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각형 Dec 19. 2023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 by 다치바나 다카시



얼마 전에 브런치스토리에서 눈에 띄는 제목의 글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축구광들이 축구에 대한 얘기에 빠져들듯이 애서가들이 책에 대한 얘기를 마다할 리가 없다.

그 글을 유심히 보다가 이 책을 쓴 작가에 대한 희미한 기억이 떠올랐다. 20대 때 여동생이 사 온 책이었는데, 매일 스타크래프라는 게임에 빠져 살한량인 내게 책을 던지면서 "놀지만 말고 이 책도 읽어봐. 오빠한테 도움이 될 거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 책을 읽으며 내 기억에 남아 있던  다카시 작가는 책을 살 때 한 번에 20~30만 원어치를 구입한다는 것이었다. 지금 시세로 따지면 대략 30~40만 원어치의 책을 한꺼번에 사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소장하고 있는 책을 보관하기 위해 도쿄에 고양이 빌딩이라는 것을 건축했다는 정도가 기억에 남아 있었다. 20대의 나는 1년에 책 한 권을 읽을까 말까 할 정도로 책과는 담을 쌓고 지냈기 때문에 그의 독서론을 읽고 내 나름대로의 자극제가 되어주길 바랐었다.

십수 년의 세월이 지나고 책을 가까이 한 최근 10년 동안 글을 읽을 때 그 작가가 가끔씩 떠오르긴 했었다. 하지만 작가의 이름은 통 기억이 나지 않았었는데, 그의 이름이 바로 다치바나 다카시였다.

브런치스토리에 올려진 독후감을 읽고 책에 대한 관심이 생겨 찾아보니 추억 속 한켠을 장식하고 있던 작가의 글이었기에 반가운 마음에 그 즉시 구입해 읽기 시작했다. 아직 다 읽은 건 아니지만, 대충 훑어보니 이 책은 다카시가 강연에서 했던 말을 글로 엮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문어체보다는 구어체가 읽기에 훨씬 수월한 법이다. 그래서 생각보다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빨랐다.

그의 독서여정에 대한 소회를 풀어낸 글이다 보니 애서가를 자처하는 나로서도 자연스럽게 깊이 몰입하여 탐독하기 시작했다. 읽고 있던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을 집에 두고 대신에 다카시의 책을 들고 출근할 정도로 관심을 집중했었다.

그러다 고전과 문학 서적을 읽는 것에 대한 그의 의견이 펼쳐지는 대목에 이르자 잠시 책을 덮고 상념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글은 바로 그러한 상념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중 내 나름대로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한 것을 옮겨 놓자는 마음이 들어 펜을 들게 된 셈이다.

우선 다카시의 고전에 관한 의견을 말해보고자 한다. 다카시는 100년 전의 책이 아니라 500년 1000년 전의 책이야말로 진정한 고전이라고 주장했다.

나도 가끔씩 누군가에게서 고전 중에 읽을 만한 책을 추천해 달라는 부탁이 들어올 때마다 사실 고전이 과연 100년 전의 책도 포함하는지 의문이 들곤 했었다.

보통 고전은 과거에 쓰인 책이 현대인들의 심금을 울려 시대를 관통했을 때 붙이는 자격과 같은 걸로 쓰이는 단어이다. 이렇게 희미한 의미로 고전을 정의한다면 100년 전의 작품도 고전의 격을 갖출 수 있긴 하다.

그러나 100년 전의 작품이 향후 100년, 200년의 세월을 관통해 나갈 수 있을지 사실은 우리로선 알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다. 다만 500년 전, 1000년 전의 책이 지금도 읽히고 있다면 그 책은 고전임에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카시가 제시한 기간인 500년과 일천 년의 기준은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의 논지에 있었다.

다카시는 고전을 과거 인류가 쌓아온 지의 총체적 합이라고 했다. 그리고 비록 지의 총체적 유산일지라도 그중에서 현재 소수의 개인들만 읽는 책은 더 이상 유효한 고전이 아니라고 했다.

그 예를 토마스 아퀴나스와 칸트, 헤겔 등 대단히 난해한 책으로 들면서 다카시 자신도 그런 난해한 글들을 읽으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다고 일갈했다. 또한 플라톤에 대해서는 "막상 실제로 읽어보면 되게 시시한 내용이지만 이 책을 읽음으로써 토론을 할 수 있다는 점으로는 의미 있는 고전 독서가 된다"라고 말했다.

플라톤의 대화 편을 다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다카시가 그런 말을 하게 된 동기는 이해가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로톤이라는 채석장에서는 지금도 놀라운 발굴을 할 수 있다는 점에 있어서 고전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다카시의 논지 중에서 특히 주목해야 하는 점은 더 이상 읽히지 않는 고서는 고전이 아니다는 주장이었다. 단지 난해하기만 할 뿐 현대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라든가 의미가 없다면 충분히 그런 평가를 들을 만하다.

하지만 현대인들의 삶에서 독서가 차지하는 비중이 거의 0에 수렴하고 있다는 점을 함께 고려해 보면 단지 읽히지 않는다고 해서 고전으로서의 가치가 상실되고 있다는 판단을 내릴 순 없다. 현대인들은 손바닥만 한 기계로 세계와 접촉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활자보다는 영상매체에 더 쉽게 자극되는 정도일 뿐이다. 그런 성향의 대중에게 읽히지 않는다고 해서 고전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보나 지적으로 보나 흠이 없지는 않다.

또한 현대인들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해서 고전이 아니라는 근거도 마땅치 않다. 물론 필요가 없는 곳에 의무가 없기 마련이다.

그러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 고전이 고전으로서 내포하고 있는 가치를 폄훼하지 못한다. 이건 고양이가 시와 숫자 앞에서 아무런 지적 호기심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도 하다.

달라스 윌라드에 따르면 생명이란 구체적인 관계에서 행동하고 반응하는 능력을 말한다. 따라서 난해하고 복잡한 고전 앞에서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고전에 대해 아무런 생명력을 갖추지 못한 존재에 불과한 것뿐이다.

절대다수가 그런 생명력을 결여하고 있다고 해서 고전작품의 가치가 사라진다고 보는 견해는 지적 세계를 소비자중심으로만 바라본 한계에 봉착하고 만다. 지적 세계도 다른 생태계와 마찬가지로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균형과 성장이 필요한 법이다.

그리고 문학작품에 대한 의견도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다. 다카시는 물론 그 누구보다도 다독가여서 일반적인 애서가들보다도 읽은 문학작품의 수가 훨씬 많을 것이다.

그런 그조차도 문학을 읽는다는 점에 회의의 눈빛을 보내고 있다. 그의 독서이력을 가만히 검토해 보면 그는 매우 이지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이었다.

감정보다는 이성과 의지의 작용을 훨씬 더 중요하게 여긴 지적 호사가였다. 지적 호기심은 누구보다도 많아서 한 분야를 연구하기 위해 입문서부터 시작해 최근 연구 논문까지 읽어내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다카시 본인조차도 일반적인 유형의 독서가가 아니었다. 모르긴 해도 그는 감성을 일깨우는 글보다는 이성의 작용을 일으켜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일에 매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성향을 가진 애서가가 자신의 독서론을 대중에게 얘기할 기회를 갖게 된다면 당연히 문학보다는 논픽션의 독서를 강조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그는 소설의 최대의 라이벌을 영상매체로 주목했는데, 영상매체에 의해 급격히 얄팍해진 독자층을 근거로 고전으로의 편입 여부를 판단하는 오류를 범했다.

하지만 세계를 구성하는 인간은 이성뿐만 아니라 감정과 의지를 지닌 존재다. 이 세 가지가 모두 균형이 잡혀야만 세계와의 관계도 건강해질 수 있다.

따라서 감정을 다루고, 그 감정에 의해 움직이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려낸 문학을 읽는 것이야말로 이지적 성향인 사람에겐 한쪽으로 치우칠 수 있는 오류를 줄여나가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다카시 작가는 누구보다 더 많은 문학작품을 읽는 사람이긴 했다.

다만 그와 같은 대가가 꺼낸 독서론이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게 된다면 문학 읽기의 중요성도 누군가는 언급해야만 한다.

아직 그의 책을 100페이지도 읽지 않았는데 이토록 할 말이 많이 쌓여 있었다. 그의 책을 통해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다카시의 책도 고전에 속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남기며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앞으로 그의 책장을 넘기면서 파고들어 갈 그의 지적 세계가 어떤 그림을 그려낼지 기대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쓰메 소세키를 기리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