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자라며 사랑을 배워가는 순간들
너무 멋진 그림책을 알게 되어 기록을 남기지 않을 수가 없다.
<LOVE>
글 : Matt De La Pena / 그림 : Loren Long
1.
사랑이 우리의 일상 속에, 아주 평범하고 사소한 순간들에 존재하고 있다는 걸 이렇게 잘 표현할 수가 있을까. 감탄하며 몇 번이고 반복해 읽은 책이다.
그림책은 요람 속에 누운 아기의 시선에서 바라본 엄마 아빠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사랑은 우리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존재해 왔다. 첫 문장은 창세기 1장 1절을 연상케 한다. “In the beginning there is light and two wide-eyed figures standing near the foot of your bed”
2.
이제 아기는 조금 자라 집 밖으로 나온다. 나는 신생아를 데리고 처음 외출했던 날, 그러니까 예방접종을 하러 병원에 가던 날의 조심스러움이 떠올랐다. 책 속의 화자가 택시 뒷좌석에 앉아 있다고 묘사되기 때문일 것이다. 도시의 울퉁불퉁한 길을 달리는 택시, 그 뒷자석에 앉아 흔들리는 아기, 그 아기는 “택시 드라이버가 라디오로 부드러운 사랑을 틀어놓았다”고 말한다. 모든 것에서는 새로운 냄새가 났고, 그건 ‘삶의 냄새’였다고도 덧붙인다. 실제로 그림에서는 여러 가지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택시의 매연 냄새, 산책하다 멈춰 선 개의 쿰쿰한 냄새, 공원 리어카에서 산 핫도그 냄새. 휠체어에 앉은 아이가 벤치에 앉은 노숙인에게 핫도그를 건네고 있다. 그렇지, 도시의 냄새를 완성하는 건 노숙인들이지. 인생의 냄새란 향긋하다기보단 시큼하고 구수한 것에 가깝지 않나.
3.
이 책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등장한다. 아니, 거의 모든 등장인물이 가난하고 평범하다. 지금 당장이라도 도시에 나가면 만날 수 있는 풍경들이다. 택시 운전사, 공원의 노숙자, 트레일러에 사는 가족. 물놀이는 수영장이 아닌 길바닥 스프링클러에서 이루어지며 사랑의 노래는 지하철역 앞에서 무릎이 해진 옷을 입고 있는 ‘길거리 가수’에 의해 불리고 있다.
4.
불행의 순간도 적나라하게 묘사돼 있다. 어느 날 불이 나서 갑자기 자다가 길거리로 뛰쳐나와야 했던 어린이가 있다. 그렇게 나온 길에서 소녀는 조용한 노부인을 만나는데, 그녀가 하늘의 별을 가리키며 말한다. “별은 불타고 나서 한참 뒤에 빛이 난다” 나는 작가가 ‘Grandmother’라고 안 하고 ‘a quiet old lady’라고 쓴 이유가 뭘지 상상해 봤다. 이 나이든 여성은 소녀의 친할머니가 아닐 것이다. 그날 밤 우연히 만난 사이, 재난 소식에 현장으로 달려온 어느 시민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재민이라기엔 너무 고급스러워보이는 노부인의 옷 때문이기도 하고, 이 책에 면면히 흐르는 ‘모르는 사람의 친절’에 대한 묘사 때문이기도 하다. 책의 마지막 부분, 비오는 기차역 그림에는 기차 안의 노신사가 바깥의 청년에게 우산을 건네려 팔을 뻗는 모습이 한구석에 작게 표현돼 있다. 이 청년은 뭔가 하는 일이 잘 안 풀려서 기운이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원래 청춘이란 안정적인 자리를 잡기 전의 시기이게 마련이니까. 우산도 없이 몸을 움츠리고 걷고 있는 젊은이에게 느닷없이 건네지는 이 친절을 발견하고 나는 이 그림책과 사랑에 빠졌다. 이런 시선이라면 <LOVE>라는 제목의 그림책을 지을 만 하지. 그렇고 말고!
5.
다투는 부모와 그런 집에서 괴로워하는 어린 소년도 나온다. 소년은 피아노 밑에 무릎을 껴안고 웅크리고 앉아 있다. 그의 곁에는 강아지가 있는데 코를 부비는 것도 같고 몸을 기대는 것도 같다. 이 그림은 반짝이는 별이 언제 불탄 건지 설명하는 페이지 다음에 등장한다. “넌 별만 불타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지. 여름도 불타잖아. 우정도. 그리고 사람도.” 불같이 화내는 아빠와 얼굴을 감싼 채 울고 있는 엄마, 그리고 아이. 아이는 어른의 분노만 배우지 않는다. 그를 위로하는 우정의 따뜻함에 대해서도 배운다. 사랑은 이런 순간에도 있다.
6.
이 책을 만 10살 둘째와 같이 읽었는데, 하린이가 가장 좋아한 장면은 여기였다. TV 앞에 모여 있는 가족, 친척 한 무리. 무슨 일인지 묻는 작은 여자아이와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사람들. 그날 밤 아이는 꿈을 꾸는데,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 헤매며 서랍도 뒤지고, 쿠션도 들어올려 보고, 장난감 통도 뒤집어 보는 꿈이다. 꿈에서 소녀는 아주아주 작아져 있고, 장난감과 서랍들은 거대한 빌딩처럼 커져 있다. 하린이는 소외감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마음이 위축되면 이렇게 내가 작아진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고, 그 마음을 잘 표현한 그림 같아서 와 닿는다고. 이 책의 전체 줄거리를 보면 아이의 성장에 대한 이야기인데, 아마도 이 장면은 아이가 ‘군중 속의 고독’, 외로움에 대해 처음 느껴본 순간일 것이다. 아이가 어떻게 자라는지 이토록 솔직하게, 노골적으로 얘기하는 책이라서 좋았다.
7.
내가 가장 좋았던 장면은 ‘탄 토스트’로 사랑을 비유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그동안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사랑을 알아보게 되지. 새벽에 일어나 버스를 타고 출근하는 사랑. 조금 타버린 토스트 한 조각에서 느껴지는 사랑”
그림에서 소년은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소년이 보고 있는 건 가방을 들고 일터에 나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이다. 아직 가로등이 켜진 새벽이다. 뭔가를, 어떤 비밀을, 알아버린 날이라고도 할 수 있으려나. 이제 아이는 더 이상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달라고 조르거나, 왜 소풍 도시락이 이 모양이냐고 울 수 없게 되어버렸다.
소년이 뒤돌아 있어서 독자들은 그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아이는 울고 있을까? 아마 울음을 참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조금 자랐으니까. 그렇게 웃자란 아이 곁에, 형이 있다. 토스트와 주스를 건네며. 토스트는 조금 탔다. 형도 겨우 몇 살 많을 뿐이니까. 마침내 아이는 탄 토스트에서 사랑이 맛이 난다는 것까지도 알게 됐다. 일찍 출근하는 아버지의 사랑을 넘어, 그것을 지켜보는 아이의 사랑, 그 아이를 서툴게 위로하는 ‘조금 먼저 자란 아이’의 사랑까지도 표현했다. 몇 겹의 나이테, 몇 층위의 거울 같은 이 깊이가 참으로 감탄스럽다.
8.
이제 그림책은 결론을 향해 간다. 이렇게 사랑으로 자란 너는, 마침내 출발할 때가 되었다. 강한 바람과 먹구름이 있겠으나 너를 키운 사람들, 그 사람들의 사랑이 있으니, 그들이 너의 행운을 빌어줄테니 괜찮을 거라고 말하는데, 책은 여기서 한 발 더 나간다. 행운이 아니어도 된다고. 너의 길을 떠나는 순간 네 손에 들려 있는 것은 행운이 아니라고. 사랑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