점을 발견했다.
하나의 조직에서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승진하고, 임원으로, CEO로 더 큰 책임과 일을 수행하는 것도 멋지지만, 경영전문가로서 다양한 조직, 사업체가 혁신하는데 기여하는 사람으로 일하고 싶다는 욕망을 발견했다. 이 욕망은 새로운 인식, 새로운 지식에 대한 열망을 포함한 것이다.
나는 기획이든 재무분야이든 한 기업에 소속되어 숙련된 노동자로 일하기보다는 전문가로서 새로운 지식으로 성장하면서 그 지식의 열매를 나눠주면서 일하고 싶다.
내게 있어 일은 하루의 생계를 해결해 주는 수단만이 아니다. 일은 나의 성장이면서, 그 성장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공헌을 넓히는 수단이자, 일하는 삶을 구성하는 것이다.
3년 만에 조직을 떠나게 되었지만, 좀 더 기반이 있는 조직으로 이직했다면 보다 좋은 출발을 했을 수 있었다는 후회를 하면서도, 이 선택은 나를 재발견하게 했고 성장시킨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실수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한다.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그런데, 항상 완벽하게 모든 선택을 할 수는 없다.
선택의 순간에 모든 경험을 총동원하고, 현재의 상황과 가까운 미래를 판단하고, 가슴속 깊이 묻혀 있는 열망을 인식하는 것도 쉽지 않다.
물론, 생각은 깊고도 명확하게 해야 한다.
그럼에도, 때때로 불명확한 순간에도 우리는 선택할 수 있고 선택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이런 선택을 이끈 나의 생각에는 불명확하지만 숨겨진 의도가 있을 수 있다. 아마도 바람과 희망이 담긴 의도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실수를 너그럽게 바라보는 법을 알게 되었다.
실수는 부끄럽다. 그렇지만 내가 했던 선택에서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나의 바람과 희망이 있을 수도 있으니, 새로운 관계, 새로운 일, 새로운 경험에 마음을 열게 되었다.
내가 왜 그토록 꼰대라는 말을 싫어하는 지를 지금은 분명하게 알고 있다.
과거의 기억에 매달리는 이유는 그 기억이 너무나도 아름답기 때문에 혹은 너무나도 고통스럽기 때문이지만, 그 기억이 상상을 지배한다면 나는 선택권을 잃어버린 것이다.
인생은 선택이다. 선택의 순간, 선택을 기다리는 삶의 영역은 열린 것이다. 살아온 과정이 그 모든 선택을 결정하도록 할 텐가?
시니어로서 실수하면 안 되는 것인가?
나는 새로운 선택이 무엇일까를 기대하면서, 내가 하지 않았던, 경험하지 못했던 영역을 발견하기를 지금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