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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라나 Jan 13. 2023

하이힐은 내 발에 안 맞아

엄마들의 인간관계

맞지 않는 인간관계는 맞지 않는 신발과 같다.


 엄마들에게 인간관계란? 필연적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 

 엄마의 자리가 되어 인간관계를 만든다는 건 아이들에게 친구를 만들어 주기 위함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아이에게 친구를 만들어 주고 그에 대한 교육의 정보를 엄마들과 나누는 것이 계획적 인간관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보다 나은 아이의 인간관계를 위해 억지로 놓지 못한 끈이 있었다.


 그 시작은 큰 아이가 5살이 되어 유치원에 가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4살까지 큰 아이는 많이 아프고 입원도 자주 해서 어린이집을 안 가는 날도 참 많았다. 때문에 나의 신경은 온통 아이에게 몰두되어 있었고 아이의 친구관계나 교육보다는 아이의 건강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아마도 초보엄마였기 때문에 다른 것을 살펴볼 여유가 더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아이가 5살이 되면서 아이에게 많은 환경을 접해주고 싶은 마음에 안전하게 뛰어놀 수 있는 유치원 안에 숲이 있는 큰 유치원을 선택하게 되었다. 아침마다 유치원의 큰 버스는 아파트 단지 근처에서 차를 탈 수 있게 와주었고 아이들은 먼저 온 순서대로 줄을 서서 유치원 버스를 기다렸다. 그러면서 나이를 불문하고 엄마들은 안면을 트고 친해지는 자연스러운 관계가 형성되었다. 오전엔 가끔씩 시간을 맞춰 점심도 함께하고 차도 마시는 전형적인 전업맘의 삶이 이어졌다. 그중 나는 막내였어서 항상 언니들의 부름에 달려가서 총무 노릇을 하기도 했다. 그때는 마치 그게 전업엄마로 누릴 수 있는 절대적인 삶 같았다. 

 하지만 관계가 길어지고 일방적이면 언젠가는 탈이 나는 법이던가. 나름 이것이 아이를 위한 길이지 생각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나와 맞지 않는 이 시간이 무척이나 힘들었다. 주관이 뚜렷하지 못한 나로서는 그녀들의 의견을 함께 맞추어 떠밀려 다니기 일쑤였고 그녀들은 내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살포시 나의 생각을 지르밟아 주었다. 또한 1층인 우리 집은 놀이터와 아주 가까워서 엄마들은 종종 커피를 얻어 마신다는 명목으로 방문했고 아이들은 장난감을 구경하고 화장실을 이용한다는 명목으로 우리 집에 와서 간식을 먹으며 놀다가곤 했다. 이런 생활이 반복되니 나의 하루는 좀 잡을 수 없게 파괴되었다. 딱 잘라 거절하지 못하고 싫은 티를 못 내는 탓에 외출 계획이 있어도 뒤로 미루었고 아이들이 어질러 놓고 정리하지 않고 가면 혼자 짜증만 뱉어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아이들 엄마와의 고리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의 교육에 있어서도 그저 내 귀는 열려있을 뿐 주관적으로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무엇이 좋다고 하면 우리 아이도 그 교육을 받아야만 할 것 같았고 첫 아이라 잘 몰랐던 나는 우리 아이만 뒤쳐지만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무조건 같이 했다. 태블릿 학습법이 좋다고 하면 우리 아이도 들여야 할 것 같았고 학습지가 좋다고 하면 우리 아이도 같이 시켰다. 특히나 학원정보는 엄마들의 반응이 절대적이었다. 우리 아이에게 맞는 것을 찾기보다는 그저 좋은 선생님만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다른 아이들도 한다는 운동은 안 하면 우리 아이만 건강하게 크지 못할 것 같았고 음악은 왠지 안 시키면 교양이 안 쌓인다고 생각했었다. 




 


 매일 아침 얼굴을 보며 등원하는 유치원 생활이 끝나고 졸업할 무렵 코로나가 찾아왔다. 코로나로 인해 아이는 초등학교에 입학하지 못하고 화상수업에 의지해서 학교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한 번도 직접 만나보지 못한 관계에서 아이들은 화상수업 덕분에 그럭저럭 안면만 틔이는 친구관계를 맺어왔고 그런 모습을 보는 부모가 된 나는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더불어 이제 엄마가 이어주어야 하는 친구관계는 자연스레 사라졌다.

  코로나 덕분에 이전의 나의 그러했던 인간관계는 아주 자연스레 정리되었다. 더구나 학교에서 더 가까운 다른 아파트로 이사를 온 덕분에 막막했던 나의 관계는 시원하게 뻥 뚫렸다.

 코로나 덕분에 사람들이 인간관계를 되짚어 보며 다시 정리하는 계기가 되어 한편으론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이제 아이는 스스로 친구를 사귀고 나는 나만의 교육관으로 생각하고 따르면 될 일이었다.


 지금에서야 조금 알 것 같다. 맞지 않는 높은 하이힐을 신고 있었던 내 모습을 말이다. 뾰족하고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걷는 나의 발은 조금씩 아파지기 시작했고 나는 꾸역꾸역 밴드와 약을 붙여가며 그 하이힐을 신고 싶어 했던 것 같다. 나에게 맞는 편한 신발을 찾아볼 할 엄두를 못 냈다고 할까. 

 



이제 나에게 맞는 편한 운동화를 신기로 했다.

30대의 후반이 되니 조금씩 나에 대해 아는 것 같아 다행이다.

예상치 못한 코로나가 우리의 삶을 힘들게 했지만 나의 관계는 깨끗이 낫게 해 줘서 감사하다.



사진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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