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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준영 Oct 26. 2024

John Wayne

나는 너의 존 웨인이 되고 싶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5gjHFmi2Co




추천 위스키: Blanton's Original Single Barrel



"결혼하고 싶었던 사람은 있어요?”     


바 주인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네..있었죠. 제 첫사랑이에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녀에 대한 추억을 더듬었다. 감았던 눈을 뜨자, 바 주인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마치 오래된 필름의 한 장면처럼, 유림의 모습이 내 기억 속에서 천천히 떠올랐다.     


나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몇년 전, 학교 선배가 창업한 영화 배급사에 다니고 있었어요. 휴일이었던 어느 날, 선배의 집에서 파티가 있었고 그녀를 만났죠.”     


바 주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귀를 기울였다.     


유림. 그 이름을 떠올리면 내 영혼의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울린다. 그녀의 존재는 마치 한 폭의 수묵화처럼 내 기억 속에 스며들어 있다.     


그녀의 단아함은 고요한 연못 같았고, 그 품위는 오랜 세월을 견딘 고목처럼 깊었다. 유림에게서 나는 향기는 마치 첫 새벽 이슬 같아서, 그 청아함이 내 감각을 깨웠다.     


눈을 감으면 지금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머리를 올리는 그녀의 손길, 그 동작 하나에도 우아함이 깃들어 있었다. 길고 가느다란 목덜미에서 시작된 선은 발목까지 이어져, 마치 달빛에 젖은 비단결 같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또 어떠했던가. 황금빛 들판에 녹색 숲이 어우러지고, 그 위로 갈색 저녁놀이 내려앉은 듯했다. 그 눈을 들여다볼 때마다 나는 오래된 사찰의 단청 앞에 선 것처럼 경외감을 느꼈다.     


유림... 그녀는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꿈이자, 가장 아픈 현실이었다.     


"시끌벅적한 파티에서 우리 둘은 눈이 마주쳤어요. 유림이는 그런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싫어하는 눈치였고  눈치챈 저는 손짓으로 같이 나가자는 제안을 했죠.”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바 주인이 물었다.     

"모두가 잠든 시간, 우리는 성북동 한 바퀴를 함께 걸었어요. 그동안 수 없이 다녔던 성북동, 늘 오갔던 길이었지만 그 날은 왠지 길이 상대적으로 너무 짧게 느껴졌어요. 한 시간 남짓했던 산책이 끝났죠.“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회상에 잠겼다. 그 날 밤 유림이의 옆모습이 달빛에 비쳐 더욱 아름답게 보였던 순간이 떠올랐다. 바 주인은 조용히 기다렸다.     


"유림이를 집에 데려다 주었고 간단한 인사를 하고 계단에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봤어요.  찰나의 1분을 놓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유림이에게 입맞춤을 했어요.”     

"아비에게 1분이 있었다면, 손님에게 1분은 그 순간이었네요."

바 주인은 안경을 고쳐쓰며 말했다.      


"화양연화. 그 순간이 시작이었죠.”     


그녀의 웃는 얼굴은 환한 아침 햇살 같았다. 하지만 그 눈부신 미소 뒤에 무언가 빠져있다는 걸 나는 느꼈다. 이상하게도 한여름이었는데 그녈 보고 있으면 겨울 냄새가 났다. 마치 비에 젖은 채 둥지를 잃어버린 아기 새 같았달까.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꾸만 그녀에게 다가가고 싶어졌다. 황야를 달리던 존 웨인이 길 잃은 아이를 발견했을 때 느꼈을 법한 그런 감정이었다. 그녀를 품에 안고 보호해주고 싶은 강한 충동이 일었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허공에 메아리칠 때마다, 나는 그 소리 뒤에 숨겨진 아픔을 들을 수 있었다. 그녀를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내 마음을 점령해갔다.    

 

"혹시....어떤 상처가 있었던 건가요?"

"네... 그녀는 5살 때 어머니를 잃었어요. 가족이 있지만 뭐랄까... 한 번도 타인에게 징징거리지 못한 장녀 역할이 그녀에게 큰 부담이었던 것 같아요."     


유림이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자 가슴이 불에 데인 듯 욱신거렸다.


"그뿐만이 아니었어요. 유림이는 어린 시절부터 완벽주의에 시달렸죠.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항상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진짜 모습을 잃어갔어요. 그녀의 웃음 뒤에는 항상 불안과 공허함이 도사리고 있었죠."    

바 주인은 동정 어린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우리는 나이만 먹었지 늘 어린 시절의 꼬마니까."      

"유림이에겐 엄마 품에서 칭얼거리는 그런 게 필요했어요. 그녀는 항상 남에게 최선을 다하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솔직하지 못 했어요. 제가 그 역할이 되어주고 싶었고요."    


100일이 지날 무렵, 나는 처음으로 유림이의 집을 방문했다. 문을 열자마자 나는 충격에 빠졌다. 그녀의 우아한 외모와는 달리, 그 집은 마치 버려진 창고 같았다. 몇 년을 살았다는 공간에 커튼 하나 없었고, 옷가지들이 무질서하게 쌓여있었다. 매트리스 하나가 방의 전부였다.     


그 텅 빈 공간을 보며 나는 그녀의 내면도 이렇게 비어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화려한 겉모습 뒤에 숨겨진 그녀의 공허함이 이 집에 고스란히 드러난 것 같았다. 그 순간 나는 그녀의 빈 공간을 채워주고 싶다는 강한 욕망을 느꼈다.     


"유림이의 단단한 외면 속에 숨겨진 연약한 내면을 보았어요. 그래서 나는 유림이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기로 마음먹었죠. 하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나요?" 바 주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봤어요. 어지러진 집을 정리하고, 옷장을 채우고, 집 곳곳에 아름다운 꽃과 화사한 식물들을 들여놓았죠. 유림이의 빈 공간을 채우려 노력했어요. 하지만...”

    

잠시 말을 멈추고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유림이의 손목에 자상이 늘어갔어요. 어떻게 해도 그녀의 마음속 빈 공간을 채울 수 없었죠.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묵묵히 옆에 있어주는 것뿐이었어요. 정신과 진료도 받고, 명상 치료도 해봤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어요."  


"아... 저런."   

바 주인의 목소리에는 안타까움과 탄식이 묻어났다.

당시 나는 무력감에 사로잡혀서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유림이 앞에서만큼은 의연하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강인한 모습을 보이려 노력했어요. 그녀의 손목을 감싸 안고, 눈물을 닦아주며, '괜찮아, 내가 있잖아'라고 속삭였죠. 하지만 내 마음 속에서는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어요. 그녀를 구원하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한 무력감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죠."     


바 주인은 깊은 동정심을 담아 말했다.

"정말 힘든 시간이었겠어요. 그녀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셨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지만 결국...”     


지금은 사라진 남산 힐튼호텔에서, 우리는 마지막 섹스를 하고 있었다. 그녀와 하나가 된 순간, 갑자기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순간, 더 이상 무엇도 이어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모든 것이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끝나가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처럼, 우린 그저 흩어질 뿐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스친 표정은 너무나 복잡해서, 나는 도저히 읽어낼 수 없었다. 그 눈물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마치 세상의 모든 무게를 한 번에 내려놓은 사람처럼, 그녀의 눈동자는 나를 넘어 저 멀리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우리의 관계가, 아니 어쩌면 그녀의 삶의 한 장이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나는 그저 그 순간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눈물로 쓰고 있는 작별 편지를.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나는 끝을 직감했어요. 그저 그녀의 눈물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죠. 우리의 마지막 순간은 그렇게 어색한 침묵 속에서 흘러갔어요.”     


"제가 헤어지자고 했어요." 나는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바 주인은 놀란 듯 보였다. "왜요?”     


"그녀를 놓아주는 것이 그녀를 위한 최선이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녀의 마음속 구멍을 채울 수 없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아니 제가 너무 지쳤었어요.”     

"이대로 끝인 건가요?"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요. 이제 시작이에요."     

"목숨을 걸고 기다렸어요. 2년의 기다림이 지금의 제 병을 만들게 한 것이고요.”     

바 주인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병이요?"

"네, 췌장암 4기래요... 오늘 알았죠.”     

바 주인은 충격 받은 듯 잠시 한동안 말을 잃었다. 그리고 나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회사에서 정리해고를 당했다는 것이...”     

“네. 맞아요.”      

“아니 젊은 사람이 어쩌다가...”

나는 테이블 옆에 무수히 쌓여있는 담배꽁초와 빈병을 말없이 바라봤고 그제야 바 주인은 이해를 했다는 듯 조용히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유림....은 어떻게 됐나요?"

"1년이 지났을 무렵... 아주 짧게 잠시 재회한 적이 있었어요."

"왜 그전엔 먼저 연락 안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리석었어요. 후회돼요. 유림이가 먼저 연락해주길... 먼저 다가와 주길 기다렸거든요. 제가 다가갔어야 했는데..."     

"모든 건 타이밍이죠......"     


새해가 지나고 며칠이 안 지날 무렵, 나는 유림이를 그녀의 회사 근처에서 만났다. 그녀를 만나기 전, 겉보기에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려고 그동안 안 잘랐던 수염과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손 편지도 이틀 동안 한자 한자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헤어지기 전 깜짝 선물로 주려고 했던 러브레터 LP도 함께 준비했다.     


카페에 그녀가 나타나기 10분 전, 나는 초조함에 손바닥에 땀이 맺혔다. 심장은 마치 달리기 경주를 하듯 빠르게 뛰었고, 머릿속은 온갖 생각으로 가득 찼다. "잘 할 수 있을까? 내 마음이 제대로 전해질까?"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1년 동안 수없이 리허설했던 말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매일 밤 별을 세며 잠들었어." 이런 식의 과장된 말들은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대신 진실 된 마음만을 전하기로 결심했다.     

드디어..드디어.. 내가 그토록 기다렸던 그녀를 만났다. 나는 그녀를 보자마자 조심스레 포옹을 했고 등을 살짝 다독이며 "보고 싶었어"라고 나지막이 말했다. 1년 만에 만난 그녀는 역시나 아름다웠고 내가 좋아했던 뽀얀 피부는 마치 달 항아리처럼 곱게 빛이 났다.     


나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떨리는 손으로 메뉴판을 집어들었지만, 글자 하나 읽을 수 없었다.    

  

"잘....지냈어요?" 그녀가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응...." 나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찻잔만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고 나서 나는 본격적으로 말을 했다. 당신이 나에게 어떤 존재였고 내가 어떻게 기다렸는지. 그리고 미안하다고. 하지만 당신은 미안해 할 필요가 없다고. 설령 마음 정리를 했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하얀 도화지 상태로 만들어서 나의 이야기와 편지를 읽어 달라고. 하지만 거절을 해도 그녀가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전혀 없으니 거부의 답장을 안 줘도 괜찮다고 말했다.     


'너의 상처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했으면 좋겠어. 하지만 말이야, 혹시라도 앞으로 긴 인생을 살면서 가끔 안 좋은 생각 그리고 안 좋은 행동을 생각을 할 때 나라는 사람을 한 번 돌이켜 봐줬으면 좋겠어. 너는 정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사람인데 그리고 그런 너를 내가 사랑하고 또 기다리는 그런 마음. 나를 보지 말고 내 마음을 봐줘. 그래서 네가 스스로 보잘 것 없다고 생각을 할 때 당신을 좋아하고 사랑했던 나의 마음을 이용해줘. 단지 그뿐이야. 나 다시 안 만나도 돼.   

그러니깐 끝까지 살아. 건강해.

난 네 상처마저도 사랑해.’     


바 주인은 깊은 공감을 담아 듣고 있었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그 순간을 떠올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는 저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을 만나서 정리하려고 나왔던 것 같아요. 그녀의 깊은 배려심을 저는 잘 아니깐요.”    

 

그녀에게 마지막 말을 전한 뒤 나는 한 동안 '살아갈 이유'를 못 찾았다. 왜냐하면 그녀를 잠깐 만나기 전까지의 기다림이 살아갈 이유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이후로도 계속 기다렸고 신께 기도를 했습니다. 그녀를 달라고. 부처님께 삼 천배를 했고, 무당에게 찾아가서 굿도 벌리고 눈이 멀었죠.”     


바 주인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절실하게 기다리셨군요.”     

나는 그녀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아마 손님이 그걸 해서 살았던 것 같네요.”     

"맞아요. 그건 사념이었어요. 제 목숨을 걸고 지킨 순수한 기다림. 만약 그렇게 안 했더라면, 저는 뉴스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그녀를 찾아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지도 몰라요."     

"지금은 어때요?” 바 주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두 번의 봄이 오고 나서야 비로소 시간 앞에 무릎을 꿇었어요. 이제야 이별을 받아들였습니다.”     

"후회하거나 원망스럽지는 않아요?”     

"네. 제가 스스로 몸을 망친거지. 그녀 때문은 아니에요. 다만 미안한 건 제 자신입니다.”     

바 주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오늘 신이 저에게 장난을 쳤어요."

"네?"

"병원에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오늘, 경복궁에서 그녀를 보았어요."

"네??!!“     


햇살이 부드럽게 내리쬐는 봄날 오후, 경복궁 안 아름드리 큰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보았다. 그 순간, 마치 시간이 멈추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남자는 한 손에 책을 들고, 다른 손은 벤치에 느긋하게 얹은 채 편안하게 앉아 있었다. 그의 표정에는 여유와 평화가 깃들어 있었다. 유림이는 임신으로 살짝 부른 배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남자의 무릎에 머리를 고였다. 그녀는 눈을 감고, 마치 그들의 아이가 자라는 생명의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는 듯했다.  놀랍게도, 유림이의 얼굴에는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평화로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의 미소는 더 이상 공허하지 않았고, 눈빛에는 생기가 돌아와 있었다. 그녀가 찾아 헤매던 그 '무언가'를 마침내 발견한 듯 보였다.

    

나는 멀리서 유림을 지켜보았다. 벤치에 앉아 있는 유림은 너무도 행복해 보였다. 나는 유림과 내가 더이상 아무런 상관이 없는 관계가 되어버린 현실에 마음이 아렸다. 그녀의 얼굴에 비친 미소는 봄날의 햇살처럼 따뜻하고, 그 눈을 감은 모습은 평온함을 가득 담고 있었으며, 그녀의 행복 속에서 내가 설 자리는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실감했다.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이 떠올라서 슬펐고 나는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 그 때 어떤 기분이었어요?" 바 주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기도를 했어요. 남은 생명을 태워서 그녀와 그녀의 가족의 행복으로 가 달라고.”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바 주인은 내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제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그녀가 진정으로 행복해 보였거든요. 그동안 그녀의 공허함을 채우려 애썼던 제 노력들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죠. 비록 그 공허함을 채운 건 제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녀가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바 사장은 나의 말에 할 말이 없이 그저 묵묵히 듣고 있었다.     

"이제는 비로소 내가 괜찮은 남자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이제야...이제야... 시작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깨닫게 된 순간에  끝이네요. 떠나야하네요."    


그 순간 넓은 대양의 바다가 한 방울의 용액으로 압축이 되듯, 아주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을 심장에서부터 눈까지 천천히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흘린다. 이어서 나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억지로 참으며 꺼억꺼억 소리를 낸다.     


바 주인은 조용히 일어나 내 곁으로 다가와 어깨에 손을 얹었다. "손님. 우세요. 펑펑 우세요. 괜찮아요. 잘 기다렸어요. 잘 했어요. 정말 잘 했어요.”     


나는 마치 어린 시절 엄마 앞에서 우는 아기처럼 테이블에 엎드려 펑펑 운다. 그 눈물 속에는 그동안 참아왔던 모든 감정들이 섞여 있었다. 사랑, 후회, 아쉬움, 그리고 마지막으로 받아들임. 내 인생의 한 챕터가 끝나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바 주인은 한동안 말없이 내 옆에 서 있다가, 천천히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따뜻한 손길이 내 어깨를 가볍게 누르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바 주인이 물잔과 함께 작은 냅킨을 건네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에서 깊은 이해와 연민이 묻어났다. 아무 말 없이, 그저 그 따뜻한 시선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마지막 한 모금의 위스키를 천천히 넘기며, 나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내 앞에 펼쳐진 짧은 미래와 유림과의 추억이 오버랩 되었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았다. 유림을 향한 내 사랑, 그리고 그녀와 보낸 시간들이 내 존재의 일부가 되어 영원히 남을 테니까. 빈 잔을 바라보며 나는 고요히 미소 지었다. 생의 끝자락에서, 나는 사랑했고 또 사랑받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John Wayne     

                  그는 그녀를 정말 많이 사랑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베이비, 그는 미쳐 버렸어요

             언제나 세상에 홀로 맞서거나 그녀를 쫓는

                                    존 웨인처럼

                         베이비, 그는 미쳐버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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