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 4년차가 되면서 두문불출하고 졸업논문을 작성하고 있다. 지난 3년간 필드워크를 하며 데이터 수집을 하는 과정에서도 이런저런 느끼는 것들이 많았는데, 졸업논문을 작성하면서는 그와는 또다른 것들이 보인다.
학계에 자기민족지학(autoethnography)연구로 박사과정생, 초기경력연구자, 원로연구자 등 다양한 위치의 연구자들이 연구 과정에서 일어난 성찰들을 공유하곤 하는데, 사실 가끔은 그보다 더 날것의 이야기들을 듣고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연구하면서 뭐든 떠오르는대로 적어뒀던 것들을 남겨본다.
1. 레퍼런스의 원문이나 데이터, 통계자료의 원본을 확인하는 것은 좋은 습관이지만 시간과 에너지가 매우 많이 든다. 특히 100페이지 이상의 레포트나 책이라면 더더욱!
2. 연구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의 데이터에서 최대한 다양한 해석을 이끌어내는 것인가보다. 그러니까 데이터를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리저리 비틀어보기를 요구하는 것 같다.
3. 그래서 데이터를 서술적으로 풀어내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운 작업이고 어쩌면 AI가 더 잘할 수도 있는 영역이지만, 그 데이터의 내외부에 존재하는 배경을 한데 엮어서 새로운 해석을 도출해내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인 것 같다. 뉴런을 연결시켜내듯이 짱구를 계속 굴려야 하는 일이라 하루 이틀로는 뿅하고 되지 않는 것 같다.
4. Figure나 Table등 데이터의 시각화는 생각보다 중요하고 품도 많이든다. 여러 정보가 한데 들어가야 할 경우 디자이너 수준의 굉장한 창의력이 요구되기도 한다. 특히 인간 데이터를 다룰 때는 더욱 고려해야할 것이 많다. 심지어 성별 데이터의 색상을 고르는데 gender-free colors를 써야하는 것까지 고려해야 할 때도 있다.
5. 박사과정, 연구과정 중에 한번쯤은 정신적 회피의 시기가 오는 것 같다. 내 연구의 퀄리티에 대해 자신이 없기도 하고, 너무 큰 산이 눈 앞에 있고 그것을 넘어야 한다는 생각에 압박감이 심하게 들기도 한다.
6. 그래서 나의 원대한 목표와 비루한 현실의 균형을 잡아내야 그 괴로움이 조금은 줄어든다.
7. 결국 내 연구과정에서 하는 모든 일들은 내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것 그 이상으로는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내 수준을 받아들이는 일이 필요하다. 나의 사고는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입니다. 라고 인정하고 이를 밝히는 것. 그 밖의 나머지에 대해서는 Future work라고 멋있게 말하면 된다.
8. 어쨌든 연구자는 자기 사고 틀의 바운더리를 계속해서 가늠해보고, 그 사고의 원류를 되짚어보며, 그 안에서 자신만의 논리적인 구조를 세워나가는 일을 끊임없이 해야 하는 것 같다.
9. 연구는 많은 부분이 결국 논리 싸움이다. 끝까지 논리로 밀고 나가도 밀리지 않는 논리싸움. 그렇게 끝까지 밀고나갈만큼 단단한 논리구조를 세우려면 다소간 사람이 질겨야 한다.
10. 말은 이렇게 하지만 끝까지 논리를 밀고 나가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방대한 레퍼런스를 살펴보고 그것을 통해 내 논리의 빈틈을 완벽하게 없애보려고 시도하지만, 하다보면 포기하고 이쯤해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11. 예를 들어, 내 논리인 A에 대해 B라고 비판하는 것을, C라는 논리로 방어했는데, 알고보니 C에는 D라는 비판이 있었던 거다. 그래서 또 이를 E라는 논리로 방어했는데, E에는 F라는 약점이 있었던 거다. 게다가 A와 E만 떼어놓고보면 너무 동떨어진 것들이라 그다지 처음과 끝이 맥이 잘 이어지지 않을 때 논리의 비약이라는 것이 생기기도 한다. 이럴때면 이쯤하고 포기하고 싶다.
12. 인간 데이터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 한 줄에서 그 사람의 인생이 어느정도 보일 때가 있다. 1행짜리 데이터에 그 사람의 인생의 축소판이 들어있어서, 그 행을 주욱 따라가다보면 굉장히 슬프고 고통스러운 부분도, 다행이다 싶은 부분도 나온다. 데이터 뒤편의 인간이 주는 무게는 막중하다.
13. 작업을 오랜 기간 동안 집중해서 하다보면 무의식중에 어떤 생각들이 튀어나올 때가 있다. 그럴 때는 꼭 기록으로 남기는 습관을 가지면 좋다. 그런 쪽글들이 나중에 다 메뉴스크립트의 한 부분이 된다.
14. 분야를 막론하고 데이터분석에서 가장 이슈가 되는 것은 Data dimensionality reduction이다. 즉, 고차원의 데이터를 적절히 분석하기 위해서는 결국 단순화가 필요하다는 문제인데, 근 100년 가까이 데이터가 쌓여온 분야들을 보면 결국 아주 단순한 통계기술로도 정확한 결과가 나온다. 그러니 어쩌면 연구에서도 여전히 simple is the best이고 튜닝의 끝은 순정이라는 말이 맞을지도.
15. 과도하게 복잡하고 어려운 방법론을 쓰는 것은 사실 탄탄한 문제의식을 설정하는 데 실패했다는 사실을 위장하려는 시도일지도 모른다.
16. 초보 연구자들은 자신이 어디까지 할 수 있고, 어디까지 할 수 없는지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어떤 주제든지 굉장히 버겁고 광대해 보이기 마련이다. 물론 지도교수가 어느정도 가이드를 해줄 수는 있겠으나 결국 연구는 본인이 하는 것이라 할 수 있고 없고의 경계는 내가 그 분야에서 절대적인 시간을 쏟아야 뚜렷해지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17. Thesis dissertation을 다루는 조언서들은 모두 하나같이 연구 과정에서 겪는 일상, 생각, 경험, 아이디어, 방법론 등 모든 것들을 틈만나면 적으라고 말한다. 연구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그런거 언제 쓰고 앉아있냐 싶었는데, 3년치가 쌓이니 그게 결국 데이터가 되더라.
18. 3명이 리뷰어라면 그 중 적어도 1명은 반드시 찐한 크리틱을 남긴다. 그러니 연구 세계에서는 모두를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수를 만족시키는 것에 규범을 둔다. 이것을 멋진 말로 과학의 패러다임이라고 한다.
19. 간혹 모욕적이거나 차별적인 크리틱을 남기는 리뷰어들도 있다. 그럴 때 똑같이 모욕적 언사로 대응하는 것은 하수다. 논리로 조지는 방구석 여포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몇 번 왔다갔다 하면 미운정이 들기도 하고, 내 글에 이렇게 열정적으로 시간과 의견을 내준다는 건 사실 매우 고마운 거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20. 연구는 완벽할 수 없고, 내 라이팅도 완벽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