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 집순이의 '혹시나 병' 도진 여행 준비물 리스트
항공권도 결제했고, 대략의 일정도 정리되었는데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건 전편에도 쓴 바 있듯이 숙소 찾기였다. 2+3인의 조합을 위해 무난한 숙소 찾는 것이 뭐 그리 어렵냐고 할 수도 있겠다.
결정적으로 나의 정신을 사납게 했던 건 사실 다른 이유였는데 그것은 유럽 여행을 말하기가 무섭게 딸려 나오는 이야기, 바로 베드버그 때문이었다.
하필 우리가 여행을 준비하던 때는 유럽이 베드버그로 가장 여론이 좋지 않고, 이로 인한 이슈가 피크에 달했던.. 온갖 괴담과 공포심을 유발하는 ‘베드버그 물린 썰’이 혐오스러운 사진과 함께 인터넷을 뒤덮었던 시기였다.
주변 사람들에게 여행 간다고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왜 이런 때에 파리를 가냐, 베드버그 얼마나 심한지 모르냐, 엥? 그다음엔 심지어 런던이야? 미쳤냐, 애까지 데리고 왜 가냐, 차라리 이번 여행은 왠만하면 캔슬해라’ 라고 했을 정도였으니….
더 무서운 건 실제 사용자 리뷰들이었다. 오, 괜찮은 것 같은데? 해서 들여다보는데 후기들의 날짜 간격이 갑자기 뜨문뜨문해지면서 왠지 모를 쎄함이 느껴진다? 백 프로입니다.
오픈 리뷰에 외계 한국어로 “욝끼 쪌뙈 갸찌 먀쒸귈 봘랍뮈댱. 이론 땨뷸띠별…. 췸뙈 뿰뤠 냐와떠 졀롸 멍멍이 궈쇙함. 별 다섯개 추천, 않니.. 봔의 봔의 뱐도 좐뉘 아꺄봐요.^^ = “여기 절대 가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런 (욕).... 베드버그 나와서 개고생 했습니다. 별점 반의 반의 반 개도 아깝습니다.”
별 다섯개 추천 같은 문구는 실제 사용자 리뷰 이벤트 참여를 위한 연막일 뿐, 한국 사람들만 읽을 수 있는 글이 쓰여있으면 백 프로 베드버그, 또는 우리가 절대로 만나고 싶지 않은 그 어떤 무언가를 만난 곳이니 믿고 거르면 된다. 네.. 그래요.. 미리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차게 둘이라도 갈 거야, 했던 나는 갑자기 쫄보가 되었다. 여론이 너무 좋지 않으니 한없이 주눅 들고.. 내가 부모님에 아이까지 대동하고 괜한 짓 하는 건가 싶어서 하루에도 몇 번이나 가지 말까 싶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랴,’ 라는 옛말이 떠올랐다. 거기도 다 사람 사는 동네인데.. 정작 프랑스, 영국에서 사는 사람들 얘기 들어보면 물론 아주 없는 얘기는 아니지만, 또 그렇게까지는 아니라고 하는데 대체 이 밑도 끝도 없는 도시괴담은 어디서부터 출발한 거지? 누군가 나서서 공포심을 조성하고 유럽 가지 말라는 프레임을 조장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은 의심까지 들 지경이었다.
1번이 베드버그라면 2번은 소매치기.. 갑자기 다가와서 말 걸고 조악한 물건 같은 거 보여주며 쇼맨십으로 정신을 쏙 빼놓은 다음 얼타고 있는 사이 당신의 최신식 휴대폰 및 럭셔리 가방, 지갑을 싹 털어간다고 했다.
이들은 잘 잡히지도 않거니와 법이 닿지 않는 범위의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모르는 집시들이 대부분인데, 설령 눈앞에서 앳된 집시 소녀가 당신의 가방과 지갑을 털어가는 광경을 목격하고 현장에서 즉시 잡았다 하더라도 집시 소녀는 결코 혼자서 행동한 것이 아니며, 대부분 무서운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최대한 직접적으로 부딪힐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 했다. 차암.. 신변 안전을 위해 털면 차라리 털려라, 라니.
이들도 보는 눈이 높아졌는데 (맨날 하는 게 적절한 털이 타겟 물색인데 그럴만도 하다..) 주요 타겟이 한국 사람들이라고. 한껏 차려입었지, 화려하게 꾸몄지.. 샤넬, 에르메스, 루이뷔똥, 셀린느 등의 명품 쇼핑 꼭 하는데다 캐쉬도 많이 갖고 있어서 백발백중 털린다고 했다.
새로 산 맥북이며 여권 든 지갑까지 싹 다 털리고 알거지 되어서 여행 망친 사람들.. 눈물 이모티콘에 흑백 썸네일 유튜브 영상들 주루룩 보내주면서 조심하라고 했다. 물론 아이 데리고 여행하면서 그런 럭셔리 아이템으로 휘감고 다니지도 않을테지만 ㅎㅎ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정신 똑바로 차리고 다녀야겠다고.
여행 중 가족들 건강. 한 사람이라도 어디가 아프거나 다치거나 하면 여행은 전면 중단이다. 모두의 건강, 컨디션이 너무 걱정되었다. 영양제를 종류별로 그득그득 싸갔다.. ㅎ
날씨 (제발! 별 다섯 개). 사실 베드버그도 소매치기도 문젠데, 여행의 성패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어쨌든 날씨다. 제발 날씨요정이여, 우리 가족과 함께해주새오......... (기도손)
여기에 나의 슈퍼집순력 & 불안증에서 기인한 ‘혹시나 병'까지 도졌다. 그야말로 집착광공 모드로 다이소며 쿠팡을 죄 쓸어왔다. 쿠팡에서 온 수많은 봉다리들과 차닥차닥 쌓인 수십 개의 박스들로 문이 안 열릴 지경이었으니;; 진심 여행 준비물만 기 십만 원 쓴 것 같네..
베드버그 및 모든 벌레 방지: 비오킬***** 베드버그에는 비오킬이라고.. 큰 사이즈로 세 통 (!!!) 가져갔다. 가방의 절반이 비오킬. 왜냐면 일단 식구가 많고 침대도 많을테니까요…ㅋㅋㅋㅋㅋㅋㅋ 항간에는 비오킬도 소용없고 무조건 스팀 청소기 최고 온도로 다 지져버려야 된다고 했지만 여행자는 선택권이 없으니까..
벌레 퇴치제: 바르는 것, 뿌리는 것, 롤온 타입 전부 챙겼다. 가족들이 나의 벌레 퇴치제 라인업에 깜짝 놀라서 너 뭐 세스코냐고.. 놀리든 말든 나는 벌레가 진짜 미치게 싫고 유럽 벌레는 진심 단 한 마리도 만나기 싫었다. 해충박멸!
소독 스프레이: 살균소독수 가져간 거 수시로 분무하고.. 독일제 임프레산 스프레이도 너무 잘 썼다. 디자인이 아주 직관적이라 왠지 신뢰가 더 가는 느낌이라며..
알콜 스왑: 저는 평소에도 알콜 스왑 달고 삽니다. 예.
소독 티슈 / 시치미 쓱 꼬마 물티슈: 이유 상동.
유럽은 공공 화장실이 많이 없는데다 항상 1-2유로씩 돈을 내야 된다. (개인적으로 아주 치사하다고 생각함 ㅎ) 있다고 해도 시설도 구리고 커뮤널 (남녀 공용)이기 까지.. 그래도 소독 티슈 있으면 화장실 갈 때 찝찝하지 않을 수 있다. 크리넥스 소독 티슈 진짜 사랑해요. 몇 박스 째 썼는지 모릅니다......
시치미 쓱 꼬마 물티슈는 쪼꼬매서 마이크로 사이즈 핸드백에도 쏙 넣어가지고 다닐 수 있다. 우리나라야 노상 물티슈를 쓰지만 (너무 많이 쓴다고 생각하긴 합니다..) 유럽은 물티슈도 잘 없다. 아이랑 같이 다니면 물티슈야말로 필수템인데 많이 챙겨가서 잘 썼다.
캐리어용 체인: 긴 걸로 구입해서 기차 짐칸 핸드레일이나 기둥에 둘둘 감아 가방 연결해 놓는 용도로 사용했다. 엄마아빠는 ’딸,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니, 우리 그렇게 여행 많이 다녀도 단 한 번도 도난사건 따위는 없었는데.‘ 라고 잠시 피곤해하기도 했지만 우리 모두의 쾌적하고도 마음 편안한 여행을 위한 장치라 생각했다. 우리의 이 소중한 가족 여행을, 그게 뭐가 됐든 도난 사고 따위로 망칠 수 없어........
자물쇠: 연결고리가 긴 것은 가방 지퍼에, 캐리어용 체인에 달아서 사용. 서너 개 구입해 가서 소매치기에 전혀 자각 없는 가족들에게 배부했다.
휴대폰 스프링: 이 역시 손목과 연결하는 타입, 고리, 카라비너 달린 타입 등 여러 개 구입해서 휴대폰 촬영에 진심인 아부지와 폰? 뭐 안 보면 그만이지~ 하는 엄마, 그리고 동생에게 고루 나누어주었다. 나는 기능성 바람막이 주머니 안쪽 깊이 달린 고리에 달아서 썼다. 나중에 얘기할텐데, 큰일 날 뻔했던 순간에 고맙게도 큰 역할을 해주었다. ㅎ
기내용 비상약: 비행기에 가지고 탈 해열제 (비행시간이 길기 때문에 교차 복용이 필요할 수도 있으니 아세트 아미노펜, 이부브로펜 두 종류 모두), 지사제, 알러지약, 밴드, 코피솜, 알콜스왑..
여행용: 항생제 들어간 감기약, 귀 체온계, 면봉 등. 그리고 혹시나, 만에 하나 재수 없어서 그 녀석을 만났더라도 여행 전면 중단하고 돌아올 수 없으니 스테로이드 들어간 리도멕스, 모든 피부 질환에 쓸 수 있는 라벤다 연고, 그리고 먹는 항히스타민 계열 약을 챙겨갔다. 부디 쓸 일 없길 바라면서.
비타민: 평소 먹는 비타민 + 여행 중 피로회복제 등..
기내용 놀이세트: 어린이 스도쿠 책, 퍼즐놀이, 미로 찾기 등의 플레이북, 종이접기, 색연필 등.
태블릿 & 헤드폰: 넷플릭스 시리즈 오프라인으로 다운 받아가기. 헤드폰은 물론 기내에서 제공하기도 하지만, 본인 꺼 챙겨가기.
에어태그: 기차 여행 갈 때는 캐리어 안에 넣어서 위치 추적 되게 했고, 나라 간 이동 후에 돌아다닐 때는 아이가 계속 매고 다닌 까까 가방 바닥 또는 등 쪽 공간에 에어태그를 넣어주어서 한국에 있는 아빠도, 옆에 있는 엄마도 실시간으로 위치 추적이 가능하도록 했다.
UV 차단 기능 있는 우양산, 우비, 손바닥만 하게 접히는 벙거지 모자 (갑자기 비 와서 헤어스타일을 망쳤을 때 좋았다), 목도리, 장갑, 두꺼운 바람막이, 경량패딩.. 변화무쌍한 유럽 날씨에 바로바로 대비할 수 있도록 준비물을 챙겨갔다.
필터 샤워기: 사흘 쓰고 이동하느라 필터를 꺼냈더니 와우, 세상에.. 위의 사진 한 장으로 이유 설명 끝.
스프레이 탈취제 & 돌돌이 & 얼룩제거제: 오래 여행하는데 특히 겉옷 같은 건 세탁 및 드라이를 할 수 없으니 그날그날 빠른 처치(?) 필요. 돌아다니면서 묻은 먼지도 털고, 음식 먹다 흘린 자국도 제거하고, 꿉꿉함도 없애주고, 향기도 좋아지고..
멀티 어댑터 & 멀티 충전기: 일명 주먹 어댑터. 여러 종류로 코드를 바꿀 수 있는 멀티 어댑터랑 5핀, USB C 여러개 한꺼번에 충전할 수 있는 고속 멀티 충전기와 전선 골고루 챙겨갔다. 참고로 슈퍼집순이는 가전제품 배터리 100% 충전에도 진심입니다....... ㅎㅎ
고무줄 달린 베갯잇: 식구 수 대로 빨아서 삶아서 빠짝 말려서 아기용 거즈수건 마냥 멸균지퍼락에 모셔갔다. 하이고, 유난이다.. 라고 하셨지만 여행지 베개 상태가 어떤 지 모르자나…. 있으면 다 쓰게 되어있어. ㅎ
캡슐형 세탁세제 & 이염 방지 시트: 유럽 세탁기… 물도 안 좋고 세탁 시간도 엄청 길어서 무조건 빨래는 색상 구분 없이 한 번에 해야 하는데, 가족들 옷 안 망치고 세탁하려면 이염 방지 시트는 필수다. 아이의 납작한 플라스틱 색종이 통에 쏙쏙 넣어가니 찌그러져서 터질 일도 없이 아주 딱 맞고 좋았다.
여행용 압축 파우치: 광고 엄청…. 나오는 바로 그 회사 제품으로 샀으며.. 유럽 여행 후 바로 캐나다로 가게 되는데, 도착할 때는 이미 겨울일 테니 경량 패딩이며 두꺼운 다운 점퍼까지 반드시 챙겨가야 했다. 28인치 캐리어 두 개에 두 사람의 사계절 옷가지 및 신발, 가방 등을 다 챙겨야 됐다. 특히 아이 짐을 챙기다 보니 생각보다 자잘한 게 많아져서.. 여행용 압축 파우치 다양한 사이즈 여러 개 구매하여 꽉꽉 채워 요긴하게 썼다.
타월지 슬리퍼: 호텔이라면 일회용 슬리퍼를 제공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우리는 에어비앤비 구간이 많았고, 집에서도 항상 슬리퍼를 신는 습관 때문에 타월지로 된 슬리퍼를 여러 개 사가서 가족에게 배급해 드렸다. 슬리퍼가 나오자마자 오, 역시!!! 가 나왔다. 살충제나 도난방지 같은 건 세스코 반응이 아주 별로더니.... 아니, 내가 준비물로 돈을 얼마나 썼는데 쓰레빠가 제일 반응 좋았네..... 쩝. ㅠㅋ
이렇게 난리부르쓰를 춘 덕분인지 다행히도 우려했던 문제는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베드 버그 가는 곳마다 매트 뒤집고 플래시 비춰보고 뺑뺑 돌아가면서 소독하고 쓸고 닦고 뿌리고 난리 쳐대는 나를 보고 깔끔 킹인 아부지도 ”마 대따! 인자 고마 쫌 해라~“ 하심.
정말 너무 감사하게도 우리가 갔던 모든 숙소들 컨디션이 좋았다. 특히 프랑스 에어비앤비가 위치와 가격은 너무 좋았는데 후기가 별로 없고, 전문 업체가 관리하는 호텔이 아니다 보니 아무래도 건물도 낡고 바닥도 끼익 거리고 여러모로 걱정했으나 편히 잘 있었고, 베드버그 없었던 것만으로도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날씨 16박 17일 동안 딱 이틀 정도 빼고는 여기가 파리라고? 진짜 이게 런던이라고? 라는 말이 계속 나올 만큼 맑고 쾌청했다. :)
건강 아무도 아프지 않고 낙오자 없이 모든 스케쥴 소화하고 무사히 자-알 다녀왔다! 정말 다행이고, 감사.. 울 엄빠 & 아이 체력 무슨 일인지. 우리 자매들보다 좋았다. 반성하라 나여.. 동생이여 ㅠ
여행 계획 vs. 실제 그날그날 가족들의 컨디션과 체력에 따라, 갑자기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고도 유연하게 K-직장인 모드를 풀가동하여 계획을 집행, 조율했다. 역시 인생에서 단 하나도 쓸모없는 경험이란 없는 거야. ㅎ
그리고 나, 왕적응에 변화무쌍한 상황도 오케이인 건 알았는데, 정말 몰랐지만, 아주 많이 계획형이었다. 뭔가 준비된 대로 챡챡 진행되고 맞아떨어질 때의 뿌듯함이 이루 말로 못했다.
아아.. 퇴사 후에야 찾은 적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