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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 재스민 Nov 23. 2019

어머니는 개가 싫다고 하셨어

세번째 이야기

  나는 어머니가 개를 좋아한다고 생각했었다. 어린 시절에 우리집에는 항상 개가 있었기 때문이다. 개가 싫다면 개를 항상 키우지는 않았을 테니까. 심지어 젊은 엄마가 개와 함께 웃고 있는 흑백 사진도 있었다.

  그런데 돌아가시기 몇 년 전쯤이었을까. 어머니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개를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해서 나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뒷통수를 맞은 듯 했다.  나는 동물을 좋아하는 기질을 엄마에게 물려받았다고 늘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동물을 정말로 싫어했으니까, 아니, 싫어했다기보다는 동물을 무서워했다. 나는 도대체 엄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던 걸까. 묻지도 않고 지레 짐작한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 그리고 엄마와 개에 얽힌 가슴 아픈 추억도 떠올랐다. 생각해보니까, 엄마가 개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다.


  나는 동물을 좋아한다. 동생들도 동물을 좋아한다. 특히 남동생 두 명은 나만큼 동물을 좋아해서 독립해서도 래트, 고양이 같은 것들을 키웠다. 나도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부터는 늘 뭔가 한 가지씩 키웠다. (내가 엄마가 됐으니 이제 내 마음대로 동물을 살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이었다.) 아이들은 대개 동물을 좋아한다. 우리 애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거북이, 앵무새, 고슴도치, 햄스터, 래트를 거쳐 지금 키우는 친칠라까지 소동물이 우리집에 항상 있었다. 개는 키울 자신이 없어서 한번도 시도해보지 않았다. 개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내가 어릴 때는 모든 집이 단독주택이었고 거의 모든 집에 개가 있었던 것 같다. 아닐 수도 있는데, 하여튼 개 키우는 집이 많았다. 하지만 요즘에 비하면 거의 개의 수난시대였다. 집에서 키우는 개들은 조그마한 개집에 묶여 있는 경우가 많았다. 개들은 절대 집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개들은 방범용이거나, 남은 밥 처리용이었다. 도둑도 많았고 거지들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그 많던 거지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3세대 이상 함께 사는 집이 많았고, 아이들도 많았기 때문에, 그 많은 식구들이 전부 집을 비우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집을 나설라치면 개한테 집 잘봐라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동네를 활보하는 개들은 그나마 행복한 개들이었다. 동네 골목에서는 늘 애들 소리가 들렸고 애들끼리 하는 놀이들도 다양했다. 온갖 잡기에 능한 애들이 스타였다. 학교에서는 열등생이었더라도 방과 후 골목 학교에서는 그런 애들이 우등생이었다. (그런 애들은 후에 마음을 다잡고 우등생이 될 수도 있었다. 뒤늦게 시작했다고해서 늦는 법은 없었다.)


  우리집을 거쳐간 개들은 다섯마리 정도였던 것 같다. 나는 강형욱이 진행하던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를 보면서 우리가 개한테 해서는 안 될 일을 많이 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우리는 개한테 무슨 짓을 한 걸까.)

  나는 어린 아이였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모든 결정권은 엄마한테 있었다. 엄마가 키운다고 하면 키우고 키울 수 없다고 하면 못 키우는 거였다. 진짜 무서운 개들도 키웠다. 셰퍼트라는 개는 늘 큰 우리 속에 갇혀 있었는데 늘 화가 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 안을 미친 듯이 왔다 갔다 했다. 우리를 보면 미친 듯이 어댔다. 나는 그런 개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절대 친해질 수 없는 개라고 선을 긋고 정도 주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런 근육질 개들은 밖에서 충분히 활동을 할 수 있게 했어야 했던 것이다. 잘못한 건 개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라는 말이 맞다. 우리집 개들은 개로 태어난 탓에 불행하게 살다 갔다.


  잊을 수 없는 개가 한 마리 있다. 그 개를 생각하면 지금도 너무 가슴이 아프다. 노란색의 짧은 털을 가진 개였다. 어떤 품종의 개였는지 알 수 없고, 어떤 연유로 우리 집에 오게 됐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히 이름이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기억에서 지워졌다. 그냥 어느날부터 우리집에 있었던 개였다. 다른 개들과 다르게 그 개는 풀어놓고 지냈다. 개는 자유롭게 마당을 오갔고 우리를 보고 컹컹 지도 않았다. 순한 개였다.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개를 세워서 안으면 거의 내 키만 했다. 무게도 꽤 나갔다. 성질 급한 나는 개를 안아서 옮겼다. 내가 그런 짓을 해도 개는 가만히 있었다. 밖에 혼자 마실을 갔다가 알아서 집을 찾아올만큼 영리한 개였다.  대문이 닫혀 있으면 문을 열어달라고 나무 대문을 갉아댔다. 대문 귀퉁이가 그 개 때문에 닳아없어졌다.  개는 분명 우리 식구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개가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누렁이를 누군가에게 줘버렸다고 했다. 엄마는 늘 혼자 결정하고 즉각 실행에 옮기는 터라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뭔가 석연치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캐묻거나 칭얼대지 않았다. 엄마에게 통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밥상머리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누는 대화를 듣고 누렁이가 아버지의 몸보신 용으로 희생됐음을 알게 됐다. 그 순간, 아무 느낌이 없었다.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을 때, 아무 느낌이 없다는 것은 위험신호다. 일종의 강한 방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감당하지 못할 것을 알고 미리 몸이 방어를 하는 것이다. 현실로 받아들이기를 몸이 거부하는 것이다. 그 뒤로 몇 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개가 잊혀지지 않을 줄 몰랐다. 저 밑바닥에 깔려 있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다. 불쌍하다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누렁이가 느꼈을 배신감이 내 마음 속에 잔여물로 남아 있었다. 그 감정에 너무 빠지지 않으려고 지금도 노력한다. 나는 중간에 감정을 적당히 차단한다. 그래서 그 감정은 다 빠져나오지 못한 채 늘 밑바닥에 남아 있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을 때 그 감정이 다시 떠오르려고 해서 위험했다.


  어머니는 개가 대문을 항상 갉아대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아버지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개소주라는 게 유행이었다. 개에 여러 약재를 넣고 고아 한약처럼 만든 것이다. 우리 누렁이는 그 한약재가 된 것이다. 부모님이 밥상에서 나눴던 대화는 그 일을 후회하는 대화였다. 최소한 집에서 키우는 개를 잡아먹지는 말았어야 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누렁이를 먹고 아버지 건강이 좋아졌다는 말도 했다. 엄마의 자기 위안일 수도 있지만 나는 한번도 엄마에게 그 일을 놓고 따지지 않았다. 누렁이보다는 부모님이 더 소중했으니까, 약간의 후회를 하고 계시니, 더 깊은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 후로 누렁이의 일은 나만의 일로 남았다. 개들의 눈은 대체로 천진해보인다. 우리 누렁이도 눈이 특히 예쁜 아이였다. 노란색 털과 예쁜 눈을 가진 우리 누렁이, 마실 갔다가 자기 집이라고 돌아왔던 영리한 누렁이한테 정말 미안하다. 사과를 하면 누렁이가 받아줄까. 너를 계속 기억하는 것으로 위안을 받을 수 있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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