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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혜 Jan 12. 2024

생각의 죄의식

생각하면 이미 끝난 결과

한국의 교육 시스템은 정답을 찾는 시스템이다. 오랫동안 아이들은 자기 생각을 버리고, 정답을 찾는 연습을 하고, 전 국가적 행사인 수능이라는 시험으로 평생의 운명 같은 대학이 결정된다.


나는 통역으로 오랫동안 일을 했다. ‘아이가 엄마 덕분에 영어를 잘하겠네요’라는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내 아이들은 영어를 잘 못한다. 나는 아이에게 영어를 가르친 적이 없다. 내가 가르치는 것과 내가 영어를 하는 능력은 완전히 다르다. 나는 영어를 지금도 학습하기만 하고 가르치지 않는다. 내가 메시지를 어떻게 잘 전달할까에 초점이 맞춰진 영어전문가라면, 타인이 영어를 잘할 수 있도록 영어 교육법에 초점을 맞춰진 영어 전문가는 아니다. 통역을 하다 보면 ‘영어를 가르쳐 줄 수 있냐, 영어 티칭을 해줄 수 있냐’는 문의가 종종 있지만, 나는 내가 영어 선생님으로서는 정말 별로라고 자신한다.

아이들은 나에게 영어 관련 질문을 하지 않는다. 영어를 배우기 시작할 무렵 아이들이 묻는 영어 관련 질문에 대답하면 “엄마 말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선생님한테 다시 물어봐야겠다” 고 했다..

영어 잘하는 엄마를 이용하는 건, 단지 사전 찾기가 귀찮아서 “엄마 00가 영어로 뭐 더라!!!” 이럴 때만 활용하는 게 엄마의 영어 실력이다.  


고등학생인 첫째가 문제집을 사야 한다고 해서 함께 서점에 들렀다. 서점에서 시험 대비 문제집 중 영어 수능 문제가 있었다. 아이가 지문 하나를 보여주며 풀어보라고 했다.

갑자기 발동하는 나의 자존심, 그래도 내가 영어 통역사인데, 뭐 이 정도는 풀 수 있겠지 라는 생각으로 지문을 읽었다.

지문의 내용도 괜찮았고, ‘이런 내용들은 어디에서 발췌한 거지’라는 생각도 하며 읽고 있는데 아이가 갑자기

 “땡”이라고 한다.

"엄마는 이미 원하는 대학 못 가!!"

“무슨 소리야, 나 아직 읽고 있다고!”

“엄마 그런 속도로 읽으면 지문 다 읽지도 못해, 그럼 결국 문제를 다 못 풀어!”


지금의 교육 시스템에서는 난 대학 가기 힘든 사람이었다. 생각을 하다 간 시간이 흘러간다. 내 생각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빠르게 정답을 찾는 스킬이 필요했다. 장문의 지문을 읽고 어떻게 그렇게 빨리 답을 찾을 수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시간이라는 제약 안에서 적어도 지문을 모두 읽어 보기라도 하려면 무언가 중요한 포인트를 찾는 방법이 있어야 할 것이고, 이런 방법을 영어 학원에서 가르칠 것이다.

한국의 교육 시스템은 생각을 배제한 정답에 가까워지는 방법을 익혀야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

이런 학습에 익숙하고 그에 맞춰서 열심히 공부한 똑똑한 누군가는 좋은 대학에 갈 것이고 좋은 회사에 취업할 것이다.


네트워크 장비 고객 경험 조사 인터뷰를 하고 있다.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대기업의 상당히 높은 직급 분들과 인터뷰를 매년 진행한다. 처음에는 독일에서 온 질문지를 그대로 번역해서 질문을 던졌다.

예를 들어,

‘우리 제품/서비스가 당신의 회사에 주는 가치는 무엇인가요?’

‘우리 제품/서비스가 당신에게 주는 가치는 무엇인가요?’

이런 질문들은 한국 고객들에게 던지면, 다시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건가요? 무엇이 알고 싶은 건가요? 질문을 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겠어요?’

 독일에서 보내온 질문지에서 ‘우리 제품/서비스가 주는 가치’라는 질문은 정답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장황할 수 있는 고객의 입장에서 나오는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이다.

성능적 측면의 장단점, 서비스 장단점 이런 논리적 사실이 아닌 고객이 경험한 주요한 사건과 기억을 통해, 고객이 생각하는 진짜 가치를 찾고 싶은 것이다.    

성능이 좋다고 한참이나 이야기했지만 그래도 안 사는 이유는 비싸서 일 수도 있고, 브랜드 이미지가 좋지 않아서 일 수도 있다. 아님 제품을 판매하는 담당자의 서비스 마인드 부족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미운 담당자에 대해 험담처럼 언급하고 싶지 않을 수 있다.

품질에 대한 불만이 많은 고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구매를 한다는 것은, 내가 일을 열심히 안 하는 것 같아 공식적으로는 알리고 싶지 않은 사실이지만 내 업무 부하를 확 줄여 주는 효과가 있을 수도 있다. 이런 메시지들은 객관식 정답처럼 A. 품질, B 성능, C. 서비스의 개념으로 정리되기 어렵다.

분명 플러스 마이너스의 모든 관점과 그럼에도 결정에는 중요한 결정적 요인이 있을 수 있고 이는 대화를 통한 메시지로 흘러나오는 것들이다.   

이런 장황한 스토리 속에서 찾아낼 수 있는 중요한 인사이트를 위해 포괄적인 열린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정답을 말해야 한다는 한국의 학습된 생각에는 ‘무엇이든 말해도 돼요’의 의미는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의 반응을 유발한다.

생각을 좁혀주고, 그 좁은 생각 속에서 가장 올바른 답을 찾을 수 있도록 질문을 세분화해야 했다.

인터뷰를 하다 보면, 자신의 생각을 많이 표현 한 고객의 경우, 한참 말을 하고 나서는 “내가 너무 내 생각만 이야기했네요.”라고 자책하며 ‘내가 정신 차려야지’라는 태도를 보이는 분도 있다.

정작 우리가 듣고 싶은 것은 고객의 그런 생각이었는데도 말이다.


생각에 정답이라는 것이 있을까?

어떤 생각이든 우리는 할 수 있고, 그게 올바른 생각인지 아닌지 만 판단하면 된다. 올바르지 않은 생각은 행동으로 이어지지만 않는다면 그런 나쁜 생각도 누구나 해볼 수 있다.

우리는 결국 성인이 되고 나서야 정답 없는 삶을 살아가며 생각의 가치를 조금씩 알아간다. 그리고 생각하는 삶의 방법을 다시 학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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