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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작가 Apr 06. 2021

나도 누군가에겐 개새끼일까

퇴준생 보고서 25 - 개새끼에 대한 심오한 고찰

퇴사 날짜가 임박했다. 회사 사람들은 내가 그냥 지나가기만 해도 난리다.

누구는 계속 퇴사 날짜를 확인하기도 하고, 누구는 울먹이며 미리 내가 없는 때를 걱정하기도 하고, 누구는 아련한 눈빛으로 얼마 안 남았다며 서글퍼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이가 나의 사라짐을 아쉬워하지는 않는다. 여전히 내가 지나갈 때 쳐다보지도 않고, 말 한마디 걸지 않으며, 같이 있지 않으려 애를 쓰는 사람도 있다.

나라고 일부러 다가가서 살갑게 굴 생각은 없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나도 저 인간한테는 개새끼이려나.”




*편의상 그 사람을 B라고 칭한다.*


새삼스럽게 B에 대한 감정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겠다는 건 아니다.

일하던 도중에 받았던 스트레스의 80%의 지분은 B에게 있었다. 명치가 답답하고 숨 쉬기 힘들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아서 약을 먹기도 했었다.(퇴준생 보고서_결국 스트레스 때문에 약을 먹었다) 직장에서 해방이 머지않은 지금도 B가 여전히 불편하고 싫다. B가 싫은 이유를 일일이 나열하려면 꼬박 밤새워 3박 4일을 얘기해도 모자랄 게 분명하지만, 이제 와 떠올리고 싶지는 않다. 그만큼 나는 B 때문에 감정의 파도에 휩쓸려 고통스러웠다. 그 일들은 조금씩 잊히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없는 일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인간에게 역지사지의 마음을 적용하려는 나 자신이 잠깐 동안은 이해되지 않았지만, 뭐. B도 나를 그다지 좋게 보진 않은 게 분명하다. 그러니 매번 내가 있는 자리는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며 피하기도 했을 것이고, 나에게 말할 때마다 비꼬고 아니꼬운 말투를 썼겠지. 분명 B도 나를 싫어했다.

“내가 옳은 방향으로 살고 있다고 자부한다 해도 한 가지는 기억하자.
나도 누군가에게 개새끼일 수 있다.”

여느 드라마 속 인물이 했던 말처럼, 나는 내가 개새끼일 가능성을 열어보기로 했다. 분명 나는 내가 맞다고 생각하고 행동해도, 누군가는 불편하게 여길 수도 있다고. 나는 내가 B에게 했던 행동을 차분히 돌아보기로 했다. 어떤 부분에서 B가 나를 싫어하게 되었는지, 내가 했던 행동이 과했던 건지 말이다.


우선 나는 B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싫은 사람에게라도 분명히 지키는 것이 딱 한 가지 있다면 그게 바로 '인사'다. 심지어 나는 왕따를 당할 때, 그 주동자에게도 인사를 했다. 무시하고 지나쳐도 꿋꿋이. 그렇게까지 인사를 했던 건 예쁨 받으려고가 아니었다. 인간을 대함으로써 가장 기본적인 예의이자, 뒷말이 나오지 않게 만드는 가장 최소한의 장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B에게는 인사를 하지 않았는가. 합의된 사항이었다, B가 먼저 내 인사를 피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출근한 날, 나는 고개를 꾸벅이며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했다. B는 분명히 내 인사를 보고 들었으면서도 고개를 보란 듯이 돌렸다. 의도적으로 내 인사를 피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B에 대한 모든 인사를 멈추었다. 출근할 때도, 퇴근할 때도, 외출하고 다녀왔을 때도, 점심시간에도. 절대 그에게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고, 큰 소리로 여러 사람에게 인사를 할 때 의도적으로 B를 등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B에게 인사를 멈추지 말았어야 했을까?

그렇다면 왜 B는 내 인사를 무시했을까?

우선 난 말은 참 잘 듣지만, 그렇다고 고분고분한 타입은 아니다. 유교걸 마인드와 개쌍마이웨이적 기질을 동시에 가진 나는, 예의가 바르지만 당돌한 그런 젊은이로 비칠 것이다. 하는 말에 네네, 대답을 잘만 하다가도 '곧 죽어도 못하겠다' 싶은 부분에서는 조목조목 말대답을 하는 그런.

B는 특정 업무 때문에 새로 고용된 사람이었는데, 출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뜨거운 논제로 떠오르던 참이었다. 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 몰아간다고 생각할까 봐 자세히 사례를 적고 싶었지만, 적고 나니 아무리 익명이라도 세세하게 적으면 알만한 사람은 다 알 것 같아서 옮기지는 않았다. 차마 자세하게 담을 수는 없지만, 여자 직원들을 향해 외모와 몸매 평가를 앞세운 성희롱적 발언을 일삼았고, 근무 시간을 자기 개인 시간처럼 사용하는 등의 근무 태만이 가장 큰 이유였다.

나는 B에게 살갑게 굴지 않았다. 그가 싫었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농담에 웃어주지 않았고, 그가 거는 말에는 단답형으로 필요한 대답만 했다.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긴 했지만, 아마 때론 눈빛과 말투에 싫어하는 감정이 그대로 묻어났을 것이다.(인정한다, 싫은 티 엄청 냈다) 내 태도가 그러하니 B 역시 나를 대하는 태도가 눈에 띄게 바뀌었고, 결국엔 인사를 받지 않는 지경까지 간 것이었다.


최대한 개인감정을 배제하려 애쓰긴 했으나, 나의 입장만 나열해놓은 이 글에 형평성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차피 답이 정해져 있는 결말에 괜한 정당성을 부여했다고,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르겠다. 믿을 수 없는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나도 B에게 친절하게 굴려고 노력한 적이 몇 번인가 있었다.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이런 과정과 결과 속에서 나는 내 행동을 고쳤어야 했을까?
혹은, 지금이라도 내 태도를 바꿔야 할까?
나는 감히 말한다. 몇 번을 되물어도 대답은 NO, 절대 NO다.


나도 누군가에게 개새끼일 수 있지만, 그 누군가가 내게도 개새끼라면 피차일반이다.

어차피 사람과 부딪혔을 때, 풀릴 사람과는 어떻게 해도 풀리게 되어 있다. 노력을 안 한 것도 아니고, 해봤는데도 안 되는 건 그냥 안 맞는 사이다. 게다가 서로 불편해서 서로 피하기로 암묵적 합의를 본 상태니, 구태여 내가 나서서 노력할 필요는 없다고 철딱서니 없는 핑계를 대본다. 세상 살면서 나랑 안 맞는 사람 한 명쯤 있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난 드라마 속 대사를 바꿨으면 한다.

"나도 누군가에게 개새끼일 '순' 있다."

모든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는 없다. 동시에 나 역시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순 없다. 때로 나를 위로하고 돌봐주는 사람도 있다면, 나를 고통스럽게 하고 진절머리 나게 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세상은 그런 곳이니까.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티 내고 괴롭히는 짓은 물론 하지 말아야 한다. 그건 성숙하지 못한 것을 넘어 범죄까지 이어질 수 있으니까. 하지만, 싫어하는 마음까지 어찌하리까.

그러니 인생에 가끔 미워하는 사람 한 명쯤은,
개새끼 한 명쯤은 있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오늘도 조용히, 인사 않고 넘어가련다.




다만, 그런 생각은 든다.

"내게 개새끼인 누군가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개새끼가 아닐지도 모른다."

나에게 B는 개새끼고, B에게 나는 개새끼일지라도 말이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을 사랑해주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나도 우리 집에선 귀한 자식'이라는 말마따나, 사람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되는 이유기도 하다.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것은, 그 누군가와 더불어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이니까.

나도 회사에서 왕따를 당해본 사람으로서, 그런 마음의 불씨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 자체를 갖지 않는 것이란 걸 알지만, 그게 어디 쉽냔 말이다. 차라리 감정이 없다면 모를까.


언젠가부터 나는 B와 잘 지내려고도, 그렇다고 감정을 티 내려고도 하지 않았다.

다만 부딪히지 않으려 노력했을 뿐이다. 어쩌다 부딪히더라도 혼자 미워하려 애썼다. 다른 사람한테 가서 이러쿵저러쿵 떠벌리지 않고 혼자 끓어올랐다가 혼자 가라앉혔다. 그리고는 다시 부딪히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러니 자연스레 B와의 궤도가 멀어졌다. 우린 부딪힐 일도 없었고, 일부러 서로에게 부딪히는 일도 없었다.

남은 시간도 이렇게 서로가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려고 한다. 일부러 다가가서 살갑게 굴지도, 그렇다고 공격적으로 굴지도 않을 것이다. 아마 B도 마찬가지겠지. 맞지 않는 사람과는 그렇게 관계를 조정하면 될 일이다. 우리의 삶은 '좋다/ 싫다'의 극단적 선택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게 아니니까.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을 피할 수 없다면,
그 누군가와 부딪히는 일이라도 피하자.

그게 내가 직장생활에서 얻은 '개새끼에 대한 해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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