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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준비하는 농부

by 장발그놈

한 농사꾼이 있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밭에서 평생 배나무만 길러왔다.

봄마다 나무에 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가을이면 탐스러운 배가 주렁주렁 열렸다.

그때마다 농부의 마음은 든든했다.


젊은 시절, 그의 배밭은 늘 풍년이었다.

배는 집안의 살림을 책임졌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게 해주었으며, 겨울을 지낼 양식을 마련해주었다.

가을 수확철이면 트럭 가득 상자를 싣고 도매시장으로 향했다.

상자를 열면 반짝이는 배들이 가지런히 담겨 있었고, 상인들은 배를 하나씩 들어 빛깔을 살펴보고 맛을 보았다.

“역시 ○○ 농장 배는 다르구먼. 이 정도면 손님들이 줄 서서 사겠어.”


상인들이 서로 먼저 사겠다며 값을 매길 때, 농부의 가슴은 벅차올랐다.

그의 땀으로 키운 배가 시장에서 인정받고, 손님들의 식탁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그 돈으로 그는 집을 고치고 논밭을 늘려나갔다.

농부의 손은 거칠었지만 마음만큼은 풍요로웠다.


그러던 어느 해 가을, 일이 벌어졌다.

농부는 며칠 동안 밤을 새워 배를 선별하고 포장했다.

크기별로 나누어 정성껏 골랐고, 직접 만든 상자에 깔끔하게 담아냈다.

박스 옆면에는 자신의 이름과 연락처까지 찍었다.

“이 정도면 단골 손님들이 분명 좋아하겠지?”


그는 새벽 트럭에 상자를 실어 단골 상인들에게 직접 배달했다.

몇 년 전만 해도 그가 가져가는 배는 금세 팔려나갔다.

상인들은 '역시 OO농장 배가 최고지!'라며 믿고 사갔다.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상자를 열어보곤 잠시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올해도 배가 좀 작네? 맛도 덜한 것 같고... 우리도 손님들한테 팔기 어렵겠어.”


어떤 상인은 아예 상자를 닫으며 말했다.

“미안한데 다른데서 구매해야할것 같아요.”


세월은 모든 것을 바꾸었었다.

십 년, 이십 년을 버틴 배나무들은 어느새 늙어가고 있었다.

꽃은 예전처럼 풍성하지 않았고, 열매도 점점 작아졌다.

당도는 떨어지고, 저장성도 약해졌다.

겉보기에는 멀쩡했지만 맛은 예전 같지 않았다.


농부 자신도 그것을 잘 알았다.

하지만 그는 매번 똑같은 이유를 대며 나무를 베어내지 못했었다.

“나무를 베면 올해 당장 수확이 줄어들 텐데... 그럼 당장 어떻게 먹고살지?”


그는 늘 한 해만을 생각했고, 그 타성이 쌓여 어느새 습관처럼 굳어졌다.

그날 밤, 그는 밭을 거닐며 늙은 배나무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은 마치 자신과 같았다.

타성에 젖어 살아온 지난 세월이, 결국 밭도 자신도 함께 늙게 만들었음을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다음 날, 농부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모자를 눌러쓰고 농업기술센터를 찾아갔다.

낯선 강의실, 빼곡히 적힌 교육 일정표, 책과 자료들...

직원은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농부는 쑥스럽게 모자를 벗으며 대답했다.

“이제라도 배워야겠습니다. 한해 한해만 바라보다가 이 꼴이 됐습니다.”


직원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오셨습니다. 요즘은 많은 분들이 품종 갱신과 새로운 작물 재배법을 배우러 오십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직원은 농부를 안내해 강의실로 이끌었다.


그는 그곳에서 새로운 농업기술을 배웠다.

품종 갱신 방법, 토양 관리 요령, 그리고 다른 작물의 가능성까지.


처음엔 생소했지만, 배우면 배울수록 그의 눈은 밝아졌다.

그중에서도 마음을 끈 것은 블루베리였다.

배와 수확 시기가 크게 겹치지 않고, 소비자들의 관심도 높았다.

무엇보다 푸른빛 열매가 그의 새로운 시작을 상징하는 듯 보였다.


그는 결심했다.

늙은 배나무 수십 그루를 베어내고 그 자리에 새 품종의 배를 심었다.

블루베리는 배와 토양 조건이 달라 따로 구획을 나눠 묘목을 들여왔다.

삽을 들 때마다 오래된 굴레를 벗겨내는 듯한 해방감을 느꼈다.

“이제는 한 해만 보는 농부가 아니다. 배우고, 노력하며, 내일을 준비하는 농부가 될 것이다.”


밭은 이제 블루베리의 푸른빛과 함께 한층 다채로워졌다.

무엇보다 달라진 것은 밭이 아니라 농부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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