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이세계

겨울비의 도시

by 윤담

비가 내리는 겨울의 도시는 하나의 풍경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비는 쉬지 않고 내려 도시의 외곽을 조금씩 풀어헤치고,
건물과 도로는 고정된 윤곽을 지키기보다
젖은 표면을 통해 서로를 되비춘다.
이 계절의 도시는 ‘보이는 대상’이라기보다
오래 지속되는 하나의 조건에 가깝다.
비가 시작되면 가장 먼저 변형되는 것은 인간의 이동 방식이다.
보폭은 짧아지고, 속도는 의지라기보다 환경의 리듬에 맞춰진다.
사람들은 여전히 목적지를 향해 걷지만
시선은 멀리서 현재로 끌려와
발치의 물기와 바닥의 기울기,
아주 작은 미끄러짐 같은 것들에 붙는다.
판단의 기준이 먼 목표가 아니라
지금 밟고 있는 순간으로 옮겨간다.
우산 아래의 얼굴들은
서로를 피하는 쪽으로 정렬된다.
고개는 낮아지고, 몸은 제 반경 안으로 조금씩 수축한다.
비 오는 거리에서 관계는 말보다 간격으로 유지되고,
사람들은 스치되 침범하지 않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동선을 미세하게 수정한다.
그 조심성은 예의라기보다
젖은 공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본능에 가깝다.
비에 젖은 공기는
시각보다 먼저 신체에 닿는다.
습기는 옷감의 결을 따라 남아
머리칼과 피부에 붙고,
숨을 약간 얕게 만든다.
도시는 더 이상 외부의 배경이 아니라
몸 안으로 스며든 환경이 된다.
이 시기 인간은 걷는 것이 아니라
도시와 계속 협상하고 있는 듯하다.
한 발 한 발이 합의에 가깝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등의 색은 예전만큼 절대적이지 않다.
초록은 허용처럼 보이되 전적인 보장이 아니고,
빨강은 금지라기보다 권고에 가깝다.
사람들은 규칙을 따르면서도
그 규칙을 있는 그대로 신뢰하지는 않는다.
비의 도시는 같은 제도 아래에서도
서로 다른 판단의 여지를 남겨둔다.
모두가 같은 신호를 보지만
같은 확신을 갖지는 못한다.
젖은 도로 위에서 빛은 한 번 더 굴절되고,
사람들의 그림자는
현실과 반사 사이에서 흔들린다.
그 위를 지나는 인간들은
확정된 존재라기보다
이 조건 속에 잠시 배치된 움직임처럼 보인다.
도시는 사람을 배경으로 밀어두지 않고,
사람과 도시를 같은 층위에 올려놓는다.
누가 중심인지가 흐려지는 순간이 생긴다.
배수구로 물이 흘러드는 소리는
도시의 여러 곳에서 반복된다.
도시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배출하지만
완전히 비워지지는 않는다.
젖은 신발과 축축한 양말,
피부에 남는 냉기는
그날의 시간을 신체에 직접 각인한다.
비의 기억은 의식보다 감각에 먼저 저장된다.
나중에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남아 있는 쪽이다.
잠시 해가 얼굴을 내밀어도
도시는 곧장 밝아지지 않는다.
빛은 젖은 표면 위에서 퍼지고,
환해지면서도 선명해지지 않는다.
이 불완전한 명료함 속에서
사람들은 쉽게 속도를 회복하지 못한다.
이미 몸이 환경의 규칙을 익혔기 때문이다.
되돌아가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이 거리를 걸으며 비의 도시가 인간을 압도하거나 위협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안다.
다만 인간을 덜 단정적인 존재로 만들 뿐이다.
조금 느리게, 조금 조심스럽게,
조금 더 ‘상태’에 가까운 방식으로.
비는 여전히 내리고
사람들은 계속 이동한다.
이 겨울비의 도시는
이름으로 규정되기보다 조건으로 지속되고,
그 조건 속에서 인간과 도시는
서로를 바꾸려 하지 않은 채
같은 시간을 천천히 통과한다.
마치 젖은 바닥을 밟을 때처럼,
조심스러운 확신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