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레 식당의, 앙투완
내가 그를 처음 본 건 일 년도 더 전일 겁니다. 덥수룩한 바가지 머리에, 무뚝뚝하고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카레 식당에 일을 하러 온 그. 동굴 같은 가게에 앉아 있으면 보이는 거라곤 지나가는 행인들과 맞은편의 카레 식당이 전부인데, 나는 가게가 조용한 날이면 저 카레집을 유심히 쳐다보곤 했습니다. 긴 줄 틈에 끼어 있는 소위 인플루언서를 본 적도 있고, 저 작은 식당에서 일하는 직원이 무려 네 명이나 된다는 사실과 그중 한 명은 일본인 남자, 그리고 다른 한 명 무뚝뚝하고 피곤해 보이는 그의 이름은 바로 앙투완.
점심시간이 되면 카레 식당에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습니다. 직원이 많은 이유가 있었지요. 그들은 긴 시간 동안 하루종일 서서 주문을 받고, 서빙을 하고 또 치우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나는 내심 저 고된 일들이 젊은 친구들의 주된 직업이 아니기를 바랐습니다.
카레 식당의 직원들과 나는 어쩌다 마주치면 인사를 하거나, 내가 카레를 사러 가면 간단히 안부를 묻는 정도의 관계였어요. 이렇게 인사만 하고 지내던 이웃이 친구가 되려면 어떤 것들이 필요할까요.
점심으로 카레를 먹기 위해 식당에 갔다가 그 무뚝뚝하고 웃는 법이 없는 앙투완이 제 카레를 반값에 주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요즘 파리도 물가가 어마어마하게 올라 점심으로 먹는 카레 한 끼도 부담스러운 실정인데 그의 호의가 고마웠어요. 앙투완은 바쁠 때 내 주문을 종종 잊어버렸지만 대신 다른 걸 서비스로 더 끼워 주거나 공짜로 카레를 주는 일도 있었습니다. 타키 말고 프랑스인도 이런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다니, 혼자 생각하며 웃었지요.
어느 날 나는 여행에서 사가지고 온 맥주 한 병을 들고 앙투완에게 갔습니다. 그의 친절에 답하는 마음으로 맥주 한 병을 선물로 주었더니 너무도 기뻐했습니다. 나는 그가 그렇게 환하게 웃는 걸 처음 보았어요. 이게 저토록 기쁠 일인가 싶었지만 오히려 순수해 보였습니다. 내가 겪은 많은 프랑스인들에겐 비슷한 구석이 있었어요. 아주 작은 선물에도 어린아이처럼 기뻐하고 감사할 줄 알았지요. 늘 불평불만을 입에 달고 사는 민족인 주제에, 거기다 날씨에 따라 감정도 시시각각 변하는 히스테리를 보여주는 인간들이, 예를 들어 그 나이와 격에 맞는 선물이나 혹은 구색 맞추기 식의 허울 같은 건 허용하지 않는 겁니다. 결코 쉬운 성격의 사람들은 아니지만 한편으론 순수하고 가식이 없는 편인 것 같아요.
그 후로 나는 앙투완의 웃는 얼굴을 더 자주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내가 준 맥주 때문은 아니고요, 그를 좀 더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하니 웃는 모습이 눈에 더 띄게 된 것입니다.
스물다섯인 그는 깐느(Cannes) 출신으로 카레 식당에서 일을 한 건 일 년 반쯤 되었습니다. 이 일이 혹시 너의 주된 직업이냐고 물으니 손사래를 치며, 패션 디자이너가 꿈이라는 그. 그러니까 그도 나와 타키처럼 원하는 일과 돈벌이가 일치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세대가 다 그런 것 아닌가요. 비단 한국의 젊은 친구들 뿐만 아니라 프랑스도 높은 실업률과 치열한 경쟁에 부모의 도움을 받고 사는 친구들이나, 도움을 받기 힘든 이들은 일찌감치 독립해 힘들게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기도 합니다.
앙투완이 패션에, 아니 정확히 그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바느질'에 눈을 뜨게 된 건 그가 열네 살 때였습니다. 대학에 가지 않았고 유튜브를 통해 바느질을 독학했다는 앙투완에게 나는 굳이 왜 대학에 가지 않았느냐고 물을 수 없었습니다. 한국만큼 학교의 디플롬이 중요한 프랑스, 어쩌면 한국보다 더 학연, 지연과 같은 인맥이 중요해 회사에서도 새로 부임한 디렉터가 자신의 사람들을 무더기로 데려와 채용하는 일이 아무렇지 않은 프랑스 사회에서 패션 디자이너가 꿈인 그가 대학에 가지 않았다는 건 그를 받쳐 줄 아무런 기둥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니까요.
파리에 홀로 상경한 그는 돈을 벌기 위해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바텐더를 거쳐 퐁토슈 가의 근처에 있는 큰 시장에서 샌드위치를 만들기도 했던 그는 그곳에서 현재 카레 식당의 주인아저씨 필립의 아내를 알게 된 계기로 카레 식당에서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까지 듣는데 나는 마치 우리 아버지 세대의 고생담을 듣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큰 병이 생겨 갑작스레 수술을 하게 돼 자신이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대목에선 짠한 마음이 들기도 했는데, 막상 앙투완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습니다. 나는 언제나 이런 이야기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희한하게 양지보다 음지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더 눈에 띄었고, 그들의 삶이 궁금했어요. 물론 앙투완이 음지에 있는 사람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는 젊고, 아름다우며,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동력이 충분해 보이는 사람이니까요.
카레 식당에는 좁아터진 부엌에서 치열하게 일을 하는 직원 하나가 더 있었습니다. 앞서 말한 일본인 직원이, 남향이라 여름엔 쪄 죽는 식당의 부엌에서 죽어라 카레를 퍼담고 있었는데요. 그의 이름은 타로, 언젠가 타키와 타로 다 같이 한국식 소주바에서 술을 마신 적이 있었습니다. 타키가 그를 뮤지션이라고 하길래, 대수롭지 않게 인스타그램을 보다가 그가 팔로워 만사천명을 보유한 상당히 유명한 뮤지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는 비트 메이커(Beat Maker)였는데, 그쪽 분야에서는 아주 유명한 사람이었어요. 서른다섯인 그는 생계를 위해 카레 식당에서 일하고, 나머지 시간엔 음악 작업을 한다고 해요. 매일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 음악을 만들고, 바로 카레 식당으로 출근해 일을 한 후 집으로 돌아가 또 음악 작업을 한다고 앙투완이 말해 주었습니다. 앙투완과 그는 아주 친해져 타로의 부모님이 계시는 일본에 가기도 했고, 또 반대로 앙투완의 고향인 깐느에 함께 가기도 했습니다. 타로를 가끔 마주칠 때마다 그는 늘 웃었어요. 무척 더운 한여름에 삐져나오는 카레 냄새가 지긋지긋할 때에도 그는 유쾌하게 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긍정적인 면모가 앙투완은 참 좋았다고 합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프랑스인들 중에 저렇게 긍정적이고 늘 유쾌함을 유지하는 사람이 과연 있기나 할까. 앙투완은 타로에게서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며 웃었는데, 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브로맨스란 바로 이런 것인가 했지요. 친구가 되는 데 있어 나이는 관계가 없는 게 분명합니다. 그런 타로가 곧 일본으로 돌아갑니다. 몇 년 간의 프랑스 생활을 마치고 아주 귀국한다고 해요. 이야기를 하는 앙투완의 얼굴에 아쉬움이 서렸습니다. 사실 앙투완뿐만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였어요. 타로가 떠나고, 내년엔 타키도 마르세유로 아주 떠납니다.
퐁토슈 가에서 지내온 칠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와 친했던 이웃들이 하나둘씩 떠나고, 또 가게가 문을 닫고 그렇게 사라지는 걸 여럿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마음이 달랐어요. 각자의 마음에 품은 것들이 있는 자들이 할 수 없이 생계를 위해 열심히 일을 하는 고용인으로서의 어떤 연대감 같은 게 있었거든요. 나는 바로 되물었습니다.
"앙투완 너도 떠날 거야?"
그는 당장은 아니라고 했지만 언젠가 타로가 있는 일본에 가 새로운 기회를 찾고 싶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만든 옷으로 샹젤리제에서 팝업샵을 열기도 하고, 나름의 방법으로 길을 찾고 있었어요. 물론 그 길에는 늘 좋은 일만 있는 게 아니었지만요. 자신을 홍보하기 위해 만든 명함을 패션 관련자들이 카레 식당에 올 때 주고는 했는데, 한 번은 유명한 젊은 독일 디자이너가 그 명함을 다 먹은 밥그릇에 담는 걸 보고 절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는 이야기에 나 또한 마음이 안 좋았습니다. 오래전 가게에서 일을 시작할 때, 말을 걸어도 대답조차 않는 거만한 손님과 나를 마치 시종처럼 여기던 인도와 아랍의 부유한 손님들이 생각났기 때문이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어떤 일에 아주 익숙해져서 그게 무엇이 되었든 전문가가 되어버리면 저런 손님들, 인성이 바닥인 인간들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런 것들이 나를 해칠 순 없는 거라는 강력한 믿음이 자리 잡게 된다는 걸 나는 이제 압니다. 앙투완도 그러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랐어요.
우리의 부모 세대처럼 하나의 직업이 평생을 지배하는 시대는 진작 끝났습니다. 특수한 전문직이 아닌 이상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일과 당장 할 수 있는 일 사이에서 끝없이 고민하며 살아가야 하는 세대인 거죠. 그래서 어쩌면 우리의 정체성도 단 하나의 컬러, 빨강! 노랑! 녹색! 이 아니라 이들의 중간색 어디쯤, 삶을 살아가는 방식도 좀 더 모호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은 이웃들이 떠나고, 앞으로도 떠날 것이고, 나는 퐁토슈 가의 조상님으로 남게 될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렇게 해서 계속 글을 쓸 수 있는 동력이 주어진다면 조상님 자리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나의 다정했던 이웃들의 삶을 응원하고 또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