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치동 7세 아이들이 세계에서 가장 영어에세이를 잘 쓰는 이유
첫 발령지 고등학교에서 근무했던 시절,
나는 매일 진땀을 빼면서 EBS수능특강, 수능 모의고사 수업 준비를 했다.
2011~2014년, 수능 영어는 ‘킬러문항’이 정점을 찍은 시기였다.
빈칸 추론, 글의 순서, 문장 삽입 같은 고난도 추론형 문제가 특히 어려웠다.
그중에서도 하이라이트인 3점 빈칸 문제는 단순히 영어 실력만으로 풀 수 없었다.
긴 지문 속에서 논리적 추론을 하고, 단서를 연결해 맥락을 읽어내며,
배경지식과 문해력, 분석력을 총동원해야만 답이 나왔다.
난이도가 높아 “외국 대학생들도 못 푼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고,
그 한두 문항이 등급을 갈랐다.
그래서 수능 영어가 절대평가로 바뀐다고 했을 때,
나는 이제 영어 사교육이 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 그 말도 안 되는 킬러 문제에 매달릴 필요 없겠구나’ 하고 말이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영어가 변별력에서 밀려나자, 학군지는 조금 더 빠르게 시계를 돌렸다.
“시험에서 안 묻는다면, 더 빨리 끝내고 다른 과목 경쟁으로 넘어가자.”
이건 마치 부동산 규제를 한쪽에 걸면 다른 쪽으로 수요가 몰리는 ‘풍선효과’와 같았다.
처음 영어유치원은 7세 한 해만 다니는 경우도 많았지만
점차 6세, 5세로 내려갔고,
심지어는 4세 영어 놀이학교처럼 유아기부터 노출되는 코스가 생겼다.
지금은 4세부터 7세까지 이어지는 장기 코스가 대치동의 엘리트 코스로 자리를 잡았다.
4세에서는 이른바 Gate를 준비하는 4세고시 준비가,
영유 과정에서는 7세고시를 대비한 레테레슨이 성행한다.
레테의 가격은 놀랍게도 적게는 시간당 5만원에서 유명 선생님은 10만원까지 간다.
놀이학교, 영유 비용 이외에 레테 과외비까지 더해지면
엄마들이 한달에 영어에만 쓰는 비용이 200만원+α에 달한다.
이 모든 과정은 결국 7세고시를 위한 것이다.
3~4년 동안 쏟아부었던 돈과 에너지, 이 모든 것을 증명해야 한다.
합격 실적은 유치원의 명예이자, 부모의 선택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된다.
대치동의 일부 영어유치원은 합격 실적을 플랜카드로 내걸고,
부모들은 ‘조기에 이렇게 투자했는데, 비영유와 같은 출발선에 설 수 없다’는 압박을 느낀다.
그리고 영어유치원 3년을 졸업한 우수한 아이들과 함께
탑학원에서 빠르게 영어를 마져 달려나간다.
3학년 때에는 '황소'수학으로 집중하기 위해서...
이렇게 영어레테 경쟁이 심화되면서
7세 후반에는 아이들이 매우 짧은 시간 안에 5-paragraph 에세이를 완성하는 수준에 도달한다.
문단마다 주제문(topic sentence)과 뒷받침 문장(supporting details)을 정확히 넣는다.
단어 선택도 단순하지 않고, 가능한 한 fancy한 어휘를 쓰며,
문장과 문장을 잇는 연결사(transitions)도 적절하게 배치한다.
아마 대치동 7세 라이팅은 단연컨대, 동일 나이 대비 세계 최고의 아웃풋일 것이다.
어떠한 나라의 만 5세, 6세 아이들이 이렇게 영어 라이팅을 쓸 수 있을까.
애초에 그런 트레이닝을 받지도 않겠지만 말이다.
극도로 과열된 조기 영어 교육에서 끝까지 버틸 수 있는 아이들은 많지 않다.
이 아이들의 특성은 이러하다.
웩슬러 언어지능 상위 97% 이상
언어 발달이 빠른 경우, 특히 여자아이일 가능성이 높음
순응적이고 조용하며, 엄마 말을 잘 듣는다
책을 좋아하고, 흥미와 열정이 많다
머리가 아주 좋다
이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학습식 영유 3년과 7세 레테 준비를 버티기 힘들다.
설령 7세 고시에 합격해도,
초등학교 저학년 때, 주 2~3회 영어학원과 숙제에 시달리며 또 이탈자들이 생긴다.
결국 영유 3년과 초등 저학년을 무사히 마치고
영어를 안정 궤도(?)에 올린 뒤 수학으로 전환할 수 있는 아이들의 비율은 많지 않다는 것이다.
이 극도로 과열된 조기영어교육 시장 속에서 많은 반응들이 있다.
영어유치원을 비판하며 ‘엄마표 영어’로 방향을 전환하고
인플루언서들이 흐름을 주도하며, 새로운 교육과정들이 생기고 있다.
또한 유명 소아정신과 교수들은 유아기의 과도한 학습 부담이 정서·뇌발달에 미치는 영향을 우려한다.
최근에는 아예 '영유아 영어유치원 금지법'이 나오고 있다.
조기 영어 교육의 과열을 제도적으로 억제하려는 시도이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을 극복(?)하고
메디컬계열 혹은 SKY까지 안착하는 ‘유니콘’ 같은 아이들이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학군지 엄마들이 이 과정을 따라가다
엄마도 아이도 번아웃을 겪고
아이는 영어에 대한 흥미를 잃으며
이미 경쟁에서 밀렸다고 느끼는 ‘실패의 경험’을 하게 된다.
이것은 '학습된 무기력감'으로 이어지고,
'집으로 가출하는 아이'가 되어 버리기도 한다.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을 끝까지 해낸 아이들은,
인도에 가도 IIT에 갈 수 있는 아이들이다.
즉, 그 자체로 이미 특별한 역량과 조건을 갖춘 경우다.
그렇다고 반드시 이 사회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영어로 매력적으로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있고,
세상을 더 넓게 보는 시각을 갖춘 사람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저 시험과 경쟁에서 살아남는 기술을 익힌 것일 수 있다.
심지어 이 과정이 입시에서도 정답이 아닐 수 있다.
어떤 아이들에겐 불필요한 소모전이 될 수 있다.
아이마다 발달 속도와 강점, 배움의 방식이 다르다.
중요한 것은, 내 아이에게 맞는 방향과 리듬을 찾는 일이다.
그리고 그 길을 꾸준히, 오래 걸어갈 수 있도록
환경과 마음을 지켜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