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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준영 Oct 27. 2024

Tejano blue

늘 편한 사람들

 https://www.youtube.com/watch?v=--JuMkludKM




추천 위스키: Balvenie 12y DoubleWood


병원 밖으로 나서는 순간, 세상이 달라 보였다. 햇살은 여전히 따스했지만, 그 온기가 내 피부에 닿지 않는 것만 같았다. 의사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췌장암 4기입니다. 6개월... 길어야 6개월입니다."     


숨이 턱 막혔다. 눈물이 차올랐지만 나오지 않았다. 그저 헛기침만 나왔다.      


"잠깐만요, 의사 선생님."      


내 목소리가 떨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6개월이라니..."     


의사는 안경을 고쳐 쓰며 한숨을 쉬었다.    

  

"미안합니다만 사실입니다. 고통이 심했을 텐데... 왜 이제야 오셨어요?"     

 

나는 쓴 웃음이 났다. 할 말이 없었다.     


의사는 마른 체형에 금테안경을 쓴 중년 남자로, 날카로운 턱선과 침착한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암 선고를 내릴 때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으며,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에는 깊은 연민이 깃들어 있었다.     


"약으로 고통을 덜어드릴 순 있습니다. 병원에 입원하는 것은 생각해보세요. 우선 진통제랑 여러 가지 약 좀 드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담배는 좀 끊으세요.”     


“네, 알겠습니다."      


나는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머릿속은 이미 하얗게 비어있었다.     


병원을 나오자마자 담배를 연거푸 피운 뒤 정처 없이 걸었다. 한숨 속에 섞인 담배 연기가 폐 속 깊이 스며들 때, 내 몸이 생명을 더는 거부하는 듯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광화문을 지나 경복궁 안으로 들어갔다. 아름드리 큰 나무 앞에 멈추고 멍하니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주황빛 햇살 아래 시민들이 평화롭게 거닐고 있었다. 잠시 평온을 느꼈다. 하지만 곧 뱃속 깊은 곳에서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피 섞인 기침이 터져 나왔다.


손바닥의 붉은 얼룩을 보며, 처음으로 내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이 가슴을 찔렀다. 그 전까지만 해도 죽음은 멀리 있는 추상적인 개념이었다. 지금은 나의 현실이었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벤치에 앉아있는 만삭의 여자와 그 옆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고 그들의 행복해 보이는 모습에 가슴이 아려왔다.     


"어......?“     


한참 그 커플을 바라보다 여자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나는 황급히 하늘을 올려다보고  서둘러 떠났다.      


청와대 뒤 북악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오르는 길이 숨 막히게 가팔랐지만, 그보다 내 안의 공허함이 나를 더 무겁게 짓눌렀다. 헐떡이는 숨을 참으며 서울 시내를 바라보았다. 남서쪽으로는 강남의 중심지인 역삼 타워가 우뚝 서 있고, 한강변 동쪽으로는 금빛으로 빛나는 63빌딩이 눈에 들어왔다. 인왕산 맞은편 무악재에 있는 안산의 푸른 숲이 펼쳐지고, 그 오른쪽으로는 고즈넉한 연희동의 골목길들이 이어졌다. 좌측으로는 남산 타워가 서울을 지키듯 서 있고, 그 아래로는 한남동의 고급 주택들이 줄지어 있었다.     


"20년 동안 이 도시에서 살았는데..."      


서울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지만, 내 눈에는 그저 흐릿한 빛의 덩어리로만 보였다. 마치 내 인생처럼.      

20년. 이 도시에서 시간을 보냈지만, 남은 것은 흐릿한 기억뿐이었다. 성공도, 사랑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이 도시의 일부가 되어 흐려졌을 뿐이다.     


내 나이 서른 아홉. 스무 살에 영화를 하겠다고 상경해 무엇을 이뤘나. 돈도 못 벌고 작품도 남기지 못했다. 내 인생은 마치 상영되지 못한 필름처럼, 아무도 보지 못한 실패작이었다. 통장 잔고를 확인하니 한숨만 나왔다.  화면 속의 그들이 내 과거였고, 나는 그들을 꺼내지 못했다. 그저 내 손 안에만 머물렀다.     


"나는 이렇게 시시한 어른이 되기는 싫었는데...."      


내 목소리가 바람에 날려 사라졌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갤러리를 열었다. 찍다 만 영화 스틸컷들, 완성하지 못한 시나리오 메모들...꿈꾸었던 모든 것들이 화면 속에 갇혀 있었다.     


"이제 와서 후회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나는 한숨을 쉬며 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화창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비가 내렸다. 맑은 하늘에서 내리는 여우비는 어딘가 초현실적처럼 느껴졌다. 이내 비가 멈추자 마른하늘에 형형색색의 번갯불이 북악산 근처에 떨어졌다. 이윽고 서울 시내에 자욱한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빛과 어둠, 습기와 건조가 뒤섞인 이 날씨는 마치 다른 차원의 문이 열리는 것 같았다.       


"참 이상한 날씨네..."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렸다. 의사가 준 진통제를 삼켰다. 약기운이 돌자 현실감이 조금씩 흐려졌다.    

 

날이 저물 즈음에야, 나는 산 밑으로 내려갔다. 오늘 만큼은 집에 들어가기가 싫어서 경복궁역 근처를 배회하던 중이었다. 그 때 안개 사이로 처음 보는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늘 편한 사람들' Music Bar B1     


"저 바가 원래 있었나?"      


눈을 비비며 다시 보았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텐데, 오늘따라 그 이름이 낯설면서도 친근하게 느껴졌다.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잠시 망설이다 지하로 향했다. 계단을 내려가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그 느낌이 편안했다.     


"어서 오세요."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부드러운 조명이 은은하게 빛나고, 흡사 한낮의 햇살이 고요하게 내려앉은 듯 했다. 나무로 만든 긴 바 테이블이 중앙에 자리하고 있고, 테이블 위에는 손때 묻은 잔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바 테이블의 표면은 낡디 낡았지만 오랜 시간 공들여 닦고 닦은 듯 매끄럽게 반질반질 윤이 났다. 그 위에 비친 불빛이 고요하게 일렁였다. 그 불빛은 나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반사하는 것 같았다.     


천장에서는 길고 얇은 조명이 여러 개 내려와 있었다. 그 빛은 마치 담배 연기가 서서히 퍼져나가는 듯한 형상을 그리며, 전체적인 분위기를 더욱 아늑하고 몽환적으로 만들어 주었다. 바의 한 구석에는 오래된 레코드플레이어가 놓여있었는데, 그 옆 장식장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빈티지 레코드들이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레코드들 중에는 Cigarettes After Sex의 앨범이 유독 눈에 띄었다.     


"저거... 내가 좋아하는 밴드인데."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마치 누군가가 내 취향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바의 주인은 중년 여성이었다. 백발이 은빛처럼 빛나며, 손수건으로 무심하게 대충 묶은 것 같은데 머리카락 한 올마저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깊은 팔자 주름이 선명했지만 그 주름은 마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 완고한 인상을 주기보다 견고해 보였다. 마치 삶의 깊이를 보여주는 듯했다. 나이는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었다. 백발로 보면 오십 대 아니 그 이상도 넘어 보였지만 호기심 어린 눈빛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초롱초롱했다.      


"어서 오세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바 중앙에 자리를 잡았다.      


"네, 감사합니다. 여기... 처음 와봐요. 이런 데가 있는 줄 몰랐어요."     

"그래요? 저는 왠지 낯익은 얼굴인데."    


바 주인은 나를 슬쩍 쳐다보더니 무심한 듯  말문을 열었다.

그녀의 말이 이상하게 들렸지만, 그다지 신경이 쓰이진 않았다.


"아, 실례했네요. 그런데 뭘 드릴까요?"     

"커티샥 온더락으로 주세요."      


나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요."     


내 말에 바 주인이 내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섬세한 뿔테안경 너머로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 했다. 눈매는 날카롭지만 시선은 냉정하기보다 따스한 호기심이 어려있었다. 명품 같은 값비싼 옷을 입은 것은 아니었지만 깔끔하고 단정한 매무새에 고풍스런 액세서리로 포인트를 준 자신만의 스타일. 그녀만의 세련된 취향이 엿보였다.       


바 뒤에서 조용히 손님들을 맞아주는 바 주인은 말없이 묵묵히 일을 하면서도 주위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그녀의 손끝은 날렵하면서도 우아하게 움직였다. 바의 모든 것이 그녀의 손길에 완벽하게 통제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바 주인은 자신의 존재만으로도 공간을 특별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는 것 같았고 손님들은 자기 집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듯 편안해 보였다. 늘 편한 사람들. 바의 이름과 딱 어울리는 광경이었다.


손님들은 시간을 잊은 채, 담배 연기와 함께 흩어지는 생각에 잠겨있었다. 바 안의 공기는 은은한 담배 냄새와 술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있지만, 모두가 잠시나마 일상의 고단함을 잊고, 담배 한 모금과 함께 위안을 찾는 것 같았다. 사람들 한 명 한 명이 나와 닮은 그림자로 보였다.    


"여기 오시는 분들은 다 무슨 사연이 있어 보이네요."      


나는 주위를 스윽 둘러보며 말했다.

바 주인이 잔을 닦으며 슬쩍 미소 지었다.      


"그렇죠. 머. 아, 참. 근데 오늘 특별한 날이라고 하셨죠? 무슨 일 있으세요?"     

"사실... 오늘 회사에서 해고 통보를 받았어요. 20년 동안 있었던 곳에서 떠나야 할 것 같아서요.“     


바 주인의 눈이 커졌다.     


"아이고, 그렇군요. 정말 힘들겠어요. 하지만 누가 알아요? 어쩌면 새로운 기회일 수도 있어요.“     

"새로운 기회요?"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네, 많은 사람들이 익숙함에 안주하며 살잖아요. 하지만 손님은 이제 인생의 새로운 장을 열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거예요. 그것도 일종의 선물이에요.“     


바 주인의 말에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갑작스러운 시한부 선고로 인한 혼란과 불안이 여전했지만, 어쩐지 그녀의 말에서 작은 위로를 느꼈다.     


버스가 끊길 시간이 되자 바에 있는 손님들은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어느새 바에는 나와 사장 단 둘이 남았다. 바에 남은 적막이 나를 더 고립된 섬처럼 느끼게 했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오늘은 유난히 하루가 기네.“


바 주인은 혼자서 손님들이 두고 간 빈 병을 치우며 혼잣말을 했다.

그 말에 나는 주인의 눈치를 보았다. 바에 손님은 이제 나 혼자였다.      


"사장님. 저.... 일어나야 되나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아직 문 닫을 시간 안 됐어요. 여기 두 시까지 해요."

“아.....그러면..”


그녀가 따뜻하게 웃으며 날보며 말했다.      


"어차피 손님 한 명이니까...그럼 저도 편하게 있을게요."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네, 고맙습니다. 사실... 집에 가기 싫었거든요."     


내 말에 바 주인의 눈가에 알 듯 말 듯한 미소가 잠시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사장님 여기 원래 있었어요?"

"그럼요. 10년 넘게 운영했는데요? 어디 사시는데요?”

"부암동이요."

"버스 타고 집에 갈 때, 못 봤어요? 여기 정류장 앞이라 못 볼 수가 없었을 텐데."

"네. 못 봤습니다."      


나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바 주인은 그럴 수도 있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매일 지나다니는 길인데 버스 정류장 앞인데 여길 못 보다니 생각할수록 희한했다.    


"이상하네요. 10년이나 된 가게인데... 왜 한 번도 못 봤을까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 주인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때가 되면 보이는 법이죠. 지금이 바로 그때인가 봐요. 어쩌면 손님에게 필요한 순간에 이 바가 나타난 건지도 모르죠."     


건조한 대화가 끝난 후 바 주인은 마치 별 관심이 없는 표정으로 위스키 잔을 마른 행주로 닦았다. 그때,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Cigarettes After Sex의 음악이 나를 사로잡았다.     


보컬 그렉 곤잘레스의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가느다란 실처럼 얇게 퍼져나갔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흐느끼는 울음 같기도 하고, 속삭이는 비밀 같기도 했다. 사랑의 기쁨과 절망 그리고 그 사이의 모든 감정을 담고 있는 듯 했고 듣는 이의 마음 깊숙이 스며들었다. 가사는 직설적이면서도 시적인 표현으로 가득했다.     


"이 노래... 참 좋네요."      


나는 중얼거렸다.      


“제 인생을 노래하는 것 같아요."      


바 주인은 나를 지그시 응시하더니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곤잘레스의 목소리에는 뭔가 특별한 게 있죠. 숨겨진 감정을 끌어내는 것 같아요."


베이스와 기타의 연주 소리는 진공을 타고 우주의 끝까지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마치 별빛이 가득한 밤하늘 아래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음악은 나를 몽환적인 세계로 데려갔다.  


바깥 세상은 점점 어둠에 잠기고, 바 안은 음악으로 가득했다. 나는 눈을 감고 음악에 몸을 맡겼다. 종말의 시대에 매캐한 담배 향과 함께 사랑의 냄새가 흐르고, 내가 마시는 커티샥 온더락의 씁쓸한 목 넘김은 나의 삶을 대변하는 듯했다. 이 순간, 내 안에 쌓인 모든 감정을 자극하며, 무거운 공기 속에 스며들어 나를 둘러싸고 있는 우주와 하나가 되었다.     


"이상해요."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이 음악을 들으니 모든 게 무의미해 보이면서도, 동시에 모든 게 의미 있어 보여요.”


그러자 바 주인이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바로 Cigarettes After Sex의 매력이에요. 허무와 희망을 동시에 느끼게 하죠.”     

"손님도 시가렛 애프터 섹스 좋아해요?“       

"네, 좋아해요. 이 밴드의 음악은... 뭔가 특별해요. 삶의 사운드트랙 같아요."     


내 말에 바 주인의 눈썹이 살짝 올라가더니 눈이 반짝였다.     


”지금 나오는 곡이 이번에  나온 신곡인데..”     

”테하노 블루!”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 다 동시에 외쳤다. 나와 바 주인은 서로를 쳐다봤다. 그리고 동시에 웃었다.    

  그 때  바 주인이 생각 난 듯 말했다.      


"이 노래의 분위기에 딱 맞는 위스키가 있어요. 발베니 12년 더블우드... 한 번 맛보시겠어요?“     



        우리는 진정한 사랑과 함께 섹스하고 싶었어

                    달콤하고 순수하며 따뜻하게

         절대로 단순히 밤을 보내는 것만은 아니었어

               우리는 항상 그렇게 섹스하고 싶었어

                     그리고 네가 비행에서 돌아오면

              그것이 우리가 처음으로 하는 일이었어      


"이 가사... 정말 아름다워요."      


나는 감탄했다.      


"텍사스인의 블루스라...”     


그녀는  병을 꺼내며 설명을 이어갔다.      


"이 위스키는 셰리와 버번 캐스크에서 숙성돼 복합적인 맛을 자랑해요. 첫 모금에는 부드러운 바닐라와 꿀맛이 느껴지고, 그 뒤로 은은한 오크향과 견과류의 풍미가 입안에 퍼져요. 마치 이 노래처럼 달콤하면서도 깊이 있는 감정을 담고 있죠.“     


나는 위스키를 받아 한 모금 음미했다.      


"정말 그렇네요. 부드러우면서도 깊이가 있어요. 노래의 가사처럼 달콤하지만 어딘가 쓸쓸한 느낌도 들고... 이 위스키가 노래의 감정을 더 잘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 같아요.“     


"맞아요."      


바 주인이 동의하며 음악에 깊이 빠진 듯 말을 이어갔다.      


"육체적인 관계를 넘어선 진정한 연결을 갈망하는 거죠. 가사처럼 말이에요. 그가 밴드 이름을 'Cigarettes After Sex'로 한 이유도 전에 만났던 여자 친구가 관계 후에 담배를 권유해서 그렇게 된 거래요."


나는 흥미롭게 물었다.    


"정말요?"         

"그 이야기도 노래 가사 같네요."   


 바 주인은 미소 지었다.      


"그렇죠? 인생의 작은 순간들이 때로는 큰 예술이 되기도 해요."     


이내 나는 바 주인과 자연스럽게 말을 트고 있었다. 우리는 밴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조곤조곤 얘기를 하다 좋아하는 파트가 나오면 잠시 서로 입을 닫기도 했다.      


"사장님, 이런 음악을 들으면 과거가 떠오르지 않으세요?"      

내가 물었다.     


"물론이죠."      

그녀가 대답했다.      


"음악은 우리의 기억을 소환하는 마법 같은 힘이 있어요. 특히 사랑에 관한 기억들을..."     


'Starry Eyes'의 부드러운 선율이 바를 채우자, 나는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음악이 귓가를 감싸며 기억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러자 한 명 두 명.....과거에 내가 만났던 그녀들이 떠올랐다.      


달빛처럼 환한 미소를 지녔던 A, 진심 어린 애정으로 나를 바라봤던 B, 그리고 열정적인 순간들을 나눴던 C까지. 그들 각각의 얼굴이 마음속에 그려질 때마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에는 그리움과 감사, 그리고 아련한 추억이 뒤섞여 있었다. 각자의 방식으로 내 인생에 의미를 더해준 그녀들을 떠올리며, 나는 잠시 과거의 달콤했던 순간들 속으로 빠져들었다.     


"손님, 그거 알아요? 지금 이 음악 들으면서 미소짓는 게. 참 보기 좋네요."      

나는 잔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음..... 이거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곡이에요.....그때는 모든 게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았어요“     

“그때요?” 바 주인이 물었다.      

“네 이걸 들으니 사랑했던 순간이 떠오르네요. ”      

"사랑했던 사람과의 추억이라...”      


바 주인은 잔을 닦으며 나의 표정을 살피다 입을 열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선 진심 어린 관심이 깃들어 있었다.


그 순간, 바의 조명이 부드럽게 흔들리고, 음악은 나를 과거의 추억 속으로 데려갔다. 그리움과 고마움이 뒤섞인 시간. 모든 순간이 별빛처럼 빛났다.     


나는 바 주인이 권한 위스키 한 모금 음미하며 말을 이었다. 위스키의 강렬하고 복합적인 맛이 혀끝에서 퍼져나가는 동안, 나는 잠시 과거의 기억에 잠겼다.     


"이 위스키처럼 강렬했던...  제 인생에서 가장 인상적인 ...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으니까요.“     

바 주인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님. 저기. 실례지만.... 부탁 하나만 할게요. 이 앨범 전부 다 틀어주실 수 있으세요?"     

"물론이죠."      

바 주인은 흔쾌히 알겠다는 듯이 레코드를 바꿔주었다.      

“고맙습니다.”

“아니에요. 저도 좋아하는 앨범이에요.”      


나는 위스키 잔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다 잔을 들어 눈가에 가져다 대었다. 술잔에 담긴 위스키가 조명을 받아 윤슬처럼 반짝거렸다.  


 "사랑이 막 시작될 때 나를 바라보던 여자들의 눈빛도 정말 별처럼 빛났었거든요.....그래서...”     


그 때 바 주인이 불쑥 물었다.      


“그 이야기 좀 들려줄래요?”      

“네?”      

" 바로 그거요."

"?"   


나는 위스키 잔에서 얼굴을 떼고 바 주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손님의 그 사랑 이야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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