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없는 경험이 가장 오래 남는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나는 교실 뒤편 사물함에서 이상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연필 깎은 부스러기를 모으는 것이었다. 작은 종이봉투에 색색깔의 나무 가루들을 차곡차곡 모아두었다.
선생님도, 친구들도, 심지어 나 자신도 왜 그런 짓을 하는지 몰랐다. 그냥 예뻤다. 그냥 좋았다. 아무 쓸모도 없었지만, 그 작은 봉투는 내 책상 서랍 깊숙한 곳의 보물이었다.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연필 부스러기들의 향기가 기억난다. 나무의 달콤함과 흑연의 차가운 냄새가 섞인 그 향이.
왜 하필 연필 부스러기였을까? 왜 그 무의미한 행동이 아직도 이렇게 선명할까?
요즘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독서는 자기 계발을, 취미는 부업의 가능성을, 심지어 산책조차 운동 효과를 위해 한다. 하지만 정작 우리 머릿속에 가장 선명하게 남아있는 기억들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내 연필 부스러기처럼 말이다. 교실 창가에서 본 먼지 입자들이 햇빛 속에서 춤추던 모습. 길을 걷다가 우연히 들은 누군가의 웃음소리. 비 오는 날 카페에서 마주친 낯선 사람의 표정.
이런 순간들은 그 당시엔 완전히 '쓸모없었다'. 시험에 나오지도 않고, 스펙에 도움이 되지도 않고, 돈이 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이 기억들이 아직도 이렇게 생생할까?
면접 합격 발표를 받던 순간보다, 그날 집에 가는 길에 편의점에서 산 아이스크림 맛이 더 기억난다. 대학 졸업식보다 한밤중 기숙사 복도에서 룸메이트와 나눈 시시콜콜한 대화가 더 선명하다.
우리 뇌는 참 아이러니하다. 중요하다고 생각한 순간들은 의외로 쉽게 희미해지는데, 아무것도 아니었던 순간들은 HD급 화질로 보관해 둔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피크 엔드 법칙'이나 '자이가르닉 효과' 등으로 설명하지만, 나는 더 단순하게 생각한다. 목적이 없었기 때문에 순수했고, 순수했기 때문에 진짜였다.
현대인의 가장 큰 비극은 모든 경험을 '투자 수익률'로 계산한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뭘 얻을까? 이 영화를 보면 어떤 깨달음이 있을까? 이 여행을 가면 인스타그램에 올릴 만한 사진이 나올까?
하지만 정말 우리를 변화시키는 건 이런 계산된 경험들이 아니다. 우연히 들어간 서점에서 제목도 모르는 시집을 뒤적이다가 마주친 한 줄.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며 본 구름의 모양. 새벽에 혼자 라면을 끓여 먹으며 든 생각들.
이런 순간들이야말로 우리를 우리답게 만드는 진짜 재료들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의도적으로 '쓸모없는' 시간을 만들려고 한다. 목적 없이 동네를 걸어 다니고, 결론 없는 대화를 나누고, 생산성과는 거리가 먼 일들을 한다.
처음엔 죄책감이 들었다. 이 시간에 뭔가 더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점점 깨닫게 됐다. 이 '무의미한' 시간들이 쌓여야 비로소 의미 있는 순간들이 빛을 발한다는 것을.
어린 시절 내가 모은 연필 부스러기처럼, 우리도 때로는 아무 쓸모없는 일에 몰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삶이 완성된다.
결국 삶의 진짜 가치는 목적지가 아니라 여정에,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성취가 아니라 경험에 있다. 그리고 그 경험들 중 가장 소중한 것들은 언제나 가장 쓸모없어 보였던 것들이다.
오늘 당신에게 일어난 가장 '쓸모없는' 일은 무엇인가요?