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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여름 May 24. 2023

경단녀 극복기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살아가기

*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살아가기     


 “여자가…. 그러면 안 된다카이. 니 미친나? 가시나가?”     

그랬다. 엄마도 아버지도 그러다가도      


 “여자도 일해야 하고, 여자도 성공해야 된 데이…. 절대 집에서 밥하지 마래이”    

 

 늘그막에 엄마는 그랬다. 도대체 엉켜진 그녀의 정체성을 어찌해야 할까? 실은 내게도 많은 혼란스러운 정체성이 하나 있다. 여자와 사람 그사이에 낀….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살아가기'라고 해봐야 내가 여자로서 지대하게 공헌하며 희생했다고 할 수 없어 그냥 헤게모니를 가지지 않은 ‘인간 장하영으로 살아가기’를 말해 보고자 한다. 많이 똑똑하거나 똑 부러지게 예쁜 것도 아닌 어설프게 똑똑하고 살짝 모자라게 예쁜 나는 살면서 위와 아래의 난간에 걸쳐진 경계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지극히 자의적 해석이지만, 서울대를 가지 않은 공부 잘하는 지방국립대 출신, 혹은 미스코리아를 나가지 않은 지방의 그럭저럭 예쁜 여자 정도라고 해두자. 

 바꿔 말해 서울대는 못 갔는데 조금은 똑똑해서 조금 눈에 띄는 사람. 그러니 위로 가자니 어렵고, 멈춰 있으려니 성에 차지는 않아 이것저것 해보고 노력하며 보낸 시간이 많다. 어느 정도는 주위 지인보다는 열심히 살았다. 그런 점에서 하나 느낀 건 여자, 남자의 문제보다 노력함과 덜 함의 차이가 얼마나 가치 있는 삶을 사는가를 결정한다는 걸 몸소 깨달았다는 것이다. 여자로서나 인간 장하영으로서나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살아온 바로는 세상은 불공평하지만, 어느 한 면에서는 남자나 여자 혹은 연장자나 연소자에게 평등하다. 그것은 바로 노력함의 여부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노력한 만큼의 대가가 따른다는 것은 평등하다.     


나의 단추 3개


 딸이 많은 우리 집은 요즘 애들 잘 쓰는 말로 ‘국룰’이 있다. 청바지 착용 금지, 머리를 풀어 헤쳐 다니지 않기(아버지의 표현) 머리를 묶으라는 완곡한 표현이다. 밥상에 앉아서 말 많이 하지 않기. 그중 청바지를 입지 못하는 게 제일 싫었다. 나도 흰색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머리를 한껏 풀어 다니고 싶었다. 그러나 분쟁이 싫고 큰소리가 싫어 일찌감치 포기했다. 그렇지만 사사롭게 눈치껏 하고 살았으며 나름 행복했다. 

 스물여덟 부모님 댁 근처에 작은 아파트를 얻어 독립해서 마음껏 하고 다녔다. 멋스럽게 입고, 컬러 염색을 한 적도 있다. 그렇게 자유를 누리다가 보수적인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아이를 낳아 기르니 나의 보수적인 한구석을 닮은 건지, 남편의 훈육이 그랬는지 녀석 역시 엄마에게 보수적인 여성상을 바랐다. 특히나 ‘민소매’에 대한 그 둘의 반대는 내가 마치 벗고 다니기라도 하는 것처럼 야단스럽게 대했다. 나 역시 한 번도 입지 않은 옷이라 어색했지만, 굳이 반대하니 기분이 나빴다. 




 아이가 여섯 살쯤에 우울증과 심한 두통으로 인해 한동안 일상생활이 힘들었다. 와인을 홀짝홀짝하던 것이 4~5개월쯤 되니 이것이 알코올중독인가 싶었다. 대학병원에 가서 두통약을 처방받았다. 마약성 진통제라고 했다. 그 일을 겪고 많은 걸 깨달았다. ‘담아두지 말고 말을 하자’ 그리고 ‘하고 싶은 걸 하고 살자’ 청년 시절 활기찼던 나의 경력에 비해 울산으로 와서 엄마가 되면서 나는 위축되었다. 경단녀가 된 것이다. 




  경력 단절을 극복하기 위해 이것저것 준비했다. ‘영어지도사’과정을 울산대에서 마치고 교생실습까지 하고 나니 조금 자신감이 붙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면서 약간은 성공할 수 있다는 자만까지 생겼다. 남편은 실습에 나갈 그림에 색을 입혀 주었다. 나의 또 다른 시작에 용기를 많이 넣어 주어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파자마를 입고 똥손으로 색칠을 한 그날 밤이 생각나 피식 웃는다.



 교생실습을 나가던 날 끝까지 잠갔던 셔츠 단추를 풀었다. 운동화와 글리에이터 샌들을 신었다. 단추를 2~3개 풀었더니 자유가 느껴졌다, 목까지 단추를 채워서 그게 단정하다고 평생을 생각하며 살았다. 답답해 보인다거나 융통성이 없어 보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나는 끝까지 채워 입은 사람들을 보면 답답하다. 

 영어지도사 과정을 공부하는 6개월 동안에 중학생처럼 9시에 등교하고 5시 하교했다. 울산대학교에서 교수님들이랑 한 학기를 넘기는 동안 많이 배웠다. 열심히 해서 영어원장들을 제치고 울산대학교 학장 상도 받았다. 노력하면 천재를 이긴다는 우리 아버지 말씀이 맞았다. 영어를 공부한 거라고는 고작 필리핀 ‘일로일로’에서 살았던 1년도 채 안 되는 시간이었는데 장하다 장하영. 그로 인해 나의 경단녀 6년의 세월을 마무리하고 다시 경제활동을 하는 여성으로 돌아왔다.



 지금 여자로 사는 세월에 감사한다.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게 행복이다. 열심히 노력해서 여자고 남자고가 아니라, ‘인간 장하영으로 살아가기’를 하고 있다. 샤넬 넘버 파이브(NO. 5)가 있고 핑크 파우더가 있는 한 나는 여자이고 싶고, 여자로 살아가기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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