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더 나은 (better) 어른이라는 표현은 너무 포괄적이니 적어도 지금보다는 좀 더 삶에 대한 또렷한 비전이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뭐랄까, 이렇게 사는 것이 정답이다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렇게 살면 되겠다 정도의 확신(confidence)정도는 있겠거니.
그러나 웬걸 이 나이는 처먹고 여전히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앞으로 뭘 해 먹고살아야할지 무엇 하나 확실한 게 없다. 그래서 나는 현재 내가 인식한 나의 성격적 특성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의 약점은 아래와 같습니다
나는 결핍을 잘 다스리지 못한다.
특히 배가 고프면몹시 예민해지는 편이다.
정확히는 배가 고파도 먹을 수 없는 상황을 견디지 못하는 게 아니라 밥을 먹기로 결정한 후 발생하는 변수들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이를테면 먹으러 가기로 한 메뉴에 생각지도 못한 웨이팅이 있거나, 음식점이 문을 닫았거나, 가는 길에 어떤 일이 생겨서 방향을 우회해야 하는 상황들을 몹시 짜증스러워한다.
또 나는 중독에 취약한 편이다.
나는 술 담배를 좋아한다.
지금은 다리를 다치고 현재 9주 차 금연 중이다.
이쯤 되면 완전히 끊었을 법도 한데 여전히 담배가 생각나도 당장이라도 한대 피우고 싶다.
수술 후 12주 차가 되면 완치 범주에 든다고 하니 그때부터는 다시 흡연을 할 생각이다. 물론 전처럼 serial smoker보다는 casual smoker가 될 생각.
술은 말할 것도 없다. 2주 전 금요일부터 저번주 수요일, 그러니까 5일 연속으로 술을 마시다가 장염에 걸려 밤새 고생을 해놓고 이틀이 지나 이제 좀 회복되었다고 느끼자마자 바로 술을 마셨다.
결핍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중독에 취약한 인간인만큼, 나는 중독되기 쉬운 것들은 되도록 피하려고 애쓰는 편이다. 대표적으로 게임 그리고 만화 혹은 드라마 같은 시리즈 물이 있다.
나는 한번 게임에 빠지면 늘 나만의 목표를 만들곤 하는데 현실과 타협하는 법이 없다. 보통 그러한 것들은 결과 위주로 설계된 목표라서 달성 후에는 상당한 시간을 흘려버린다. 그 시간을 인지하면 소위 말하는 '현타'에 직면한다.
만화 혹은 드라마 같은 시리즈 물은 더 환장할 노릇인 게 한번 보기 시작하면 시간이 흐르는 것을 실시간으로 인지를 하면서도 도대체 멈추기가 힘들고, 등장인물의 감정선에 몰입을 하기 시작하여 일상생활에도그 감정선이 영향을 받아 좀 이상해진다고나 할까나.
약점아 넌 왜 태어났니?
이렇게 인식한 나의 vulnerableness의 공통점을 찾게 되었다. 나는 어떤 결핍이 느껴졌을 때 그것이 즉각적으로 해소가 되어야 하며, 통제가 어려운 중독 대상으로부터 도망을 다닌다는 점에서 나는 중독, 결핍에 취약하다기보다는 통제 불가한 상황을 견디지 못하는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미시적으로 보면 충동적이고 성격이 급하며, 거시적으로 보면 모든 상황을 통제 가능한 범주 안에 두려고 하는 특성이 있다.
보통 이런 특성을 인지하면 원인을 찾는 분석이 앞서기 마련인데 사실 원인을 인지하는 것은 결과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이건 성향이라기보단 기질적인 특성이라고 생각이 되었기 때문. 우리 가족들 다수가 이런 기질을 갖고 있으니까. 기질적인 특성에 무슨 원인이 필요한가 싶은 그런 느낌. 유전에 이유가 어딨 나.
그럼에도 나는 보다 명확하게 분석을 위해서는 여러 원인들을 탐색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그 과정에서 내 과거와 현재 삶의 위치를 들여다보게 되었는데 그러니 더 또렷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나는 보상지연을 견디기 좀 어려워하는 특성이 있다는 것. 쉽게 말해 나는 참을성이 좀 부족하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 삶의 타임라인을 들여다보면 그것이 더 명확해진다. 나는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내 방식대로 삶을 구축해 왔다. 그리고 그렇게 구축한 삶의 골조는 즉각적인 보상이 이루어지는 현장 위주에서형성되었다. 또래가 공부를 해서 세분화된 점수 체계를 통해 피드백을 받는 방식으로 인생의 골조를 쌓아 올릴 때, 나는 일을 해서 월급을 받는 방식이 누적되어 현재에 이르게 된 것.
내가 채택한 방식에는 크리티컬 한 문제점이 있는데 영업직이 아닌 이상
내가 일을 어떻게 하더라도 내가 갑과 계약한 특정 보상이 약속되어 있다는 점이다.
내가 일을 망쳐도 예상된 범주 내에서의 보상이 확실하며 이 단위는 길어봐야 한 달이다. 그러니 장기적인 계획을 확립하고 내 인생을 거시적으로 설계하며 실행해 나가는 방식, 그러니까 장기전에 약해진 것이다. 모든 일은 장기전이 될수록 다양한 변수에 노출된다. 이 변수를 실패가 너그러이 용인되는 '학생'의 울타리 안에서 직면하며 경험했다면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는구나'의 태도를 학습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결과에 도달했다.
* 사실 뭐 그냥 고졸 타이틀에서 기인한 열등감일 수도 있는데 원래 인간은 사회의 절대다수에 속하지 못하면 본인이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 않을까? 아닌가 아닌 사람도 있겠지 근데 난 아님.
물론 대학을 나왔다고 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하여 삶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방법이나 보상지연을 견디는 역치가 높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이 분석이 유의미하다고 보는 이유는
원인이 무엇이 되었건 이제 내가 앞으로의 삶에서 연단해 나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인지했다는 점, 그리고 원인을 인지했으니 그 원인을 어떤 방식으로 내 강점으로 만들 것인지를 고민할 수 있다는 점이다.
40대에는 좀 더 나은, better 하고 confident 한 어른이 되기 위해서 30대에 이르러서야 분석하는 나의 약점이 창피하기도 하지만 이대로 굳어버려 꼰대가 되는 것보다는 나은 어른이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